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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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의 글은 불편하다. 불편한 글을 좋아하는 내게도 그의 글은 충분히 불편하다. 이 무슨 형용모순인가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지만 불편하다. 충분히 현실을 현실 그대로 봉주는 이상으로 꼬고 비틀어 내는 것 같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훈의 글이 주는 불편함과는 좀 다르지만 충분히 불편하다. 그렇다고 내가 가학적인 글을 읽으며 혼자 만족하고 키득대며 구석에 처박혀 짜릿함을 만끽하는 그런 변태적 독자는 물론 아니다. 충분히 밝고 충분히 따뜻하고 충분히 읽을 만한 소설을 널렸다. 그런 소설은 굳이 읽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감(?)으로 분별해 낸다. 몇 개월 전 읽었던 「중앙역」이라는 장편의 김혜진의 글도 불편했다. 천명관, 김훈과는 또 다른 불편함이었다. 따옴표 하나 없는 작가 김혜진의 글은 그대로 서사의 힘이 엄청났다. 천명관의 이전 작「고래」를 읽으며 받았던 불편함과 비슷하기도 했다.

이 책은 천명관의 단편을 엮은 책이다. 나는 정치·사회 서적을 가장 많이 읽는다. 그 다음 많이 읽는 장르가 소설이다. 그래봐야 내가 좋아하는 몇몇 작가의 책을 골라 읽는 것이 전부이기는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정치·사회 서적을 읽으며 받았던 스트레스와 피곤함을 풀기도 하고 정치·사회 서적을 다시 읽으며 소설을 읽은 후 구체적인 사회를 재조명한다. 그 순환과정이 내게는 퍽 신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전혀 알아주지 않는 작업이지만 그 신나는 순환과정이 내 독서생활의 골자다. 그래서 이 선순환과정을 조금이라도 비트는 허무맹랑하고 멜랑콜리한 소설을 실수로 읽는다면 다음 정치·사회 서적을 읽는 순서까지 비틀어지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찾아 읽는 이유다. 단편소설은 맥락이 끊기고 글을 읽는 호흡이 일정치 않아 좋아하지 않는데, 천명관의 단편을 엮은 이 책은 맥락의 흐림이 일정하다. 다른 독자들에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불편함’. 이 한 단어로 정리된다.

 

 

 

 

“그, 그러니까 그 애들이 보건소에 다니는 게 이, 임신을 해서가 아니라는 거예요?”

“임신은 무슨! 사교병에 걸려서 같이 주사 맞으러 다니는 거야. 여기 와서 약도 지어갔다니까.” (p.50)

 

 

<동백꽃>의 유자는 구회장의 아들 동엽의 아기를 가지고 싶었다. 다른 젊은 처녀들처럼 뭍에 있는 도시로 나가 공장에서 일하거나 가정부로 일해 봤자 팔자를 펴기는커녕, 명절이 되어 겨우 전자제품 하나 사들고 섬으로 돌아오는 것에 불과했다. 섬의 최고 ‘갑’ 구회장의 아들, 동엽에게 순정을 주고 순결도 주면 뭍으로 나간 치들보다 더 쉽고 간편하게, 그리고 알짜배기 사모님으로 살아가라 수 있었다.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유자의 단짝 친구 경숙이가 자신의 연정, 동엽오빠를 가로채 그의 아기를 가졌다는 유언비어를 접한 후 모든 것을 포기할 뻔 하지만 임신이 아니라 성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는다. 자신의 순정과 순결을 모두 가진 채 섬에서 떨어져 나가는 동엽을 붙잡으려 마지막 발악을 한다.

 

 

 

“여기 오빠 애가 자라고 있다고! 진짜야!”

“쯧쯧쯧, 저년도 사교병에 걸린 모양이로군, 그럼 빨리 보건소에 나 가볼 것이지 여긴 뭐 하러 쫓아온 게야?” (p.56)

 

 

결말이 이렇다. 동엽이 그저 답답한 섬생활을 조금이나마 견디기 위한 농락의 수단으로 삼았던 유자와 경숙의 마음과 몸은 그대로 섬에 남는다. 떠나는 배를 뒤로 한 채 부두에 메아리 쳐 돈다. 최소한 유자 자신은 사교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동엽이 자신의 몸을 찾을 거라는 헛된 희망은 부두를 떠나는 배가 만들어 내는 파도에 묻혀 버렸다.

알~싸하다.

 

 

 

“언 칠면조가 슬슬 녹으면서 비어져 나온 살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경구는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칠면조를 만져보았다. 차갑지만 두툼한 살집이 먹음직스러웠다. 혹시 마누라를 만난다면 선물이라며 칠면조를 불쑥 내밀어도 재밌을 것 같았다.” (p.130)

 

 

경구, 그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꼬이고 비틀어 졌다. 트럭을 운전하던 때가 그의 가장 찬란하던 시절이었다고 하던가.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오히려 자유를 맛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던 언 칠면조가 녹기 시작했다. 얼어 있어서 죽어었던 칠면조의 두툼한 살집을 보며 찌그러진 육체노동자 속에 죽어있던 찬란한 과거를 부활시킨다.

 

 

 

“지랄하고 있네. 낫살 처먹으면 나잇값을 하든가. 외상술이나 처먹고 다니는 주제에 뭔 나이 타령이야, 이 씨발 놈아.” (p.125)

 

 

낫살이나 처먹고 나잇값을 못하던 자신이다. 단지 몇 십만 원 외상 술값이 없다고 나이도 훨씬 어려보이는 놈에게 욕지거리를 들어야 한다. 마누라는 도망가고 애새끼들은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새파란 육체노동자들이 찌그러진 자신의 육체를 대체해 간다. 기껏해야 몇 푼에 지나지 않는 돼지내장을 구워 찌그러진 육체에 비릿한 소주를 밀어 넣는다. 한 번 기분 내려다 외상 술값을 기록하고, 채근하는 술집 사장 놈을 칠면조로 때려죽인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디디면 바로 나락이다. 씨발.” (p.112)

 

 

씨발. 한 발짝만 잘못 내디뎌도 나락인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와버렸다.

꿈틀대는 찬란한 육체를 가진 칠면조를 마누라에게 보여주려 훔친 트럭을 몰고 달린다.

무저갱 속으로.

 

 

 

 

“불길은 어느새 바람을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않은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지옥도를 지켜보았다. 어, 잘 탄다.” (p.156)

 

 

<전원교향곡>의 정환의 결말도 그랬다. 유자와 경구도 그랬다. 결말은 새드엔딩이다. 그런데 유자에게도, 경구에게도, 정환에게도 새드엔딩이기만 할까? 도무지 직시할 수 없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기가 막힌 현실을 끝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면... 그들에게는 새드가 아니라 해피가 아니었을까? 그토록 자신과 아내를 괴롭혔던 돼지축사를 태워버리며 꿈쩍도 않은 채 산 지옥을 경험하는 정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단말마가 어, 잘 탄다. 라니...

정말 현실이 생지옥이다. 차라리 활활 불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환희를 느낀다. 돼지축사를 태우고 자신의 집과 자신까지 집어 삼킬 듯 솟구쳐 오르는 불길 안에서 자유와 환희를 경험한다.

 

 

 

“오늘은 단 하루만이라도 맨 정신으로 버텨야 한다! 그날은 두 달에 한번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는 날이었다.” (p.135)

“축제는 짧았고 달콤한 축배는 곧 쓰디쓴 독배로 변하고 말았다. 돼지감자 농사를 마치고 파산하자 서리가 내리면 파리가 자취를 감추듯 아무도 은골을 찾아오지 않았다.” (p.146)

 

 

아내도 잃고 아이도 잃었다. 몇 마리로 시작하던 돼지축사는 수 십 아니, 수 백 마리로 늘어났다. 한두 마리로 시작되던 파리의 침입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겨우겨우 참고 참았던 아내는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정환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렇다. 성가시고 아무리 잡아 죽여도 계속해서 주위를 맴도는 파리는 현실이다. 현실에서 익숙하게 경험하는 어려움, 불편함, 현실의 무게다. 아무리 파리채를 휘두르고 파리끈끈이를 갖다 붙여도 도무지 이놈의 파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젠장.

모조리 태워 버리는 수밖에 없다. 축사 곳곳에, 집채만 한 돼지들 몸에 등유를 들이 붓고 꼼꼼하게 태워 버리기 위해 곳곳에 불을 붙여 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도 태워 버리는 수밖에.

여전히 주위를 들끓는 파리 떼와 함께 해서는 안 될 술을 마셨다. 취해 쓰러져 있는 틈에 아이가 축사를 지키던 개에게 물렸다. 복수할 것이 없다. 방법이 없고 힘도 없다. 모조리 태우고 자신도 타버리는 수밖에.

멋지게 축사와 개를 태워버린 후 담배를 문 채 자신의 차를 타고 도망가 버리는 것은 천명관의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던 마지막 수단이던 초라한 스쿠터도 박살나 버렸다.

 

 

유자에게도, 경구에게도, 정환에게도 현실은 생지옥이다. 끝이 없는 무저갱이다.

불편하다. 충분히 불편하다. 현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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