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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돌이켜 보면 그때가 참 좋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운동장으로 나가 뛰어 놀았다. 학교 바로 앞에 넓은 백사장이 있어 뒹굴며 놀았다. 한참 놀다 집에 가자마자 가방을 던져 놓고 동네 놀이터로 부리나케 뛰어 나갔다. 그렇게 또 한참을 놀다 보면 엄마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OO야~~ 저녁 먹어라~~~” 아쉽지만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엄마 손에 붙잡혀 끌려갔다. 아쉽지만 아쉽지 않았다. 내일 또 그렇게 한바탕 놀면 되니까.

매일같이 뛰고 뒹굴고 하는 우리들의 놀이터에는 항상 함께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보형이었다. 동네 골목 담벼락 아래나 놀이터 한쪽 구석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함께 노는 형들의 얘기나 동네 어른들로부터 주워들은 얘기는 많았지만 그 바보형의 사연에 대해 팩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아침 일찍 동네 어귀에서 나타나 동네 꼬마 녀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이후 비로소 그 바보형도 집으로 갔다. 그 사람의 집이 정확히 어딘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집으로 가려면 동네 끝 저수지를 지나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는 말도 있었고 집이 없어 산에서 잔다는 말도 있었고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아들이어서 밤에는 학교에서 잔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 바보형의 집에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진위를 알 수 없었다.

그냥 그 바보형이 있었다. 항상 우리와 함께 있었다. 적어도 우리 무리 중 가장 덩치 큰 형보다 더 덩치가 컸고, 가장 나이가 많은 형보다 더 나이가 많은 것으로 보였지만 단 한번도 우리가 노는 것을 방해하거나 때리거나 위협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한참을 지켜보다가 동네를 배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특이했던 것은 다른 동네에도 우리 동네 바보형과 같은 사람들이 꼭 한명씩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냥 거기에 있었다. 우리와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지 정확하게 특정할 수는 없지만 동네에서 바보형들이 없어졌다.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동네 꼬마들 노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동네에 꼭 한 명씩은 있었던 바보형들이 없어졌다. 골목골목 들어찬 주택이 없어지고 아파트가 생기고 도시가 개발되면서부터 없어졌던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돌이켜보면 자동차가 왕래하기 이전 도로는 공유재였다. 사람들이 교류하는 장소, 아이들이 뛰노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현재 도로라는 공유재는 파괴되었고 이제는 자동차만 바삐 오가는 공공 공간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p.139)

맞다. 그때는 도로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를 제외하면 모조리 우리, 동네 꼬마들이 뛰어 다니고 뒹굴 수 있었던 골목이 많았다. 이 책 「반란의 도시」는 우리들이, 우리들과 같은 공간에 존재했었던 바보형들이 어떻게 도시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고찰을 다루고 있다. <도시권>은 생소한 개념이지만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도시인들이 당연하게 가지는 권리다. 그땅에서 살고 있고 그 도시에서 세금을 내고 그렇게 세금을 내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권리를 가진다는 개념이다. 도시는 원래 공유재다. 국가와 사회도 그렇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땅과 도로는 공유재다. 일정한 공유재를 도시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이 공유해서 사용해도 남았을때는 현대 도시가 갖는 제반 문제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공유재가 파괴되고, 그것을 가지는 이가 사유화하면서 도시는 급속도로 파괴되었다. 이 책에서 논하는 파괴는 일반적인 파괴의 개념과는 다르다. 시대가 변하고 도시가 개발되면서 도시는 물론 발전했다. 높은 건물이 생기고 더 많은 도로가 생기고 온갖 편의시설과 공공시설, 교육시설이 만들어 졌다. 분명 예전보다 더 살기 좋고 편리하고 유용한 삶의 장이 되었다. 하지만 바보형들이 없어졌다. 일부러 내쫓은 것도 아니고 모두 모아서 어떤 장소에 가두어 놓은 것도 아닐텐데, 없어졌다.

 

 

“과거부터 형성되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은 도시권은 지나치게 협소하고 제한적이며 대부분의 경우 한줌도 안 되는 정치·경제 엘리트 수중에 들어가 있다.” (p.58)

책에서 말하는 이들 정치·경제 엘리트는 자신들의 특수한 수요와 욕구에 가까운 모습으로 도시를 만들었다. 국가와 사회의 특성에 따라 그런 엘리트들은 다른 형태로 발현된다. 한국의 현대사에서도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도시에서 부자를 위한 건설 붐이 한창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도시는 농업의 산업화와 상업화 탓에 농지를 잃고 몰려든 가난한 농민들로 북적인다.” (p.40)

박정희 시절 도시로 몰려든 도시빈민들에 대한 강제 이주 정책은 폭력적이고 야만적이었다. 농촌에서 농사로는 도저히 살길이 없어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은 서울의 산등성이에 몰려들었다. 판잣집을 짓고 살고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 광주로 성남으로 부천으로 쫓겨났다. 그들이 땅거미처럼 들러 붙은 것이 미관에 좋지 않았던 것인지, 그들이 없어진 자리를 상업·주택 용지로 만들어 부동산 투기를 하려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그들은 쫓겨났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내던져 진 도시빈민들에게 도시권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서울에 있는 공장에 가기 위해서 타고갈 버스도 없었고 상·하수도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삶을 영위해야마나 했다. 이들이 떠난 도시는 엘리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황무지로 쫓겨가 죽을 힘을 다해 돈을 벌고 모아 다시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들 엘리트들의 손에 있는 아파트를 사야 했다. 또다시 엘리트들의 잇속만 채워지는 꼴이었다. 이 꼴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친 부동산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실천적 슬로건이면서 정치적 이념이기도 한 집단적 권리, 도시권은 해묵은 물음을 다시 제기한다. 즉, 도시 공간의 형성과 잉여의 생산 및 이용 사이의 내적 관계를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p.60)

도시 공간을 재배치하고 재구조화하는 것에는 분명히 잉여가치가 형성된다. 누군가는 반드시 배를 불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분별하게 도시를 개발하고 확장하며 미친듯이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지금처럼 이렇게 펌프질 하는 미친짓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형성된 잉여를 갖는 자(들)은 누구인가? 지금도 도시의 모든 이권을 독차지 하고 있는 자들이다. 단순히 건물 몇채를 가진 건물주가 아니라 도시를 재배치하고 개발하는 등의 구조를 만들게 한 장본인들, 정치·경제 엘리트들이라 볼 수 있다. 도시에 건물이 들어서게 하고 큰 도로가 생기게 하는 등의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동네 꼬마들과 바보형들은 모조리 사라졌다. 도시는 더 이상 동네 형들과 친구들, 바보형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이들은 학원이다 과외다 독서실이다 도로와 골목을 뛰어다닐 시간이 없다. 물론, 그런 골목 또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도시에서 살아남이 위해 매일 고군분투 중이다. 반란과 혁명을 꿈꾸기에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국가와 사회가 더 이상 국민의 안전을 지켜줄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자 사람들은 집단 우울증에 빠진 것처럼 힘들어졌다. 최소한 국가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안전을 지켜주고 위기에 빠진 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줄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 그리스의 파업 노동자 그리고 런던에서 더반, 부에노스아이레스, 선전, 뭄바이 등 세계 곳곳에서 등장하는 전투적 대항운동도 민중 대 월스트리트당 투쟁의 일환이다. 대자본과 화폐 권력의 야만적 지배는 이제 세계 어디에서나 수세에 몰렸다.” (p.274)

그래서 책의 후반부에서 소개되는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도시의 반란은 최소한 한국에서는 해당되지 않을 것 같다. 모든 것이 가진 자, 정치·경제 엘리트를 위해 존재하는 도시와 국가에서는 애초에 도시권을 가진 시민, 국민들이라 할지라도 ‘자기 팔 자기가 흔들기’를 해야마나 한다.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고 지켜주지 않는 사회와 국가에서 산다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분명히 이번 달에도 피같은 내 돈이 국가의 주머니에 세금으로 정확하게 들어가고 있는데, 내 팔은 여전히 내가 흔들어야 한다. 이것이 반복되고 재생산되면서 가끔 해외에서 들려오는 ‘반란의 기운’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가 걷잡을 수 없이 야만스러워지는 사회에서 우리가 힘겹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야만적 정치인은 지출 경비를 속이며 국민의 혈세를 가로챈다.” (p.262)

“대량 약탈의 정치경제, 백주의 강도짓을 방불케 하는 약탈적 수법의 정치경제는 이제 일상사가 되고 있다.” (p.263)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난 후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거대 자본권력이다. 거대 자본권력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정치권력과의 결탁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 야만적 정치인, 야만적 기업인, 야만적 지식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단지 내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동네 골목과 그 골목에서 함께 존재했던 바보형들만 판을 빼앗긴 것이 아니다. 정당하게 도시권을 주장하고, 아니 굳이 주장하지 않더라도 당연하게 누려야 할 도시권을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있다. 책에서의 표현처럼 벌건 대낮에 강도짓을 당하고 있지만 하소연 할 데도 없다. 계속되는 표현처럼 일상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분노하고 짱돌을 들고 봉기하고 반란을 도모하거나 일으키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멀리서 전해 듣지만 우리의 일상을 바꿀만큼은 아니다.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가 특별히 굼뜨거나 약한 사람들은 아닌데,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쉽게 일어서지 못한다. 쉽게 반란을 꿈꾸지 못한다. 오랜 독재정권의 무시무시한 공권력의 발로가 지금세대의 DNA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 일상이 되어 버리면 나중에는 불편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렇게 살아 왔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뀌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살아야 한다.’ 라는 패배주의적인 자각. 이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대로, 계속해서 끝까지 지금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이 도시와 사회와 국가를 움켜쥐고 모든 것을 가진다면... 우리의 미래는 너무 참담하다. 정치적 각성만으로 반란을 도모할 수 없다. 애초에 우리에게 도시권이라는 것이 존재했고, 그것은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 당연한 권리이자 특권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단순히 현재 정권과 기득권 혹은 자신과 정치적 방향이나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설익은 채 나무에서 떨어져 썩어가는 어느 열매처럼 그렇게 없어질 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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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보의 착각>

 

 

 

 

 

 

 

 

 

 

 

 

 

세월호 참사의 와중에도 야당은 여당과 야합해 기초연금법을 통과시켜 주었다고 하네요. 늘 하던 얘기지만 똑같은 자들입니다. 한국의 가장 큰 불행 중 하나가 바로 의미없는 야당을 가진 것일텐데요. 아무런 영향력도 없고 패기도 없고 여당과 싸우려는 용기도 없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집단입니다.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진보는 찾기 힘듭니다. 지금믜 여당과 제1야당은 한 데 묶어 보수라 봐야 하고요. 진보진영이라 해봤자 녹색당, 정의당 수준입니다. 하지만 유럽의 진보진영의 색깔이나 노선과 비교하면 중도보수에 가깝죠. 우리는 이념싸움에 이전투구 하다보니 진보가 가져야 할 아젠다를 설정하지 않은 채 그저 국회의원이 되고 원내 교섭단체가 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글지 못한 진보진영의 목표가 통진당 사태라는 어처구니 없는 실패를 낳았죠. 그 사태로 인해 언제 다시 진보진영이 원내 교섭단체가 될 수 있을 지 막막한 실정입니다. 진보의 착각, 좋은 말하고 이상향 부르짖으면 유권자와 국민들이 잘한다 잘한다 할 줄 아는 데, 전혀 아닙니다. 책의 소개글처럼 '서민의 철학'을 해야 합니다. 실제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문제와 어려움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고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예전의 투쟁 방식과 경험만을 추억하며 대중의 지지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뿐입니다. 진보가 대중들에게 다시한번 지지를 얻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길을 찾아야 합니다.

 

 

 

2. <죽음의 식탁>

 

 

 

 

 

 

 

 

 

 

 

 

"알아야 산다.', "알아야 산다." 군대에서 화생방 훈련을 받아 온 분들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구호입니다. 화생방전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비해야 하고 대피해야 하는지 알면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책의 머리말도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는군요. 우리가 매일 마주하고 너무나도 친근하게 만나는 우리집의 식탁위에 죽음이 올려져 있다는 카피 자체가 섬뜩합니다. 사람들은 유기농과 생활협동조합의 먹거리를 찾습니다. 일반 먹거리보다 훨씬 높은 가격이지만 사람들이 찾는 이유는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들 중에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농약이 남아 있는 음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음식을 가공하고 유통하는 공장도 의구심을 지울 수 없고 무엇보다 기업을 위한 규제가 문제시 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대대적으로 규제는 악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규제를 하지 않으려는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규제 완화와 철폐가 능사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먹는 음식에는 어느 정도의 규제와 간섭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우리의 식탁에서 더 이상 발버둥치기 전에 말이죠.

 

 

 

3. <러시안 다이어리>

 

 

 

 

 

 

 

 

 

 

 

 

지난 소치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말이 많았습니다. 애초 개최 선정지로 선정되는 과정에서부터 경기장 건설과 건설인부들에 대한 부당한 노동대우 등. 그런데 올림픽은 열리고 푸틴은 자국 선수들의 경기에 참관해 유독 언론 노출을 많이 하더군요. 이 책은 2003년 푸틴이 재선에 성공한 후 러시아가 어떻게 더 비참한 지경으로 빠져들었는지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책의 소개글만 잃어봐도 내용은 르뽀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의 실패와 냉소, 무기력에 관한 보고>라는 부제에 눈이 멈춥니다. 한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참담하기도 합니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실패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교훈을 삼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벌써 이 책에서 소개되는 러시아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아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다면 이런 책을 많이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희망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돌이킬 정황이 남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4. <다산 정약용 평전>

 

 

 

 

 

 

 

 

 

 

 

 

 

다산 정약용과 같은 학자, 정치가, 사상가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자신이 말하고 연구한 것에 대해서 어떤 압력이나 압박이 와도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하는 데 지금은 그런 학자, 정치가, 사상가를 찾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세상입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도 TV에 나오는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모두다 잠수전문가들이었습니다. 힘을 가진 권력이 조용히 입다물고 있으라고 한 것이 우선된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박, 인양, 항해 등의 전문가들이 모두다 입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본분을 잊고 그저 시류와 힘에 편승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만을 비판할 수 없는 것은 우리는 역사 이래로 바른 말 하는 자들의 비참한 말로를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권은희 수사과장과 윤석열 검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길을 택한 것이겠지요. 다산 정약용에 대한 연구의 전문가 박석무씨가 펴낸 다산 정약용 평전입니다. 유배지와 글에만 머문 선비가 아니라 몰락해 가는 조선후기 실천하는 지식으로서의 다산을 재조명한 책이라고 합니다. 정말 궁금한 내용입니다. 한국의 지식인 나부랭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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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사냥꾼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장수미 옮김 / 단숨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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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인생을 살면 살수록 사는 게 뭔지 더 모르겠다. 예전에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으면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지?’ 했었는데, 지금은 내가 그런 뚱딴지같은 넋두리를 늘어놓을 때가 있다. 이런 생각과 더불어 요즘 내 머릿속을 온통 채우고 있는 생각은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이지?’ 하는 것이다. 거창한 철학적·종교적 궤변을 늘어놓기 위함은 아니다. 그냥 살다보면 그런 것들에 일상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단 하나의 동아줄이 되기도 한다. 나의 욕망과 기대와 꿈을 버무려 야무지게 내 삶, 그 한가운데로 밀어 넣으려 해도 아무것도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철이 든 이후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 철이 들기 전까지 세상이, 어른들이, 선생들이 가르쳐 준 것들은 진실이 아닌 것이 많았다. 다들 각자 다른 이유들로 각자의 욕망과 자리보존의 처절함을 내게 투사했을 뿐이었다. 철이 든 시점은 정확하게 책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한다.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철이 들지 않은 채 그저 세상이, 어른들이, 주변 사람들, 그리고 TV에서 말해주는 것만 진실인 양 알고 살았을 것이다. 뭐, 그랬다면 오히려 더 살기 편했을 수도 있겠다. 크게 분노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떠들어대지 않고 살면 되니까.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이미 든 철, 떨쳐낼 수도 없다.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한다. 분명히 잘못된 것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지적을 하면 이런 대답들이 돌아왔다. “나만 그러냐! 더 크게 해 먹는 진짜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랬다. 정말 그랬다. 살아보니 정말 그랬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작한 군 생활과 그 이후의 직장생활에서 이것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저 내가 다들 그렇듯이 입 다물고 한 패가 되면 만사 오케이였다. 굳이 드러내고 이야기하고 싫은 내색하지 않으면 모두가 오케이였다. 그런데 정말 그들의 말이 맞았다. 정말 살다보니 더 크고 나쁜 놈들이 더 많았다. 이야기해보기는 커녕 싫은 내색조차 할 수 없는, 내 토악질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저 만치 높은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나쁜 놈들이 많았다. 이놈들에 비하면 다들 그렇게 그렇게, 쉽게 쉽게 살면 된다던 선배들과 동료들은 애교 수준이다. 그래서 더 슬프고 암담하다.

“왜냐하면 악은……. 악은 그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기 때문에.” (p.412)

악은……. 정말 그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는다. 지난 대선 전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가 그렇게 얘기했던 “불법은 성실하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성실하고 끊임없으며 치밀하다. 그래서 살아남는다. 그리고 보편적이다. 철저하게 보편적이다. 이 책 「눈알사냥꾼」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마 차린 주커는 분명한 악이다. 주커는 성실하고 치밀하다. 끊임없이 알리나와 알렉스 곁에 있다. 결코 떠나지 않는다. 그것이 악이다. 주커가 여성들을 납치해 강간하고 눈알을 뽑아내고 눈꺼풀을 제거하는 행위 자체도 악이지만 알리나와 알렉스, 나와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이 악의 본 모습니다. 사실 악은 멀지 않다. 때론 너무 가까워 밭은 숨을 내쉬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이런 말이 있죠. 적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파괴되는 것은 친구에 의해서이다. 제 옆 우리에 있던 소녀는 결코 포로가 아니었어요. 이해하시겠어요? 이리스가 연기를 한 것뿐이었어요.” (p.274)

주커의 또 다른 피해자 타마라의 말이 정확하다. 우리를 정말로 파괴하는 것은 가까운 존재일 수 있다. 물론, 모든 경우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빈도에 상관없이 가까운 친구나 존재로부터 존재론적 악을 발견한다면 내상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악은 가깝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악의 태동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돌고 돈 다는 것이

다. 나는 그렇게 이 책이 읽혔다.

“틀렸습니다. 그 여자들은 성희롱을 당했죠. 그러고는 침묵을 지키고 그 불의의 사건을 덮어두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피해자였어.”

“아뇨, 가해자였습니다.” (p.332)

주커가 알렉스와 알리나를 잡아 놓고 이야기한다. 왜 알렉스의 아내를 죽이고 그의 아들 율리안을 납치했으며, 알리나를 그렇게 성실하고 끊임없이 괴롭혔는지를. 알렉스와 알리나의 입장에서는 주커가 악의 근원이고 요체다. 그로 인해 모든 일이 시작되었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모든 절망이 마무리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주커의 입장에서는 꼭 그렇지 않았다. 알렉스의 아내, 니콜라, 타마라, 알리나, 그리고 여러 피해자들, 심지어 이리스에 이르기까지 그녀들로 인해 악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들의 부주의함, 그들의 무책임함, 처리하지 못한 두려움으로 인해 악의 뿌리가 견고해지고 자라고 자라 다른 부수적 피해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스릴러 장르 소설로 묶을 수 없는 철학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선은 어디이고, 악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런 주커의 독백을 대하는 알렉스의 분노는 일견 당연하다. 거의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반응이다. 무슨 개소리냐!! 너의 범죄를, 너의 추악한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합리화에 불과하다고. 그런데 정말 솔직하게, 생각해 보자. 작은 일상의 갈등에서부터 주커와 같은 연쇄살인마, 국가적 재난·재해에 이르기까지 선과 악을 두부를 반으로 자르듯 구분할 수 있을까?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난 그 놀란 표정을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내 말은 그 여자 모습은……. 아주 평범해 보였어. 우체국 창구에 앉아 있는 뭐 그런 여자처럼 말이야.” (p.276)

니콜라는 이리스의 얼굴을 보았다. 스승인 주커를 도와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그녀의 얼굴을 본 것이다. 그런데 그 얼굴이 더 충격적이었다. 너무나 평범하고 평범해서. 주변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의 얼굴이어서. 악은 그런 것이다. 우리들 가까이에 숨어 있는 것이다. ‘여기 내가 악이요. 나를 잡아다가 능지처참을 하시오~’라고 하는 악은 없다. 때론 너무 가까이에 있어 설마 악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뿐이다. 악은 일상에 편재(遍在)한다.

“내가 눈알수집가야.”

숄레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p.393)

알렉스 초르바흐는 가까이에서 그를 눈알수집가로 의심하기도 했고, 가열찬 수사로 눈알수집가인지 눈알사냥꾼인지를 찾아 나선 숄레의 충격적인 고백을 듣는다. 숄레가 바로 그 눈알수집가라는 것을. 그의 계획과 설계 안에서 모든 악이 이루어졌음을. 그래서 주커의 피해자들을 격리해 치료하고 있던 토르박사의 말을 책의 말미에서야 제대로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악은……. 악은 그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기 때문에.”

잔인무도한 프랑크 라만과 주커에게서, 이리스와 숄레에게서 악은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는다. 주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도 또 다른 주커의 모습으로, 또 다른 숄레의 모습으로 우리들 가까이에 다시 환생한다. 그 기생충과 같은 악이 생존할 수 있는 숙주의 환경이 너무 적절하고 적당하기 때문이다. 하루만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나열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기생하는,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을 통제하고 설계하는 악의 힘과 편재성을.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과 내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비기기. 알리나, 대체 잃을 게 뭐가 있죠?” (p.55)

앞을 볼 수 없는 알리나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특별한 능력, 마사지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으로 편재한 악을 소탕할 수 있을 거라는 무모한 기대는 버려야 한다. 악은 그대로 있지 않는다.

피체크의 시리즈가 눈알사냥꾼에서 끝날지 아닐지 모르겠다. 사실 이런 장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은 몰입해 읽었다. 구성이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긴장감을 탑재한 스릴러 장르가 이렇게도 읽히는 구나 싶었다. 몇 권 읽다 포기한 일본의 추리소설 장르와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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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학교의 힘 - 아이의 학력, 인성, 재능을 키워주는
박찬영 지음 / 시공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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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깝게 지내는 형님 첫째 딸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지난겨울부터 형님과 형수님은 함께 모일 때마다 첫째 딸의 입학과 교육문제 이야기를 했었다. 형수님이 현역 중학교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더 큰 고민과 걱정을 토로하며 딸아이를 위해 육아휴직도 생각하고 있다고 하시는 것을 보면서 ‘정말 이 정도로 해야 하나?’싶은 생각도 들었었다. 형님의 딸아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SNS를 통해 아이의 입학식 사진과 가족이 함께 교실에 앉아 찍은 사진을 볼 수도 있었다. 형수님은 이미 공언했듯이 육아휴직을 내고 아이 뒷바라지에 매진하고 계신다. 입학 이후 다시 만난 형님은 이런저런 고충과 고민을 털어놓으셨다. 먼저 형수님과 딸아이 교육에 대한 목표나 방법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 문제는 형님네 부부 말고도 주위에서 여러 건을 접한 터라 자연스러운 현상 같았다. 두 번째는 왼손잡이인 아이에 대한 담임교사의 지도였다. 입학이후 왼손으로 필기하는 형님의 딸아이를 보고 담임교사는 “할 수 있으면 오른손으로 해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늘 왼손으로 쓰고 왼손으로 밥을 먹고, 왼손으로 인형을 쥐고 놀았는데 갑자기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에게 “그건 아니야.”라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담임교사에게 그런 말을 듣고 온 이후 며칠 동안 학교에 가기 싫다고 이야기하고 선생님이 싫다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곱게 키운 딸아이가 처음으로 학교에 입학한 것 자체가 감격적이기도 하고 온갖 걱정과 염려에 입학 초기를 보내던 형님네 부부에게는 정말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 번째 더 충격적인 사실은 딸 아이 학급 전체 학생수가 17명이라는 것이었다.

 이 책 「작은 학교의 힘」에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학생 수다. 가장 적절한 초등학교 한 학급의 학생 수를 10∼12명으로 보고 있는데, 17명은 그보다는 조금 더 많다. 하지만 예전의 학생 수나 현재 다른 지역 초등학교의 학생 수를 알아보면 이상적인 숫자다. 그런데 17명밖에 안 되는 초등학교 1학년 반을 맡고 있는 담임교사의 수준이 그 정도라는 것이 정말 놀랍다. 그 사람의 인식에는 여전히 ‘오른손잡이가 당연한 것이고 왼손잡이는 이상한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 교사의 나이가 40대 중반이라고 하는데, 생물학적인 나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50대 중후반 교사라도 여덟 살, 아홉 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나 교육방식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도 여러 작은 학교에 근무하고 계신 교사들 중 50대를 훌쩍 넘기셨지만 젊은 교사들 못지않게 어린 아이들과 함께 동화하여 그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교육을 하는 분들이 계시다고 하니, 정말 나이 자체는 중요한 기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같은 도시지만 다른 구에 있는 초등학교는 또 사정이 다르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 수가 한 학급에 30명이 넘는 학교도 있었다.

언뜻 생각해도 학생 수가 많은 것보다 적은 것이 학생에게도 교사에게도 좋은 일이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60명 정도가 되었다. 아이들이 너무 많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지기도 했었다.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었다. 한 교실에 60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는데, 이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질리 만무하다. 질문이 있을 리 없고, 교사의 정성어린 보살핌이 미칠 리 없다.

 

 

“대부분의 학부모가 도심의 큰 학교를 선택하는데, 학교 사정에 훤한 교사들은 왜 변두리의 작은 학교를 선택하는 것일까? 나는 이 책에 그 이유를 솔직하게 밝히고 싶었다.”

 

학교 사정에 훤한 교사들이 변두리의 작은 학교를 선택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밝히고 싶었다는 저자의 진심이 전해진다. 저자 또한 일선 교사다. 가장 잘 알 것이다. 한번씩 TV교양프로그램에서 방영하는 대안학교나 시골학교에서는 세부적인 내용을 알 수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왜 작은 학교의 형태로 바뀌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선택이 아니라 왜 필수인지도 알게 되었다.

 

 

“일단 큰 학교는 한 반에 학생 수가 30여 명이나 된다.” (p.12)

“누구 하나 뒤처지지 않게 이끌어가는 교육은 분명 작은 학교가 큰 학교보다 훨씬 뛰어나다. 학생 모두에게 다양한 기회를 부여하고, 왕따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존감을 높여주는 작은 학교” (p.121)

 

일단 요즘 학생 수가 많은 기준은 한 반에 30명이라고 한다. 짧게 생각하기에 ‘30명? 그게 뭐가 많아?’생각하지만 이상적인 기준은 30명의 1/3수준이다. 한 반의 학생수가 30명만 되어도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면서 모든 학생들에게 질문을 할 수 없는 구조라고 한다. 이렇게 설명을 하니 이해하기가 쉬었다. 예전 우리 때처럼 그저 달달 외우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교육 방식에서는 30명의 학생 수가 이상적이겠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작은 학교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수업에 참여하고 교사가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학교라면 크게 뒤처지거나 아이들 사이의 비교의식은 사라질 것이다. 책에서는 그에 대한 자세한 사례를 여러 건 소개한다. 읽다보면 꿈같은 이야기도 많다. 정말 이런 곳이 있을까? 이런 학생들과 교사가 있을까? 싶다. 지난 이명박 정권 시절 부활한 일제고사는 학교를 서열화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초등학생들조차 시험을 쳐서 등급을 매기고 서열의 목걸이를 걸어야 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서열과 성적, 경쟁과 비교에 익숙해진 아이들의 이 구조화된 패턴은 성장하면서 고착화되고 당연시된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학생 10명 중 8명이 초등학교 때 학교폭력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학교폭력을 경험한 학생 중 44.7퍼센트는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p.30)

“교육의 핵심은 학생들의 자존감을 살리는 데 있다. 자존감은 자존심이나 우월감과는 다른 개념이다. 우월감은 있어도 자존감은 없는 아이가 많다. 우월감에는 다른 대상과의 비교가 전재되어 있다.” (p.109)

 

작은 학교에 이것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책의 제목인 「작은 학교의 힘」인 것이다. 아이들, 학생들의 자존감을 살리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쟁과 성적의 맹신에 사로잡힌 아이들에게 자존감의 고취는 불가능하다. 옆에 있는 친구들은 경쟁자들일 뿐이다. 교사의 적극적인 교육과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역에서 학교문제가 잉태된다. 교실 내 문맹이 발생하고 왕따와 폭력, 심지어 자살에까지 이르는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학생 10명 중 8명이 이미 초등학교 때 학교폭력을 경험한다고 하고 그 중 절반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자살을 생각했다고 하니,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내 옆, 뒤, 앞에 앉은 아이가 경쟁자가 아니라 친구라는 인식이 되지 않고, 교탁에 서 있는 선생이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오로지 공부 잘하는 애들에게만 잘해준다. 라고 단정 짓고 나면 그 열패감은 다른 곳으로 분출된다.

 

 

“교사는 절대 학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p.97)

“작은 학교에서는 모든 아이가 선생님의 눈에 들어온다.” (p.110)

 

논산 도산초등학교에서 작은 학교의 힘을 발견한 저자는 그 곳에서 만난 교사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평소 숙제를 거의 해오지 않는 아이 남식이의 이야기다. 매번 숙제를 해오지 않는 남식이의 가정 형편과 평소 학업태도를 관찰한 교사는 공부하는 습관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것을 파악한다. 그래서 방과 후에도 저녁밥을 함께 먹으며 그날 있는 숙제를 남식이와 함께 했다. 몇 달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남식이에게도 공부하는 습관이 생겼고 숙제를 거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례가 실제로 일어난 곳이 작은 학교다. 지금의 학생 수가 많은 큰 학교에서 남식이의 사례가 나올 수 있을까? 절대로 없다고 장담한다. 교사는 남식이 같은 아이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아이들이 너무 많다. 교무실에 가면 해야 할 공무도 쌓여 있다. “작은 학교에서는 모든 아이가 선생님의 눈에 들어온다.”라는 표현이 작은 학교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힘이라고 생각한다. 학생 입장에서도 ‘이 선생님이 나에게 관심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생님이 내게 관심이 있으면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진다. 잘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작은 학교는 학년 당 학급이 한 개씩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 학년 아이들이 모두 어울려 논다고 한다. 저자는 처음 작은 학교에 전근 가서 가장 놀란 것이 ‘하루에 세 번 등교하는 아이들’이었다고 한다. 아침에 등교하고 일과가 끝나고 하교하자마자 부리나케 다시 학교로 와서 숙제를 하고 나서 다시 운동장으로 나가 전교생이 어울려 노는 모습. 도시의 큰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하교 후 학원으로 과외로 쫓아다니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다. 실제로 저자는 작은 학교의 힘을 체험했다. 아이들 자체가 밝고 건강하며 왕따와 학교폭력같은 것은 발붙이지 못하는 학교, 성적과 우열이 없는 학교, 교사가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주목하고 관심을 가지다 보니 아이들 각자가 가진 역량과 재능, 은사를 발견해 주는 학교, 그래서 각종 도대회에 나가 도시의 큰 학교 학생들을 제치고 입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런 학교, 교사가 절대로 학생들을 포기하지 않는 학교 이야기를 들으며 ‘이렇게 좋으면 다들 몰릴 텐데…….’라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저자는 미리 알고 있었는지 적절한 대책도 언급한다.

 

 

“그렇다고 절대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은 학교들의 학구 제한을 풀면 된다.” (p.207)

“시골의 면 단위 학교나 전교생이 60명 미만인 초등학교의 경우 자유학구제 운영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해당 지역의 학생들에게는 기존 학구제를 유지해야 한다. 이후 학교가 정상화되어 학생 수가 일정 규모를 넘어서고 대기자가 많아지면 해당 지역 출신 학생에게 입학·전학 우선권을 주고, 그 나머지 학생을 공동학구제로 충당하는 방법” (p.210)

 

초등학교들은 학구 제한이 있다. 당연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학구가 좋거나 교육 환경이 좋으면 학생이 몰려드는 도시의 학교들을 보면 자연스럽다. 그런데 도시의 큰 학교들을 제외하고 시골이나 변두리의 작은 학교들 중 폐교를 앞두거나 분교가 되기 직전인 학교가 많다고 한다. 뜻 있는 교사들이나 학부모들이 의기투합해 그런 학교로 전학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아예 전 가족이 이사를 가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일터나 직장을 바로 그만두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작은 학교의 좋은 이상과 방향에 동의하고 그런 교육을 시키고자 무리하게 편법을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저자의 제안대로 학구 제한을 풀고 적절한 제한사항을 두면 지혜롭게 운영할 수 있을 것 같다. 전교생이 60명 미만인 초등학교에서부터 자유학구제를 운영하고 적정한 규모를 넘어서고 대기자가 많아지면 우선권 제도를 마련하는 것. 교육당국의 책임 있는 태도와 관리를 약속할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제도라 생각된다. 이런 탄력적인 제안마저 제대로 관철되지 않는다면 작은 학교의 이상도 제대로 관철되지 않을 것이다. 처음 대안학교가 생기고 그것이 사회적인 파장과 영향을 준 후 대안학교들이 우후죽순 생겼다. 너도나도 모여들어 대안학교를 보냈고 종국에는 말이 대안학교지 돈 있는 부모를 가진 아이들만 다닐 수 있는 대안학교도 무수하게 많이 생겼다. 제대로 제도와 규칙, 제한사항이 마련되지 않고 인기와 시류에 영합한다면 이상을 달성할 수 없다. 모두가 자신의 아이는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당연히 조금 더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기를 원한다. 이 책에서 소개된 기적을 이뤄낸 작은 학교에 다들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물론, 학군에 민감한 학부모들은 거들떠보지 않겠지만) 더 많은 학부모와 교사들이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된 틀부터 마련해야 한다. 아니면 작은 학교는 한낱 유행으로 그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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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성공 - 더 가치있게 더 충실하게 더 행복하게 살기
아리아나 허핑턴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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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아직도 젊고 어리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어? 벌써 내 나이가 이렇게 됐나?’싶을 때가 있다. 20대 초·중반 새벽 3시30분에 하는 유럽챔피언스리그 경기를 빼놓지 않고 시청했었다. 새벽 3시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다가 3시30분부터 5시30분까지(당연히 새벽)경기를 시청한 후 잠이 들거나 잠시 잠들었다가 경기 시작 전 일어나 시청하고 했다. 알람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잠들기 직전까지 나는 잠들지만 깨어 있을 뇌에 명령을 내려놓는다. ‘꼭 3시30분 즈음에 일어나야 해!’ 그러고 나면 반드시 일어났었다. 유럽축구를 좋아하는 내게 챔피언스리그 경기는 생활의 활력소였다. 한숨도 자지 못하거나 1,2시간 쪽잠을 자고 나서 학교에 가거나 직장에 가서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주말에 하는 프리미어리그 경기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11시30분에 시작한 축구 경기를 분명히 보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하프타임이고 잠시 꾸벅하다가 깨 보면 후반전 30분이다. 아~ 정말 예전 같지 않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혹 보신다면 역정을 내시며 나무라실 수도 있지만 요즘 들어 내 몸의 퇴화과정을 인정하고 있다. 2년 전쯤 만성피로를 겪은 적이 있었다. 잠을 자도 피곤하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고, 하루 종일 무기력할 때도 있었고 좀처럼 즐겁거나 흥분되는 일도 없었다. 처음에는 건강상의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다행이 그건 아니었다. 하루, 이틀, 한 달 그렇게 무기력하고 피곤한 나날을 지내다 시간이 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런 증상들이 사라졌다. 이전보다 더 바쁘게 산 것도, 다른 큰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특별한 일이나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 책 「제3의 성공」을 읽으며 그 때를 다시금 돌이켜 보다가 2년 전 그 무더웠던 여름 저녁이 생각났다. 딱 하나 기억나는 것은 달리기였다. 30대 이후 급격하게 불어난 뱃살과 옆구리 살을 빼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너무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여름 티셔츠가 있어서 입으려 했는데, 툭툭 삐져나온 살 때문에 급격히 다운된 후 살을 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이어폰을 귀에 끼고 달렸는데, 한 여름 밤에도 열대야가 지속되는 그 해 여름에는 이어폰이 땀에 절어 고장이 나기도 했다. 여름 내내 달렸다. 아무리 더워도 긴팔 상의를 입고 달렸다. 한참 땀을 흘리고 달리고 나면 개운하고 상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 달리는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건설적이거나 내 삶을 돌아보거나 앞으로의 희망을 꿈꾸는 그런 생각만 한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쓸데없는 잡념, 뜬구름 잡는 생각, 혹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단순히 복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년 후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그렇게 더웠던 그 여름날의 달리기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만성피로와 무기력을 날려 준 결정타였음을 알게 되었다.

 

책에서 저자 아리아나 허핑턴이 제시하는 것도 그것이다. 그녀는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나는 스미스 칼리지 졸업생들에게 기존의 성공 개념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역설했다. 돈과 권력이 기준인 기존의 성공 개념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p.11)

“웰빙과 지혜와 경이로움 이외에, 성공을 판단하는 제3의 기준을 떠받치는 마지막 기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는 적극적인 마음으로, 감정이입과 측은지심에서 비롯된다.” (p.19)

 

웰빙과 지혜, 경이로움과 베풂이다. <허핑턴포스트>로 일약 가장 주목받는 언론인이자 경영인이 된 그녀가 바라보는 성공의 기준은 이전의 기준들과는 다른 것이다. 사실 네 가지의 기준이 한국어판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왜 <제3의 기준(혹은 길)>이 아니라 <제3의 성공>으로 번역되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녀는 이 책에서 성공의 지름길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metric’이 어떤 이유에서 ‘성공’으로 번역되어 제목으로 붙여졌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허핑턴포스트>가 성공가도를 달리던 어느 순간, 죽음의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현대인들은 앞만 보고 산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앞만 보고 달려가도 살기 힘든 세상인데 한 눈 팔거나 여유 있게 삶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 암 환자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암 진단을 받은 후 비로소 자신의 몸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는 인터뷰가 나온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가능하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다. 아리아나 허핑턴은 그것을 이야기해 주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자신은 죽음의 문턱에 가서야 ‘삶은 다른 방식으로도 존재할 수 있어. 다른 길이나 기준이 있어.’라고 깨달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쓴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솔직히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었다. 2년 전 이유 없이 지속되던 만성피로와 무기력함을 이겨낸 이유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소 불안하고 불투명하며 걱정되는 내 삶의 여정에서 어떻게 하면 다시 한 번, 아니 몇 번이고 닥칠지 모르는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지. 그 방법 하나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명상은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뉴에이지 세대의 한 수단이 아니다. 명상은 이제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 행위, 다시 말하면 한층 생산적이고 적극적으로, 또 스트레스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더욱 건강하게 세상에 동참하는 걸 도와주는 행위로 여겨진다.” (p.66)

“명상을 습관적으로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용한 장소를 선택하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정하라.” (p.143)

 

그녀가 제시하는 <웰빙>은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곳에서 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명상이나 충분한 수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 등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내게는 명상이라는 부분이 가장 크게 와 닿았다. 명상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명상은 조용하고 집중할 수 있는 혼자만의 장소가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내게는 혼자 달리는 1시간에서 1시간30분 정도의 시간이 명상이다. 물론, 차도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와 달리는 도중 마주치거나 추월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고 갑자기 만나는 소나기도 있지만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달리는 동안 나는 내 속으로 들어간다. 내 안으로 집중이 된다.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2년 전의 기억을 내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후련함과 시원함, 상쾌함과 개운함을 말이다. 도, 수양, 이상한 종교단체 등의 명상과 같은 기억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상이라고 하면 별로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별 관심도 없다. 명상이 크게 효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도 별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방법적인 측면이 아니다.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자신만의 명상 즉, 집중할 수 있는 형태의 행위나 상태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는 달리기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 어떤 이들에게는 충분한 수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형태일 수도 있다.

 

이러한 접근은 저자가 책에서 제시하는 나머지 3개의 또 다른 기준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제시하고 있는 제3의 기준은 지혜이다.

 

 

“우리는 더 예뻐야 하고 더 날씬해야 하며, 더 섹시하게 보이고 더 성공해야 하며,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훌륭한 엄마와 아내가 되어야 한다는 압력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p.195)

 

우리나라처럼 이것이 큰 사회적 기준이 되고 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입사시험 면접관들은 지원자의 외모를 보고 5초 안에 판단한다고 한다. 그(그녀)가 아무리 면접 시 명쾌한 답변을 하고 제시하는 기준에 충족된다 하더라도 애초에 지원자의 외모를 보고 판단한 그 짧은 순간의 기준이 바뀌는 확률은 대단히 작다고 한다. 뭐 외모 지상주의라는 말은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도드라진다. 드라마들을 보면 집 안에서도 풀 메이크업에 풀 헤어로 세팅한 여배우들이 잠옷을 입고 잠에 들거나 일어난다. 자고 일어나면 당연히 부스스 해야 하는데, 너무들 예쁘다. 아이돌이라고 나오는 아이들은 남자아이들이나 여자아이들이나 너무들 날씬하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 아이들의 경악할 만한 식단을 알고 나면 ‘불쌍하다~’라고 생각하다가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또 다시 다이어트를 다짐한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와 기준은 끊임없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되어야 하고, 일 잘하는 직장인이 되어야 하고, 훌륭한 아내·남편·부모·친구가 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이들과의 비교의식에서 오는 열패감을 감당하지 못하면 힘들어진다.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우월감이 아닌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돌아볼 수 있는 자신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명상이 될 수 있다. 나는 물론 달리는 시간이다.

 

아리아나 허핑턴이 제시하는 나머지 두 가지 기준은 경이와 베풂이다. 우리의 삶을 좀 더 윤택하게 하고 보람 있게 하며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게끔 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개인적으로는 ‘경이’에 주목한다. 나는 기독교 신앙인이다. 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교회의 모습에서 실망하거나 좌절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가진 신앙을 내동댕이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또 그럴 때마다 내 신앙을 다시금 일깨우고 다지게 되는 ‘경이’의 순간들이 꼭 있었다. 너무나 개인적인 경험이라 밝힐 수는 없지만 아주 사소한 사건에서부터 우연히 마주한 상황, 의도치 않게 읽게 된 문장 하나,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다. 나는 유신론자다. 당연히 무신론자도 존중한다. 그들의 무신론도 하나의 믿음이자 신앙이다.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내게는 신이 없다고 믿는 믿음이 더 크다. 신이 있다고 믿는 믿음과 신앙이 내게는 더 자연스럽다. 종종 마주하는 ‘경이’의 순간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몸이 너무 피곤하고 하루하루 사는 것에 허덕이다 보면 찾을 수 없다. 물리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시간이 많은 사람이라도 제3의 기준이나 길 따위에 관심이 없으면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일상에서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가장 아끼고 좋아 하는 여름 티셔츠를 멋있게 입지 못할 것 같아 시작했던 2년 전의 달리기가 나에게 ‘제3의 기준 혹은 길’이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렵거나 특별한 노력이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단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그 문서에서 손을 떼고, 스마트폰에서 손을 떼고, 그 사람들과의 대화를 중단하고 생각부터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여전히 손에는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고 손가락들은 키보드위에서 춤추고 있으며, 퇴근시간은 도무지 다가오지 않고 그저 퇴근 후 술자리만 기다리고 있다면 ‘제3’은커녕 그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도 설 자리를 찾아라. 지혜와 마음의 평화와 장점을 발휘 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라.”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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