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행복 플러스 - 행복 지수를 높이는 시크릿
댄 해리스 지음, 정경호 옮김 / 이지북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지금 내 삶의 행복 지수에서 10%가 플러스 된다면 나는 행복할까? 장담할 수 없다. 지난 해 연말부터 시작된 골치 아픈 일은 도통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하나가 터지고 힘들게 봉합해 놓은 또 다른 하나가 불쑥 터져 버리는 통에 괴로운 연초다. 세상 일, 다른 사람 일 같은 것들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 그나마 지금처럼 근근이 버티고 있는 힘은 오로지 주변 사람들 덕이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빠진 나를 향해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고 자기 일인 것처럼 발 벗고 나서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보고 생각했다. ‘정말 사람밖에 없다’라고. 기왕 자극적인 제목을 찾을 바에야 10%정도가 아니라 50%정도 플러스로 뻥튀기를 했으면 기분이라도 좋았을 테지만, 그건 거짓말이니까 어차피 없을 일이다.

이 책의 저자도 온갖 어려움과 고통, 고민과 갈등, 불안과 좌절 속에 있었다.

 

 

 

“‘항암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직후,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면서 틱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p.17)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노이로제, 그리고 약물에 의존하려는 마음과 싸워가면서도 종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p.75)

 

 

그 어느 분야보다 경쟁이 치열하고 살아남기 위한 분투로 넘치는 TV방송, 그 중에서도 보도 분야에 몸담고 있는 저자는 늘 그런 것들과 싸웠다. 열심히 한 덕분에 지역 방송국에서 전국 방송국까지 스카우트 되고 주말 간판 프로그램 공동 진행자로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부러운 일이다. 매주 주말 TV를 틀면 나오는 사람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거의 동일할 것이다. ‘우와~ 저 사람 성공한 사람이네~ 잘 나가는 사람이네~’ 그런데 저자는 그렇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성공의 모델이 되었고, 그에 따른 부와 명예가 뒤따랐지만 내면적으로는 계속해서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 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을 ‘내 머릿속 목소리는 개망나니’로 할까 한동안 망설였다.” (p.7)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내 머릿속 목소리는 개망나니’로 할까 망설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해결할 수 없고 떨쳐낼 수 없는 불안과 고민, 좌절과 갈등은 단지 마음속에서만 머문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반응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도 방송 중에! 생방송 중에 TV간판 리포터의 ‘틱 반응’을 본다는 것은 방송 사고다. 말끔하게 차려 입고 화장하고 머리를 만진 방송인이 갑자기 생방송 중에 틱을 한다?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이다.

저자는 자수성가 한 사람이다. 자수성가라는 단어가 보통 스스로 장사를 해 성공한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저자에게도 적용된다. 지역 방송국에 입사해 좋은 특종 보도를 터뜨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전국 방송국에 입사한 후에도 특종 보도는 물론 분쟁 지역 곳곳에도 파견되는 성공을 누리기도 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 자수성가한 사람들 대다수는 자존심이 세고 자기 의지가 강하다. 무언가에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아서 성공한 삶의 궤적이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하다. 저자는 종교에도 의지하지 않았다. 종교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니라고 장담했다. 그런데 그의 표현처럼 ‘머릿속 개망나니 목소리’가 도저히 신체적·정신적으로 통제할 수 없을 때, 그는 약물에 의존한다. 약물에 취해 무아지경에 빠지면 잠시나마 잊을 수 있으니까.

 

 

“메타 수련을 시작하고 몇 개월이 지난 뒤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영적인 눈을 뜬 것도 아니고 성격이 완전히 바뀐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게 된 것뿐이었다.”

“직장에서는 특히 뒷담화 자리에 끼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p.309)

 

저자는 명상을 소개 받는다. 책에 등장하는 여러 명상 전문가들 (조 비테일, 디팩 초프라, 에크하르트 톨레, 마크 엡스타인, 조지프 골드스타인)의 책과 조언에 따라 명상을 배우기 위해 노력한다. 조 비테일부터 톨레까지는 이상한 명상 전문가들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거리를 두고 마크 엡스타인과 조지프 골드스타인을 만난 이후에야 비로소 명상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며칠 동안 자신의 일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 들어가 오직 명상과 수련만을 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이 책의 장점을 발견했다.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 “나는 명상에 관한 일반의 오해를 불식하고 나아가 명상 수련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면이 책의 여러 곳에서 보인다. 단지 “명상은 정말 좋습니다. 명상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명상을 통해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손쉽게 명상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위의 거짓말은 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수련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매번 자세를 잡고 눈을 감는 즉시, 여기저기가 근질거렸다.” (p.175)

“자꾸 ‘비교하는 마음’이 든다. 저들은 모범생, 나는 낙제생.” (p.212)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하루만 뒤쳐져도 경쟁자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지도 모르는 그 소중한 일상을 뒤로 한 채 떠난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들어간 명상센터에서 그는 줄곧 명상센터 입소 이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개망나니 생각’을 지워버리지 못한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사소한 좌절에 크게 절망하고 자신을 향한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솔직하다고 생각되었다. 며칠 만에 몇 십 년 동안 자신을 지배하던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개망나니 생각’을 비워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책이 많다. 이 책은 그런 거짓말은 최소한 하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점이다.

 

 

“그처럼 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삶의 행로를 바꿔놓는 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내 경우에는 어느 바닷가 펜션의 마룻바닥에 앉아 있을 때 찾아왔다.” (p.173)

 

 

이 부분에 대해서는 책을 읽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점이 다를 것이다. 나는 저자와 비슷한 영적인 체험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판단이기 때문에 타인을 설득할 수 없다.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는 영역이라 그렇다. 만약 나와 이 책의 저자처럼 뭔가 인생에서 극적인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이라면 ‘아! 그런 거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혹은 그런 영적인 영역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다. 뭐, 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저자와 같은 영적인 체험을 한 터라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트라인>과 <굿모닝 아메리카> 둘 중 어느 것도 차지하지 못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시 머릿속 목소리가 준동하기 시작했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자꾸만 연상되어서 마음이 부대끼기 시작한 것이다.” (p.186)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저자는 명상센터의 수련을 통해 어떤 극적인 체험을 했고 명상의 깊은 세계로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뭔가 대단한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주변의 변화를 일으켰다고 했다면 ‘에이~ 과장하고 있네~’생각했을 것이다. 이 책은 끝까지 솔직한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일상으로 돌아온 이후 여전히 그 이전의 고민과 ‘개망나니 생각’과 싸우는 저자의 솔직한 고백이 마음에 와 닿았다. 물론, 이전 같으면 사무실 집기를 집어 던지거나 바로 상사를 찾아가 따지고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명상을 하기 위해 자리를 잡는 다는 것이다. 어렵게 자리를 잡은 명상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도 많지만 자신을 다스리고 컨트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당신은 절대로 그런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다.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에고가 만든 허상일 뿐이다.” (p.114)

“최소한 10%는 더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p.386)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하는 ‘개망나니 생각들’은 정말 저자의 말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 천지다.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 대해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다. 다만 그 허상이 실제적이고 당장 내게 불어 닥칠 쓰나미로 느껴지기 때문에 골치 아픈 것이다. 하지만 정말 해결할 방법은 없다.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것은 이미 ‘개망나니 생각’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은 없다. 또 다시 ‘개망나니 생각’에 사로잡혀 잠 못 자고 스트레스 받을 내가 뻔 하니까.

저자는 무조건 명상을 해야 10% 행복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마다 자신만의 명상거리가 있을 것이다. 기도가 될 수도 있고 취미 생활이 될 수도 있고 등등. 어느 순간 ‘아~ 내가 별 거 아닌 일에 이렇게 목을 매고 있었구나~’깨닫는 순간이 있다. 분명 있다. 그럴 때 툴툴 털어버리는 경험이 필요하다. 물론, 내일이 되면 또 다시 털어버린 그것을 주워 들고 목을 매고 있을 것도 뻔하지만 그 이후에 또 다시 툴툴 털어버리면 그만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최소한 10% 더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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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 개정판 한창훈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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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회 많이 먹어봤겠네?”

 

 

대학 신입생 때, 선배들과 동기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동해안 도시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들은 내가 당장 바다에 뛰어 들어가면 물고기 몇 마리 쯤 작살로 잡아 올리고, 한참 잠수해 들어가 어른 머리통만 한 문어 한 마리 입에 물고 나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당연히 어릴 때부터 김치보다 더 흔하게 밥상 위에 생선회를 먹어봤을 거라 생각했다.

모두 아니다.

나는 해안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부모님이 바다라고는 인접해 있지 않은 충청북도가 고향이시고, 충청북도에서도 가장 북쪽 시골 출신이시라 내 도시락에는 고들빼기를 비롯한 각종 충청북도 반찬이 들어있었다. 부모님이 회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나와 동생도 당연히 회를 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한치회정도. 오징어회보다 더 얇고 비린내가 덜 나는 한치회를 한 사발 가져다 놓고 먹는 것이 우리 식구 회 한 상의 전부였다. 해안 도시에 사는 친구들이 회를 쌈장이나 간장에 찍어 먹는 것을 본 것도 한참 후의 일이다. 나는 전형적으로 회를 못 먹는 사람들이 찍어 먹는다는 초고추장이 제일이었다. 회 한 접보다 더 많은 양의 초고추장을 찍어 먹는 나를 보고 어떤 다른 해안 도시가 고향인 친구는 초장을 먹는 지 회를 먹는지 모르겠다며 타박을 하기도 했다.

나는 수영도 못한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문을 나서 도로를 하나 건너면 유명한 해수욕장이 있었다. 학교를 파하고 그 백사장에서 축구도 하고 오징어 달구지 놀이도 하고 조개도 잡고 한참을 땀을 흘리고 놀고 나면, 친구들은 모두 바다로 뛰어 들었다. 개헤엄인지 자유형인지 모를 헤엄을 치며 바다 저 편까지 갔다가 오는 친구들을 나는 물끄러미 지켜봤다. 수영을 배워본 적도 아버지와 바다에 나와 함께 수영을 한 적도 없는 나는 ‘다음에는 꼭 주브(그때는 튜브를 주브로 불렀다)를 가져와야지’ 생각할 뿐이었다.

종종 아버지를 따라 낚시를 가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참을성이 없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구르던 것을 좋아하던 내게 낚시는 최악이었다. 언제 잡힐지도 모를 고기를 기다리며 긴 낚싯대를 바라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나는 바다에서 나고 바다에서 자랐지만 바다사람은 아니었다.

 

한창훈은 완전히 바다사람이다.

바다 중에서도 섬에서 나고 자라 뭍으로 나왔다가 다시 섬에 들어가 생계형 낚시를 하고 있는 완전한 바다사람이다.

이 책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는 완전한 바다사람의 일기다.

한창훈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작품은 「홍합」이었다. ‘홍합’이라는 단어가 주는 친숙하고도 에로틱하며 감칠맛 나는 이미지가 한창훈의 글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긴 겨울밤 작정하고 들른 포장마차에서 기똥찬 홍합탕 국물을 들이키는 것 같았다. 「홍합」을 읽고 한창훈의 팬이 되었다. 그의 다른 소설을 몇 편 읽고 얼마 전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를 읽었다. 한 번 좋아하기가 어려운 나는, 일단 한 번 좋아하면 끝까지 좋아하는 편이다. 연이은 작품들도 좋았다.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는 처음 읽었던 「홍합」다음으로 좋았다.

비록 한창훈 작가처럼 완전한 바다사람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바다냄새를 맡고 바다 일출을 보고 자랐던 내게 이 책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지금도 감성돔 철이기는 한데 이놈들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면 낚싯배 타고 섬 뒤편 벼랑 포인트까지 가야 합니다. 종일 낑낑거려봐야 얼굴이나 한번 볼까 말까입니다.” (p.277)

 

무슨 운명인지, 군 생활의 절반도 바다에서 했다. 밤바다를 지키는 일이 주된 임무였는데, 고되고 지루했다. 모두가 고되고 지루하다 보니 재미있는 걸 스스로 찾았다. 독립부대이다 보니 부대장인 내 재량껏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감성돔이다. 해당 지역 상근현역들이 있었다. 말 그대로 그 바다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다. 저녁쯤 출근해서 근무서고 아침에 퇴근하는 친구들이었다. 휴일이나 쉬는 날 놀러와서 바다에 들어가기도 했다. 군사지역과 민간지역의 경계가 모호한 어디쯤 그들만이 아는 포인트가 있었다. “소초장님 전복이랑 감성돔 좀 드셔야죠~!” 하면서 바다 속에 한참 들어가 있다 나왔다를 반복하더니, 양손에 주먹만 한 전복 몇 개와 손바닥을 편 것 보다 더 큰 시커먼 물고기 몇 마리를 잡아 왔다. 전복보다 물고기에 눈이 갔다. 감성돔이란다. 근무하고 있던 소초의 책임구역 내 감성돔 포인트가 있어서 우리가 하는 주된 임무가 특정 시기에는 낚시꾼들 쫓는 일이 되기도 했다. 밤에는 간첩이 넘어오지 않나 살펴야 하고 낮에는 낚시꾼들이 넘어오지 않나 살펴야 했다. 인접 국도에서 산을 하나 넘어 들어와야 하는 곳이었음에도 낚시꾼들은 산을 넘어 절벽을 타고 넘어오기도 하고 아예 배를 빌려 먼 바다에서부터 해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대부분의 낚시꾼들이 그곳에 부대에 있는 것도 알고 들어오면 안 되는 것도 알았지만 멀리에서부터 많은 돈을 들여 감성돔 낚겠다고 들어 온 그들의 막무가내는 매번 받아내기 힘들었다. 어떤 낚시꾼들은 유화책을 쓰기도 했다. 소초 정문으로 들어와 라면 박스와 과일 박스를 보이며 사정을 하기도 했다. 내가 말이야~ 예전 이 부대 대대장님 하고 말이야~ 라거나 연대장 하고 우리 동네 형님이 말이야~ 라고 하는 허풍은 귀여울 정도였다.

아무튼, 쉬는 날 굳이 바다로 들어가 전복과 감성돔을 잡아 온 상근 부대원들의 노력이 한 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전복과 감성돔의 맛은 기가 막혔다. 제대로 된 회 맛을 알지 못하는 내가 먹어도 기가 찰 맛이었다. 부대에서 쓰는 성긴 칼도 쓱쓱 갈아 회를 떠 주는 데 초고추장을 듬뿍 찍지 않고 그냥 날 생선회로 먹어도 정말 환상적이었다.

자산어보를 쓴 송암 정약전 선생은 감성돔에 대해 한 줄로 그쳤다고 한다. 한창훈 작가는 그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며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감성돔’편에서 한참 설명한다. 나는 그런 설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역 후 감성돔을 몇 번 먹어도 그때 부대에서 먹었던 그 감성돔 맛이 나지 않는다. 그 맛이 생각날 뿐이었다.

 

 

 

“비린내는 산소를 만나 생기는 산화작용, 즉 산패 때문에 생긴다. 중국산이나 트롤선이나 그물로 잡아 냉동해온 것이 그렇다.” (p.16)

“활어회는 의심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주인을 믿을 수가 없어, 살아 있는 놈을 눈앞에서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하지만 회는 여덟 시간 정도 지난 것이 가장 맛 좋다. 죽음의 시간이 주는 맛이다.” (p.143)

“삼치회는 내륙 횟집에서는 못 먹는다. 선어 보관이 용이치 않기 때문이다. 막 잡은 삼치를 얼음에 채워놔도 이틀이 한계이다. 회뜨기도 쉽지 않다.” (p.33)

 

 

생선에서 나는 비린내와 활어회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편견, 삼치회에 대한 상식까지 책에는 내가 모르던 이야기가 많다. 완전한 바다사람은 아니지만 바다가 고향인 내가 보기에도 낯선 것이 많았다. 책에서도 작가는 여러 번 ‘아는 만큼 먹는다.’라는 표현을 하는 데, 맞는 말이다.

 

 

“섬에서 자란 탓에 나는 낚시를 일곱 살 때 배웠다. 낚시 장비라 해봤자 두 뼘 막대기에 봉돌과 바늘 하나 묶은 거였지만 말이다. 오죽잖은 그 채비 가지고 바닷가 쏘다니다가 여수로 전학을 한 게 열 살 때였다.” (p.255)

 

섬에서 자라 일곱 살 때부터 낚시를 한 작가에게 바다, 섬은 아직도 모르는 존재라고 한다. ‘바다는 말이야 이런 거야, 섬은 말이야 저런 거야.’라고 말하는 어쭙잖은 정의보다 멋있다. 내가 작가 한창훈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경험이다. 공장과 공사판, 농장과 배로 순간이동 하듯이 짧게 소개되는 그의 이력을 자세히 살펴보면 치열하다. 한 줄짜리 문장으로 옮길 수 없는 삶의 태도다. 물론, 작가라고 해서 무조건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고 작가가 아닌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경험을 찾아서 도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컴퓨터 앞에 앉아서 대단한 작품을 쓰는 작가들도 분명 있을 테고,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니까. 다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한창훈이고 그의 삶의 이력이 그렇게 양각과 음각이 빼곡히 들어박힌 판화 같아서 그것에서 의미를 건져 올리고 싶은 것일 테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니까 미사여구를 동원하고 미화하고 싶은 것도 물론 아니다. 작가는 그의 작품에서 지금의 생활에 대한 만족감을 매번 드러낸다. 섬으로 돌아와 생계형 낚시를 하는 지금도 밤하늘과 밤바다를 보며 문장을 생각하고 사진을 찍는다. ‘아~ 저렇게 살면 좋겠다’ 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평온하다. 어설프게 따라했다가 어떤 위험이 따르게 될지는 짐작하는 바다. 한창훈의 작품으로 만족하련다.

 

 

그냥,

돌아간 곳에 섬이 있었고 그곳에 섬의 사람들과 이야기가 있었다. 섬에서 나는 밥상위의 자산어보도 있었다.

작가도 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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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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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밥 못 먹는 애들이 있어? 없잖아~”

 

 

며칠 전 장모님이 저녁상에서 하신 말이다. 남쪽 어디에서는 무상급식을 하지 않는다고 하고 무상보육 정책도 없어질 것 같은 상황을 두고 가벼운 대화가 오가던 중이었다. 아직도 밥 못 먹는 애들이 있어? 없잖아~ 라는 말에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너무 큰 장벽을 느꼈다. 무상급식이 이제는 보편타당한 가치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힘든 시절을 보내셨음에도 여전히 박정희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윗세대를 나는 설득하지 못한다. 전쟁과 기아, 가난과 배고픔을 경험하지 못한 이후의 세대들은 그것들은 오롯이 경험한 세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20대 중반 이후, 한국의 현대사와 그것이 가져 온 현실 사회의 병리를 나름대로 터득하고 이해한 나는 줄곧 부모님을 포함한 윗세대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부모님은 딱 한번, 설득 당하신 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투표를 해주셨다(?) 다른 이들은 결코 설득할 수 없다. 실제로 그 시대와 그 현실을 살아보지 못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겪는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30줄이 넘어선 지금 내가 내린 결론이다.

국가와 지역이라는 거대 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내 가족과 내 동네 주변에서 겪었던 갑작스런 외부자극의 충격과 무너지는 공동체성의 허무함은 일반적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몇 년 만에 찾은 고향의 동네와 골목, 거리와 도로는 너무 낯설었다. 어린 시절 뛰어 놀던 놀이터와 야산에는 빼곡하게 고층아파트가 자리를 잡았고, 전화 통화 없이도 5분이면 만날 수 있던 동네 친구들과 형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지.

 

 

“오콩코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슬픔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부서지고 산산이 조각나는 부족의 처지를 한탄했고, 우무오피아의 도전적인 남자들이 여자처럼 그렇게 영문을 알 수 없이 유약해져 버린 것을 애도했다.” (p.215)

 

 

오콩코는 우무오피아의 전사다. 우무오피아를 대표하는 사나이고 우무오피아의 자랑이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부족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뒤를 이을 지도 모르는 양아들은 도끼로 내려찍을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우무오피아의 지구 반대편에서 이 책을 읽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것이 그들의 원칙이고 그들의 문화와 부족 공동체를 지키는 길이었다. 오콩코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강인해야 한다는 강박을 벗을 수 없는 남자였고 가장이었다. 자신의 뒤를 이을 강인한 아들이 없는 것을 애석해 하고, 오히려 자신을 쏙 빼닮은 딸아이를 보며 내내 안타까워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가족,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험난한 길도 기꺼이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북소리와 춤이 다시 시작되어 그 열기가 절정에 달했다... 그런데 오콩코의 총이 발사되어 총알 하나가 아이의 심장을 관통한 것이었다.” (p.147)

 

 

그런 그가 실수를 한다. 축제 중 발사된 자신의 총에 한 아이가 죽는다. 그래서 7년 동안 유배를 떠난다. 미필적 고의라 하더라도 사람을 죽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관습대로 7년 동안 부족에서 내쫓게 된다. 우리들의 상식에서야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들에게는 부족이 전부였다. 전부에서 이탈된다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외삼촌이 있는 부족에서 7년을 지낸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자신이 모든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듣게 된다.

 

 

이 백묵만큼이나 하얗다는 백인들의 이야기 같군요.”

“그런데 사람들 얘기가 그 백인들은 발가락이 없다던데요.” (p.91)

“지난 파종기에 한 백인 남자가 그들 부족에 나타났지요.”

“문둥이 말인가?”

“문둥이가 아니었네. 전혀 다르다네.” (p.163∼164)

 

우무오피아의 남자들도 백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들어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새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조금씩 우무오피아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누구는 백묵처럼 하얗다고 하고, 누구는 발가락이 없다고 하고, 누구는 문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은 발가락도 있고 문둥이도 아니며 별 거 아닌 것처럼 치부할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백인들은 교회와 함께 정부도 가지고 왔다. 이들은 재판소를 세워 지역의 치안판사가 주민들이 그런 법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건들에 대해 판결을 내리게 했다.” (p.205)

 

백인들은 우무오피아와 오콩코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밤에 잠이 들 때까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정령이 깃들어 있고 그들 조상의 혼령이 함께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백인이 말하는 유일한 신은 그저 많은 신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들이 가져 온 정부와 재판소도 무엇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부족의 어른들과 장로들이 모여 판결을 하고 앞일을 점치고, 부족의 길흉과 화복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그저 부족의 땅에서 조금 떨어진 ‘버려진 땅’에 교회를 짓게 하면 버려진 땅의 정령들이 그들을 방해하거나 죽게 할 거라 믿었다. 비웃었다. 그런데 그 백인들은 살아남았다. 교회를 짓고 학교를 세워 부족의 아이들을 데려갔다. 옷을 입히고 교육을 시켰다.

 

 

 

“내 딸 아케우니는 쌍둥이를 몇이나 낳고 버렸는지 물어보게나. 여자들이 죽으면서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적 있는가?” (p.160)

“우무오피아의 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은 오콩코와 달리 새로운 체제에 대해 강한 반감을 느끼지 않았다... 많은 돈이 우무오피아로 흘러들었다.” (p.209)

 

우무오피아가 지켜 온 전통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그들도 모른다. 그들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해온 것을 따라 배웠다. 그것이 자신의 가족과 부족을 지키는 길이라 믿었다. 쌍둥이를 낳으면 죽이는 전통, ‘오수’라는 일종의 불가촉천민 집단을 설정해 이들을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방치하면서 일방적 차별을 하는 전통들은 부족 내 갈등과 상처의 씨앗이 되었다. 이 씨앗을 발아하게 만든 것이 백인들과 그들이 가져 온 교회와 문화다. 부족의 약자들, 여자와 아이들, 오수는 백인들의 교회로 흘러들어 갔다. 이들에게 백인과 교회와 그들이 가져 온 문화와 교육은 오콩코가 느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오히려 산산이 부서진 것들이 제대로 기능하고 살아볼 만한 세상이 찾아온 것이었을 테다. 쌍둥이를 죽이고 같은 사람임에도 차별하는 이상하고 폭력적인 전통보다는 최소한 나은 것이었으니까.

 

 

 

“그의 삶은 하나의 큰 열정, 즉 부족의 촌장이 되는 것에 사로잡혀 왔었다. 그것이 그의 삶의 용수철이었다. 그때 모든 것이 부서져 버렸다.” (p.155)

 

 

오콩코는 7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우무오피아로 돌아온다. 돌아온 자신의 부족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콩코의 눈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상태였다. 남자들은 힘을 잃어 버렸고 여성들과 아이들, 자신의 장남 은워예조차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단순히 7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잠시 잃은 것이 아니라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것이다. 더 이상 부족 사람들은 오콩코를 우러러보지 않았다. 오콩코가 우무오피아를 책임지고 이끌 촌장이라며 추켜세우지도 않았다. 오콩코는 복수를 결심하지만 죽는다.

 

 

“이것 외에도 포함할 것이 너무나 많아. 자세한 사항은 과감히 잘라 내야 할 것이다. 그는 많은 생각 끝에 이미 책의 제목을 정해 놓았다.”

“니제르 강 하류 원시 종족의 평정.” (p.244)

 

오콩코에게는 전부였던 우무오피아가 백인의 눈에는 그저 그런 원시 종족 중 하나에 불과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넓기만 한 황무지 같은 땅에 사는 원시 종족 중 하나. 자신의 발이 닿는 곳이면 자신의 발아래 둘 수 있다는 강력하고 폭압적인 자부심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발상. 그렇게 우무오피아와 다른 그렇게 그런 수많은 원시 종족은 하나하나 백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저 그런 자신의 책을 내는 데 몇 페이지 정도 할애할 수준의 그것에 불과했다.

 

이 책의 저자 치누아 아체베가 겪고 본 조국 나이지리아의 현실, 우무오피아와 오콩코가 겪은 현실은 우리가 쉽게 단정 지어 생각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박정희 향수로부터 생긴 눈곱을 벗겨 드리기 위해 필사의 노력으로 아무리 장모님과 그 세대를 설득하려 해봤자 헛일이다. 그것은 눈곱이 아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 그 자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우무오피아의 낡은 전통과 비인간적인 관습을 지금 시점에서 비판하고 당연히 무너뜨려야 할 악습 정도로 폄하하는 것도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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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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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의 글은 불편하다. 불편한 글을 좋아하는 내게도 그의 글은 충분히 불편하다. 이 무슨 형용모순인가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지만 불편하다. 충분히 현실을 현실 그대로 봉주는 이상으로 꼬고 비틀어 내는 것 같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훈의 글이 주는 불편함과는 좀 다르지만 충분히 불편하다. 그렇다고 내가 가학적인 글을 읽으며 혼자 만족하고 키득대며 구석에 처박혀 짜릿함을 만끽하는 그런 변태적 독자는 물론 아니다. 충분히 밝고 충분히 따뜻하고 충분히 읽을 만한 소설을 널렸다. 그런 소설은 굳이 읽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감(?)으로 분별해 낸다. 몇 개월 전 읽었던 「중앙역」이라는 장편의 김혜진의 글도 불편했다. 천명관, 김훈과는 또 다른 불편함이었다. 따옴표 하나 없는 작가 김혜진의 글은 그대로 서사의 힘이 엄청났다. 천명관의 이전 작「고래」를 읽으며 받았던 불편함과 비슷하기도 했다.

이 책은 천명관의 단편을 엮은 책이다. 나는 정치·사회 서적을 가장 많이 읽는다. 그 다음 많이 읽는 장르가 소설이다. 그래봐야 내가 좋아하는 몇몇 작가의 책을 골라 읽는 것이 전부이기는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정치·사회 서적을 읽으며 받았던 스트레스와 피곤함을 풀기도 하고 정치·사회 서적을 다시 읽으며 소설을 읽은 후 구체적인 사회를 재조명한다. 그 순환과정이 내게는 퍽 신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전혀 알아주지 않는 작업이지만 그 신나는 순환과정이 내 독서생활의 골자다. 그래서 이 선순환과정을 조금이라도 비트는 허무맹랑하고 멜랑콜리한 소설을 실수로 읽는다면 다음 정치·사회 서적을 읽는 순서까지 비틀어지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찾아 읽는 이유다. 단편소설은 맥락이 끊기고 글을 읽는 호흡이 일정치 않아 좋아하지 않는데, 천명관의 단편을 엮은 이 책은 맥락의 흐림이 일정하다. 다른 독자들에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불편함’. 이 한 단어로 정리된다.

 

 

 

 

“그, 그러니까 그 애들이 보건소에 다니는 게 이, 임신을 해서가 아니라는 거예요?”

“임신은 무슨! 사교병에 걸려서 같이 주사 맞으러 다니는 거야. 여기 와서 약도 지어갔다니까.” (p.50)

 

 

<동백꽃>의 유자는 구회장의 아들 동엽의 아기를 가지고 싶었다. 다른 젊은 처녀들처럼 뭍에 있는 도시로 나가 공장에서 일하거나 가정부로 일해 봤자 팔자를 펴기는커녕, 명절이 되어 겨우 전자제품 하나 사들고 섬으로 돌아오는 것에 불과했다. 섬의 최고 ‘갑’ 구회장의 아들, 동엽에게 순정을 주고 순결도 주면 뭍으로 나간 치들보다 더 쉽고 간편하게, 그리고 알짜배기 사모님으로 살아가라 수 있었다.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유자의 단짝 친구 경숙이가 자신의 연정, 동엽오빠를 가로채 그의 아기를 가졌다는 유언비어를 접한 후 모든 것을 포기할 뻔 하지만 임신이 아니라 성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는다. 자신의 순정과 순결을 모두 가진 채 섬에서 떨어져 나가는 동엽을 붙잡으려 마지막 발악을 한다.

 

 

 

“여기 오빠 애가 자라고 있다고! 진짜야!”

“쯧쯧쯧, 저년도 사교병에 걸린 모양이로군, 그럼 빨리 보건소에 나 가볼 것이지 여긴 뭐 하러 쫓아온 게야?” (p.56)

 

 

결말이 이렇다. 동엽이 그저 답답한 섬생활을 조금이나마 견디기 위한 농락의 수단으로 삼았던 유자와 경숙의 마음과 몸은 그대로 섬에 남는다. 떠나는 배를 뒤로 한 채 부두에 메아리 쳐 돈다. 최소한 유자 자신은 사교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동엽이 자신의 몸을 찾을 거라는 헛된 희망은 부두를 떠나는 배가 만들어 내는 파도에 묻혀 버렸다.

알~싸하다.

 

 

 

“언 칠면조가 슬슬 녹으면서 비어져 나온 살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경구는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칠면조를 만져보았다. 차갑지만 두툼한 살집이 먹음직스러웠다. 혹시 마누라를 만난다면 선물이라며 칠면조를 불쑥 내밀어도 재밌을 것 같았다.” (p.130)

 

 

경구, 그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꼬이고 비틀어 졌다. 트럭을 운전하던 때가 그의 가장 찬란하던 시절이었다고 하던가.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오히려 자유를 맛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던 언 칠면조가 녹기 시작했다. 얼어 있어서 죽어었던 칠면조의 두툼한 살집을 보며 찌그러진 육체노동자 속에 죽어있던 찬란한 과거를 부활시킨다.

 

 

 

“지랄하고 있네. 낫살 처먹으면 나잇값을 하든가. 외상술이나 처먹고 다니는 주제에 뭔 나이 타령이야, 이 씨발 놈아.” (p.125)

 

 

낫살이나 처먹고 나잇값을 못하던 자신이다. 단지 몇 십만 원 외상 술값이 없다고 나이도 훨씬 어려보이는 놈에게 욕지거리를 들어야 한다. 마누라는 도망가고 애새끼들은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새파란 육체노동자들이 찌그러진 자신의 육체를 대체해 간다. 기껏해야 몇 푼에 지나지 않는 돼지내장을 구워 찌그러진 육체에 비릿한 소주를 밀어 넣는다. 한 번 기분 내려다 외상 술값을 기록하고, 채근하는 술집 사장 놈을 칠면조로 때려죽인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디디면 바로 나락이다. 씨발.” (p.112)

 

 

씨발. 한 발짝만 잘못 내디뎌도 나락인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와버렸다.

꿈틀대는 찬란한 육체를 가진 칠면조를 마누라에게 보여주려 훔친 트럭을 몰고 달린다.

무저갱 속으로.

 

 

 

 

“불길은 어느새 바람을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않은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지옥도를 지켜보았다. 어, 잘 탄다.” (p.156)

 

 

<전원교향곡>의 정환의 결말도 그랬다. 유자와 경구도 그랬다. 결말은 새드엔딩이다. 그런데 유자에게도, 경구에게도, 정환에게도 새드엔딩이기만 할까? 도무지 직시할 수 없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기가 막힌 현실을 끝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면... 그들에게는 새드가 아니라 해피가 아니었을까? 그토록 자신과 아내를 괴롭혔던 돼지축사를 태워버리며 꿈쩍도 않은 채 산 지옥을 경험하는 정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단말마가 어, 잘 탄다. 라니...

정말 현실이 생지옥이다. 차라리 활활 불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환희를 느낀다. 돼지축사를 태우고 자신의 집과 자신까지 집어 삼킬 듯 솟구쳐 오르는 불길 안에서 자유와 환희를 경험한다.

 

 

 

“오늘은 단 하루만이라도 맨 정신으로 버텨야 한다! 그날은 두 달에 한번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는 날이었다.” (p.135)

“축제는 짧았고 달콤한 축배는 곧 쓰디쓴 독배로 변하고 말았다. 돼지감자 농사를 마치고 파산하자 서리가 내리면 파리가 자취를 감추듯 아무도 은골을 찾아오지 않았다.” (p.146)

 

 

아내도 잃고 아이도 잃었다. 몇 마리로 시작하던 돼지축사는 수 십 아니, 수 백 마리로 늘어났다. 한두 마리로 시작되던 파리의 침입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겨우겨우 참고 참았던 아내는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정환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렇다. 성가시고 아무리 잡아 죽여도 계속해서 주위를 맴도는 파리는 현실이다. 현실에서 익숙하게 경험하는 어려움, 불편함, 현실의 무게다. 아무리 파리채를 휘두르고 파리끈끈이를 갖다 붙여도 도무지 이놈의 파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젠장.

모조리 태워 버리는 수밖에 없다. 축사 곳곳에, 집채만 한 돼지들 몸에 등유를 들이 붓고 꼼꼼하게 태워 버리기 위해 곳곳에 불을 붙여 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도 태워 버리는 수밖에.

여전히 주위를 들끓는 파리 떼와 함께 해서는 안 될 술을 마셨다. 취해 쓰러져 있는 틈에 아이가 축사를 지키던 개에게 물렸다. 복수할 것이 없다. 방법이 없고 힘도 없다. 모조리 태우고 자신도 타버리는 수밖에.

멋지게 축사와 개를 태워버린 후 담배를 문 채 자신의 차를 타고 도망가 버리는 것은 천명관의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던 마지막 수단이던 초라한 스쿠터도 박살나 버렸다.

 

 

유자에게도, 경구에게도, 정환에게도 현실은 생지옥이다. 끝이 없는 무저갱이다.

불편하다. 충분히 불편하다. 현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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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공장 - 소설가 김중혁의 입체적인 공장 산책기
김중혁 글.그림 / 한겨레출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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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차이나!

라고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단지 메이드 인 차이나 라는 이유만으로 구매의욕은 한없이 떨어지고 다시는 눈에 담지 않았으며 옆 사람이 혹시 살라 치면 어이구~ 어떻게 메이드 인 차이나를 살려 그래! 라며 호통을 날리기도 했다. 이제는 점점 옛날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다. 며칠 전 뉴스에 보니 중국의 샤오미가 LG 스마트폰의 시장 점유율을 넘어섰다고 했다. 샤오미라는 브랜드를 처음 들어본 내게, 이 사실은 꽤 흥미로웠다. 워낙 기계에 관심이 없고 스마트폰 같은 것은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의 무시와 괄시, 압력에도 꿋꿋하게 구입하고 있지 않다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쩔 수 없이 구입했을 정도다. 아이폰6을 사기 위해서 밤을 새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아무튼 최근 구입한 스마트폰이 LG제품이다. 그 전에 쓰던 제품보다 훨씬 카메라 화소도 좋고(이것이 내게 가장 중요한 스마트폰 구입 이유) 화면도 크다. 스마트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철지난 기기지만 내게는 최신이다. 전화하고 문자하고 카톡하고 사진 찍고 동영상 찍는 것으로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이 부족한 내게는 최신 중의 최신이다. 그런데 그런 최신 핸드폰을 만들어 낸 LG를 제친 곳이 중국의 샤오미?

샤오미든 LG G시리즈든 공장에서 만들었다. 애플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그들이 열광하는 그 제품들이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내는 그 무시무시한 폭스콘도 공장이다. 폭스콘에서 만들어내는 멋지고 간지나고 뭔가 앞서나가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애플의 제품들도 결국 폭스콘이라는 ‘공장’에서 만들어낸 제품이다.

 

모든 것의, 대부분이 메이드 인 공장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공장에서 일해본 적은 없다. 지하철 공사장과 택배 상하차 등 힘들다고 소문난 몇 가지 일은 단기적으로 해본 적이 있지만 공장에서 일해본 적은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상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제품들이 공장에서 태어나는 것이지만 공장에서 태어난 후 각 가정의 거실과 방 곳곳에 들어올 때는 말끔하게 디자인 된 형태이기 때문에 그것에서 공장을 바로 매치하기는 어렵다. ‘공장’이라고 하면 뭔가 어둡고 지저분하고 춥거나 덥고 시끄럽고 위험한 곳으로 생각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사람의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데, 적어도 내게 ‘공장’은 위에 열거한 곳이다. 나고 자란 곳이 대규모 철강공단이 위치해 있는 해안도시다. 아버지도 철강공단에서 두 번째로 큰 공장에서 30년을 일하시고 정년퇴직 하셨다. 가장 큰 공장은 포스코다. 예전에는 포항제철로 불렸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꼭 포항제철 견학을 갔다. 도무지 뭔가 알 수 없는 시뻘건 것들이 귀를 찢을 듯한 소리를 내며 오가는, 우리 집보다 수백 배는 커 보이는 공장의 거대함과 기괴함이란.

공장은 그만큼 우리의 일상과 먼 거리에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공장을 가까이에서 보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는 기회는 적다. 공장이라는 건물 자체도 이제는 도심 외곽지역이나 시골로 밀려나 있는 터라, 철강공단이 대규모로 입주해 있는 도시에 살지 않는 이상 학교에서 공장에 견학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먼 우리의 일상과 공장과의 거리를 소설가가 좁혀준다. 김중혁의 작품은 재미있다. 그의 전작들이 그랬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닌 에세이다. 견학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출판사의 편집팀과 상의해 방문할 공장을 정한 후 직접 방문해 공장을 둘러보고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작가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가 책을 읽는 묘미다. 귀엽고 센스 넘치는 일러스트는 입 꼬리를 올라가게 만든다.

 

 

 

“편집자가 ‘브래지어 공장 어떠냐?’고 물어봤을 때, 마음속에서 ‘흐음’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흐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p.50)

 

 

브래지어를 만드는 공장이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 말고 브래지어 공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그 공장이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공장에 직접 방문하거나 견학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단지 ‘브래지어’라는 단어 하나로 ‘흐음’하는 감탄사를 흘러나오게 만들었다는 모든 남성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다. 브래지어가 여성이 착용하는 속옷에 불과한데 왜 그러냐? 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남자들은 브래지어에 대한 뭔지 모를 판타지가 있다. 그래서 작가가 부러웠다.

작가, 그 중에서 유명한 작가이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이런 책을 내자는 제의도 들어오고, 일반인이라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브래지어’공장에 갈 수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수백, 수천 개의 브래지어가 쌓여 있는 브래지어 공장을 직접 본다면 그간 가졌던 브래지어에 대한 환상이 단번에 깨질 수도 있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싶기는 하다.

 

 

 

“1그램당 100만 마리 이상의 효모들이 뒤섞이고 끓어오르면서 6개월 동안 간장을 만들어낸다... 간장을 만드는 가장 큰 원리가 시간이라는 점” (p.75)

“핸드백 같은 경우는 평생을 배워가면서 해야 해요. 원단 자체가 생명체예요. 이게 다 남의 가죽이란 말이죠. 가죽이란 게 하나하나 다 달라요.” (p.86)

“공장에서 생산하는 도자기는 두 종류인데, 하나는 ‘파인차이나’이고 또 하나는 ‘본차이나’이다. 두 제품의 생산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본차이나’는 젖소의 뼈를 태워서 생긴 재, 즉 ‘본 애시(Bone Ash)’를 50퍼센트 이상 함유한 제품으로 일반 도자기에 비해 강도가 높고 가벼운 게 특징이다.” (p.143)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요리가 라면일 것이며, (아버지처럼) 요리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요리가 라면일 것이다.” (p.238)

“라면 한 가닥의 길이는 약 65센티미터이고, 라면 한 봉지에는 대략 75가닥의 면발이 들어간다. 라면의 총 면발 길이가 49미터에 달하니”

 

 

간장공장, 가방공장, 도자기공장, 라면공장. 작가가 방문한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생필품이다. 가방도 여성에게는 생필품이지 아마? 일단, 모르는 것이 많았다. 이 책을 읽으며 혼자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정말? 이야~ 이렇게 만들어 지는구나~”였다. 우리는 정말 모르는 것이 많다. 굳이 몰라도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본차이나’가 당연히 ‘중국에서 태어난’ 정도로 이해했었는데, 젖소의 뼈를 태워서... 강도가 높고... 가볍고...

라면 한 가닥의 길이가 65센티미터, 총 면발 길이가 49미터. 생각했던 것보다, 아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수치이지만. 왜 65센티미터와 49미터라는 특정한 수치가 나왔는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라면이라는 것이 적어도 한국에서는 완전체 음식이고, 기업 간 경쟁도 굉장히 치열한데, 책에 소개된 기업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라면만 65와 49라는 특정 수치를 가진 것인지 다른 기업의 제품도 그런 것인지 문득 궁금했다. 아니면 수십 년 동안 누적된 고객의 데이터와 제품에 대한 연구데이터가 쌓여서 나온 지극히 과학적인 통계는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를테면, 라면 한 가닥의 길이가 64센티미터이거나 총 면발의 길이가 48미터라면 포만감이 부족하다든지, 66센티나 50미터라면 포만감이 지나쳐 라면 본연의 맛을 잃어버리고 구매욕까지 떨어뜨린다든지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분명 뭔가 더 노골적인 이유가 있을 텐데...

 

 

 

“ㄱ팀장님의 설명에 따르자면, 지구본이 불티나게 팔리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렇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 리비아 내전이 일어났을 때, 지구본이 팔린다.” (p.107)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공장은 지구본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숙련된 직원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구의 남반구와 북반구를 맞춰 하나의 지구본을 만드는 행위도 뭔가 창조적이라 생각되었는데, 지구본이 가장 잘 팔리는 때가 전쟁이 일어날 때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온 지구가 평화롭고 지구상 어느 구석에서도 아주 작은 내전조차 일어나지 않는다면 지구본을 만드는 공장의 사장님은 슬퍼해야 할지, 그래도 좋아해야 할지... 참... 이상한 세상이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조립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서로를 조립하고 있는 셈이다.” (p.9)

 

 

나와 당신은 공장에서 돌아가는 기계다. 그리고 그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다. 그 제품을 만들기 위해 투입되는 원자재 일 수도 있다. 그렇게 서로가 맞춰지고 섞이고 분해되고 조립되고 떨어져 나가고 뭉뚱그려 지면서 사는 것이 공장이다. 세상이다.

재밌는 공장, 이상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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