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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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밥 못 먹는 애들이 있어? 없잖아~”

 

 

며칠 전 장모님이 저녁상에서 하신 말이다. 남쪽 어디에서는 무상급식을 하지 않는다고 하고 무상보육 정책도 없어질 것 같은 상황을 두고 가벼운 대화가 오가던 중이었다. 아직도 밥 못 먹는 애들이 있어? 없잖아~ 라는 말에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너무 큰 장벽을 느꼈다. 무상급식이 이제는 보편타당한 가치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 힘든 시절을 보내셨음에도 여전히 박정희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윗세대를 나는 설득하지 못한다. 전쟁과 기아, 가난과 배고픔을 경험하지 못한 이후의 세대들은 그것들은 오롯이 경험한 세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20대 중반 이후, 한국의 현대사와 그것이 가져 온 현실 사회의 병리를 나름대로 터득하고 이해한 나는 줄곧 부모님을 포함한 윗세대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부모님은 딱 한번, 설득 당하신 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투표를 해주셨다(?) 다른 이들은 결코 설득할 수 없다. 실제로 그 시대와 그 현실을 살아보지 못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겪는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30줄이 넘어선 지금 내가 내린 결론이다.

국가와 지역이라는 거대 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내 가족과 내 동네 주변에서 겪었던 갑작스런 외부자극의 충격과 무너지는 공동체성의 허무함은 일반적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몇 년 만에 찾은 고향의 동네와 골목, 거리와 도로는 너무 낯설었다. 어린 시절 뛰어 놀던 놀이터와 야산에는 빼곡하게 고층아파트가 자리를 잡았고, 전화 통화 없이도 5분이면 만날 수 있던 동네 친구들과 형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지.

 

 

“오콩코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슬픔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부서지고 산산이 조각나는 부족의 처지를 한탄했고, 우무오피아의 도전적인 남자들이 여자처럼 그렇게 영문을 알 수 없이 유약해져 버린 것을 애도했다.” (p.215)

 

 

오콩코는 우무오피아의 전사다. 우무오피아를 대표하는 사나이고 우무오피아의 자랑이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부족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뒤를 이을 지도 모르는 양아들은 도끼로 내려찍을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우무오피아의 지구 반대편에서 이 책을 읽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것이 그들의 원칙이고 그들의 문화와 부족 공동체를 지키는 길이었다. 오콩코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강인해야 한다는 강박을 벗을 수 없는 남자였고 가장이었다. 자신의 뒤를 이을 강인한 아들이 없는 것을 애석해 하고, 오히려 자신을 쏙 빼닮은 딸아이를 보며 내내 안타까워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가족,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험난한 길도 기꺼이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북소리와 춤이 다시 시작되어 그 열기가 절정에 달했다... 그런데 오콩코의 총이 발사되어 총알 하나가 아이의 심장을 관통한 것이었다.” (p.147)

 

 

그런 그가 실수를 한다. 축제 중 발사된 자신의 총에 한 아이가 죽는다. 그래서 7년 동안 유배를 떠난다. 미필적 고의라 하더라도 사람을 죽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관습대로 7년 동안 부족에서 내쫓게 된다. 우리들의 상식에서야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들에게는 부족이 전부였다. 전부에서 이탈된다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외삼촌이 있는 부족에서 7년을 지낸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자신이 모든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듣게 된다.

 

 

이 백묵만큼이나 하얗다는 백인들의 이야기 같군요.”

“그런데 사람들 얘기가 그 백인들은 발가락이 없다던데요.” (p.91)

“지난 파종기에 한 백인 남자가 그들 부족에 나타났지요.”

“문둥이 말인가?”

“문둥이가 아니었네. 전혀 다르다네.” (p.163∼164)

 

우무오피아의 남자들도 백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들어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새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조금씩 우무오피아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누구는 백묵처럼 하얗다고 하고, 누구는 발가락이 없다고 하고, 누구는 문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은 발가락도 있고 문둥이도 아니며 별 거 아닌 것처럼 치부할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백인들은 교회와 함께 정부도 가지고 왔다. 이들은 재판소를 세워 지역의 치안판사가 주민들이 그런 법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건들에 대해 판결을 내리게 했다.” (p.205)

 

백인들은 우무오피아와 오콩코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밤에 잠이 들 때까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정령이 깃들어 있고 그들 조상의 혼령이 함께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백인이 말하는 유일한 신은 그저 많은 신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들이 가져 온 정부와 재판소도 무엇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부족의 어른들과 장로들이 모여 판결을 하고 앞일을 점치고, 부족의 길흉과 화복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그저 부족의 땅에서 조금 떨어진 ‘버려진 땅’에 교회를 짓게 하면 버려진 땅의 정령들이 그들을 방해하거나 죽게 할 거라 믿었다. 비웃었다. 그런데 그 백인들은 살아남았다. 교회를 짓고 학교를 세워 부족의 아이들을 데려갔다. 옷을 입히고 교육을 시켰다.

 

 

 

“내 딸 아케우니는 쌍둥이를 몇이나 낳고 버렸는지 물어보게나. 여자들이 죽으면서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적 있는가?” (p.160)

“우무오피아의 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은 오콩코와 달리 새로운 체제에 대해 강한 반감을 느끼지 않았다... 많은 돈이 우무오피아로 흘러들었다.” (p.209)

 

우무오피아가 지켜 온 전통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그들도 모른다. 그들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해온 것을 따라 배웠다. 그것이 자신의 가족과 부족을 지키는 길이라 믿었다. 쌍둥이를 낳으면 죽이는 전통, ‘오수’라는 일종의 불가촉천민 집단을 설정해 이들을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방치하면서 일방적 차별을 하는 전통들은 부족 내 갈등과 상처의 씨앗이 되었다. 이 씨앗을 발아하게 만든 것이 백인들과 그들이 가져 온 교회와 문화다. 부족의 약자들, 여자와 아이들, 오수는 백인들의 교회로 흘러들어 갔다. 이들에게 백인과 교회와 그들이 가져 온 문화와 교육은 오콩코가 느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오히려 산산이 부서진 것들이 제대로 기능하고 살아볼 만한 세상이 찾아온 것이었을 테다. 쌍둥이를 죽이고 같은 사람임에도 차별하는 이상하고 폭력적인 전통보다는 최소한 나은 것이었으니까.

 

 

 

“그의 삶은 하나의 큰 열정, 즉 부족의 촌장이 되는 것에 사로잡혀 왔었다. 그것이 그의 삶의 용수철이었다. 그때 모든 것이 부서져 버렸다.” (p.155)

 

 

오콩코는 7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우무오피아로 돌아온다. 돌아온 자신의 부족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콩코의 눈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 상태였다. 남자들은 힘을 잃어 버렸고 여성들과 아이들, 자신의 장남 은워예조차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단순히 7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잠시 잃은 것이 아니라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것이다. 더 이상 부족 사람들은 오콩코를 우러러보지 않았다. 오콩코가 우무오피아를 책임지고 이끌 촌장이라며 추켜세우지도 않았다. 오콩코는 복수를 결심하지만 죽는다.

 

 

“이것 외에도 포함할 것이 너무나 많아. 자세한 사항은 과감히 잘라 내야 할 것이다. 그는 많은 생각 끝에 이미 책의 제목을 정해 놓았다.”

“니제르 강 하류 원시 종족의 평정.” (p.244)

 

오콩코에게는 전부였던 우무오피아가 백인의 눈에는 그저 그런 원시 종족 중 하나에 불과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넓기만 한 황무지 같은 땅에 사는 원시 종족 중 하나. 자신의 발이 닿는 곳이면 자신의 발아래 둘 수 있다는 강력하고 폭압적인 자부심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발상. 그렇게 우무오피아와 다른 그렇게 그런 수많은 원시 종족은 하나하나 백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저 그런 자신의 책을 내는 데 몇 페이지 정도 할애할 수준의 그것에 불과했다.

 

이 책의 저자 치누아 아체베가 겪고 본 조국 나이지리아의 현실, 우무오피아와 오콩코가 겪은 현실은 우리가 쉽게 단정 지어 생각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박정희 향수로부터 생긴 눈곱을 벗겨 드리기 위해 필사의 노력으로 아무리 장모님과 그 세대를 설득하려 해봤자 헛일이다. 그것은 눈곱이 아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 그 자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우무오피아의 낡은 전통과 비인간적인 관습을 지금 시점에서 비판하고 당연히 무너뜨려야 할 악습 정도로 폄하하는 것도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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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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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의 글은 불편하다. 불편한 글을 좋아하는 내게도 그의 글은 충분히 불편하다. 이 무슨 형용모순인가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지만 불편하다. 충분히 현실을 현실 그대로 봉주는 이상으로 꼬고 비틀어 내는 것 같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훈의 글이 주는 불편함과는 좀 다르지만 충분히 불편하다. 그렇다고 내가 가학적인 글을 읽으며 혼자 만족하고 키득대며 구석에 처박혀 짜릿함을 만끽하는 그런 변태적 독자는 물론 아니다. 충분히 밝고 충분히 따뜻하고 충분히 읽을 만한 소설을 널렸다. 그런 소설은 굳이 읽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감(?)으로 분별해 낸다. 몇 개월 전 읽었던 「중앙역」이라는 장편의 김혜진의 글도 불편했다. 천명관, 김훈과는 또 다른 불편함이었다. 따옴표 하나 없는 작가 김혜진의 글은 그대로 서사의 힘이 엄청났다. 천명관의 이전 작「고래」를 읽으며 받았던 불편함과 비슷하기도 했다.

이 책은 천명관의 단편을 엮은 책이다. 나는 정치·사회 서적을 가장 많이 읽는다. 그 다음 많이 읽는 장르가 소설이다. 그래봐야 내가 좋아하는 몇몇 작가의 책을 골라 읽는 것이 전부이기는 하지만, 소설을 읽으며 정치·사회 서적을 읽으며 받았던 스트레스와 피곤함을 풀기도 하고 정치·사회 서적을 다시 읽으며 소설을 읽은 후 구체적인 사회를 재조명한다. 그 순환과정이 내게는 퍽 신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전혀 알아주지 않는 작업이지만 그 신나는 순환과정이 내 독서생활의 골자다. 그래서 이 선순환과정을 조금이라도 비트는 허무맹랑하고 멜랑콜리한 소설을 실수로 읽는다면 다음 정치·사회 서적을 읽는 순서까지 비틀어지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찾아 읽는 이유다. 단편소설은 맥락이 끊기고 글을 읽는 호흡이 일정치 않아 좋아하지 않는데, 천명관의 단편을 엮은 이 책은 맥락의 흐림이 일정하다. 다른 독자들에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불편함’. 이 한 단어로 정리된다.

 

 

 

 

“그, 그러니까 그 애들이 보건소에 다니는 게 이, 임신을 해서가 아니라는 거예요?”

“임신은 무슨! 사교병에 걸려서 같이 주사 맞으러 다니는 거야. 여기 와서 약도 지어갔다니까.” (p.50)

 

 

<동백꽃>의 유자는 구회장의 아들 동엽의 아기를 가지고 싶었다. 다른 젊은 처녀들처럼 뭍에 있는 도시로 나가 공장에서 일하거나 가정부로 일해 봤자 팔자를 펴기는커녕, 명절이 되어 겨우 전자제품 하나 사들고 섬으로 돌아오는 것에 불과했다. 섬의 최고 ‘갑’ 구회장의 아들, 동엽에게 순정을 주고 순결도 주면 뭍으로 나간 치들보다 더 쉽고 간편하게, 그리고 알짜배기 사모님으로 살아가라 수 있었다.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이다. 유자의 단짝 친구 경숙이가 자신의 연정, 동엽오빠를 가로채 그의 아기를 가졌다는 유언비어를 접한 후 모든 것을 포기할 뻔 하지만 임신이 아니라 성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는다. 자신의 순정과 순결을 모두 가진 채 섬에서 떨어져 나가는 동엽을 붙잡으려 마지막 발악을 한다.

 

 

 

“여기 오빠 애가 자라고 있다고! 진짜야!”

“쯧쯧쯧, 저년도 사교병에 걸린 모양이로군, 그럼 빨리 보건소에 나 가볼 것이지 여긴 뭐 하러 쫓아온 게야?” (p.56)

 

 

결말이 이렇다. 동엽이 그저 답답한 섬생활을 조금이나마 견디기 위한 농락의 수단으로 삼았던 유자와 경숙의 마음과 몸은 그대로 섬에 남는다. 떠나는 배를 뒤로 한 채 부두에 메아리 쳐 돈다. 최소한 유자 자신은 사교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동엽이 자신의 몸을 찾을 거라는 헛된 희망은 부두를 떠나는 배가 만들어 내는 파도에 묻혀 버렸다.

알~싸하다.

 

 

 

“언 칠면조가 슬슬 녹으면서 비어져 나온 살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경구는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칠면조를 만져보았다. 차갑지만 두툼한 살집이 먹음직스러웠다. 혹시 마누라를 만난다면 선물이라며 칠면조를 불쑥 내밀어도 재밌을 것 같았다.” (p.130)

 

 

경구, 그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꼬이고 비틀어 졌다. 트럭을 운전하던 때가 그의 가장 찬란하던 시절이었다고 하던가.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오히려 자유를 맛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던 언 칠면조가 녹기 시작했다. 얼어 있어서 죽어었던 칠면조의 두툼한 살집을 보며 찌그러진 육체노동자 속에 죽어있던 찬란한 과거를 부활시킨다.

 

 

 

“지랄하고 있네. 낫살 처먹으면 나잇값을 하든가. 외상술이나 처먹고 다니는 주제에 뭔 나이 타령이야, 이 씨발 놈아.” (p.125)

 

 

낫살이나 처먹고 나잇값을 못하던 자신이다. 단지 몇 십만 원 외상 술값이 없다고 나이도 훨씬 어려보이는 놈에게 욕지거리를 들어야 한다. 마누라는 도망가고 애새끼들은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새파란 육체노동자들이 찌그러진 자신의 육체를 대체해 간다. 기껏해야 몇 푼에 지나지 않는 돼지내장을 구워 찌그러진 육체에 비릿한 소주를 밀어 넣는다. 한 번 기분 내려다 외상 술값을 기록하고, 채근하는 술집 사장 놈을 칠면조로 때려죽인다.

 

 

 

“한 발짝만 잘못 내디디면 바로 나락이다. 씨발.” (p.112)

 

 

씨발. 한 발짝만 잘못 내디뎌도 나락인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와버렸다.

꿈틀대는 찬란한 육체를 가진 칠면조를 마누라에게 보여주려 훔친 트럭을 몰고 달린다.

무저갱 속으로.

 

 

 

 

“불길은 어느새 바람을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않은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지옥도를 지켜보았다. 어, 잘 탄다.” (p.156)

 

 

<전원교향곡>의 정환의 결말도 그랬다. 유자와 경구도 그랬다. 결말은 새드엔딩이다. 그런데 유자에게도, 경구에게도, 정환에게도 새드엔딩이기만 할까? 도무지 직시할 수 없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기가 막힌 현실을 끝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면... 그들에게는 새드가 아니라 해피가 아니었을까? 그토록 자신과 아내를 괴롭혔던 돼지축사를 태워버리며 꿈쩍도 않은 채 산 지옥을 경험하는 정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단말마가 어, 잘 탄다. 라니...

정말 현실이 생지옥이다. 차라리 활활 불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환희를 느낀다. 돼지축사를 태우고 자신의 집과 자신까지 집어 삼킬 듯 솟구쳐 오르는 불길 안에서 자유와 환희를 경험한다.

 

 

 

“오늘은 단 하루만이라도 맨 정신으로 버텨야 한다! 그날은 두 달에 한번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는 날이었다.” (p.135)

“축제는 짧았고 달콤한 축배는 곧 쓰디쓴 독배로 변하고 말았다. 돼지감자 농사를 마치고 파산하자 서리가 내리면 파리가 자취를 감추듯 아무도 은골을 찾아오지 않았다.” (p.146)

 

 

아내도 잃고 아이도 잃었다. 몇 마리로 시작하던 돼지축사는 수 십 아니, 수 백 마리로 늘어났다. 한두 마리로 시작되던 파리의 침입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겨우겨우 참고 참았던 아내는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정환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렇다. 성가시고 아무리 잡아 죽여도 계속해서 주위를 맴도는 파리는 현실이다. 현실에서 익숙하게 경험하는 어려움, 불편함, 현실의 무게다. 아무리 파리채를 휘두르고 파리끈끈이를 갖다 붙여도 도무지 이놈의 파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젠장.

모조리 태워 버리는 수밖에 없다. 축사 곳곳에, 집채만 한 돼지들 몸에 등유를 들이 붓고 꼼꼼하게 태워 버리기 위해 곳곳에 불을 붙여 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도 태워 버리는 수밖에.

여전히 주위를 들끓는 파리 떼와 함께 해서는 안 될 술을 마셨다. 취해 쓰러져 있는 틈에 아이가 축사를 지키던 개에게 물렸다. 복수할 것이 없다. 방법이 없고 힘도 없다. 모조리 태우고 자신도 타버리는 수밖에.

멋지게 축사와 개를 태워버린 후 담배를 문 채 자신의 차를 타고 도망가 버리는 것은 천명관의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던 마지막 수단이던 초라한 스쿠터도 박살나 버렸다.

 

 

유자에게도, 경구에게도, 정환에게도 현실은 생지옥이다. 끝이 없는 무저갱이다.

불편하다. 충분히 불편하다. 현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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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공장 - 소설가 김중혁의 입체적인 공장 산책기
김중혁 글.그림 / 한겨레출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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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차이나!

라고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단지 메이드 인 차이나 라는 이유만으로 구매의욕은 한없이 떨어지고 다시는 눈에 담지 않았으며 옆 사람이 혹시 살라 치면 어이구~ 어떻게 메이드 인 차이나를 살려 그래! 라며 호통을 날리기도 했다. 이제는 점점 옛날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다. 며칠 전 뉴스에 보니 중국의 샤오미가 LG 스마트폰의 시장 점유율을 넘어섰다고 했다. 샤오미라는 브랜드를 처음 들어본 내게, 이 사실은 꽤 흥미로웠다. 워낙 기계에 관심이 없고 스마트폰 같은 것은 주변 친구들과 지인들의 무시와 괄시, 압력에도 꿋꿋하게 구입하고 있지 않다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쩔 수 없이 구입했을 정도다. 아이폰6을 사기 위해서 밤을 새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아무튼 최근 구입한 스마트폰이 LG제품이다. 그 전에 쓰던 제품보다 훨씬 카메라 화소도 좋고(이것이 내게 가장 중요한 스마트폰 구입 이유) 화면도 크다. 스마트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철지난 기기지만 내게는 최신이다. 전화하고 문자하고 카톡하고 사진 찍고 동영상 찍는 것으로도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이 부족한 내게는 최신 중의 최신이다. 그런데 그런 최신 핸드폰을 만들어 낸 LG를 제친 곳이 중국의 샤오미?

샤오미든 LG G시리즈든 공장에서 만들었다. 애플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그들이 열광하는 그 제품들이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내는 그 무시무시한 폭스콘도 공장이다. 폭스콘에서 만들어내는 멋지고 간지나고 뭔가 앞서나가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애플의 제품들도 결국 폭스콘이라는 ‘공장’에서 만들어낸 제품이다.

 

모든 것의, 대부분이 메이드 인 공장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공장에서 일해본 적은 없다. 지하철 공사장과 택배 상하차 등 힘들다고 소문난 몇 가지 일은 단기적으로 해본 적이 있지만 공장에서 일해본 적은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상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제품들이 공장에서 태어나는 것이지만 공장에서 태어난 후 각 가정의 거실과 방 곳곳에 들어올 때는 말끔하게 디자인 된 형태이기 때문에 그것에서 공장을 바로 매치하기는 어렵다. ‘공장’이라고 하면 뭔가 어둡고 지저분하고 춥거나 덥고 시끄럽고 위험한 곳으로 생각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사람의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데, 적어도 내게 ‘공장’은 위에 열거한 곳이다. 나고 자란 곳이 대규모 철강공단이 위치해 있는 해안도시다. 아버지도 철강공단에서 두 번째로 큰 공장에서 30년을 일하시고 정년퇴직 하셨다. 가장 큰 공장은 포스코다. 예전에는 포항제철로 불렸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꼭 포항제철 견학을 갔다. 도무지 뭔가 알 수 없는 시뻘건 것들이 귀를 찢을 듯한 소리를 내며 오가는, 우리 집보다 수백 배는 커 보이는 공장의 거대함과 기괴함이란.

공장은 그만큼 우리의 일상과 먼 거리에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공장을 가까이에서 보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는 기회는 적다. 공장이라는 건물 자체도 이제는 도심 외곽지역이나 시골로 밀려나 있는 터라, 철강공단이 대규모로 입주해 있는 도시에 살지 않는 이상 학교에서 공장에 견학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만큼 먼 우리의 일상과 공장과의 거리를 소설가가 좁혀준다. 김중혁의 작품은 재미있다. 그의 전작들이 그랬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닌 에세이다. 견학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출판사의 편집팀과 상의해 방문할 공장을 정한 후 직접 방문해 공장을 둘러보고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작가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가 책을 읽는 묘미다. 귀엽고 센스 넘치는 일러스트는 입 꼬리를 올라가게 만든다.

 

 

 

“편집자가 ‘브래지어 공장 어떠냐?’고 물어봤을 때, 마음속에서 ‘흐음’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흐음’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p.50)

 

 

브래지어를 만드는 공장이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 말고 브래지어 공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그 공장이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공장에 직접 방문하거나 견학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단지 ‘브래지어’라는 단어 하나로 ‘흐음’하는 감탄사를 흘러나오게 만들었다는 모든 남성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다. 브래지어가 여성이 착용하는 속옷에 불과한데 왜 그러냐? 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남자들은 브래지어에 대한 뭔지 모를 판타지가 있다. 그래서 작가가 부러웠다.

작가, 그 중에서 유명한 작가이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이런 책을 내자는 제의도 들어오고, 일반인이라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브래지어’공장에 갈 수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수백, 수천 개의 브래지어가 쌓여 있는 브래지어 공장을 직접 본다면 그간 가졌던 브래지어에 대한 환상이 단번에 깨질 수도 있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싶기는 하다.

 

 

 

“1그램당 100만 마리 이상의 효모들이 뒤섞이고 끓어오르면서 6개월 동안 간장을 만들어낸다... 간장을 만드는 가장 큰 원리가 시간이라는 점” (p.75)

“핸드백 같은 경우는 평생을 배워가면서 해야 해요. 원단 자체가 생명체예요. 이게 다 남의 가죽이란 말이죠. 가죽이란 게 하나하나 다 달라요.” (p.86)

“공장에서 생산하는 도자기는 두 종류인데, 하나는 ‘파인차이나’이고 또 하나는 ‘본차이나’이다. 두 제품의 생산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본차이나’는 젖소의 뼈를 태워서 생긴 재, 즉 ‘본 애시(Bone Ash)’를 50퍼센트 이상 함유한 제품으로 일반 도자기에 비해 강도가 높고 가벼운 게 특징이다.” (p.143)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요리가 라면일 것이며, (아버지처럼) 요리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요리가 라면일 것이다.” (p.238)

“라면 한 가닥의 길이는 약 65센티미터이고, 라면 한 봉지에는 대략 75가닥의 면발이 들어간다. 라면의 총 면발 길이가 49미터에 달하니”

 

 

간장공장, 가방공장, 도자기공장, 라면공장. 작가가 방문한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생필품이다. 가방도 여성에게는 생필품이지 아마? 일단, 모르는 것이 많았다. 이 책을 읽으며 혼자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정말? 이야~ 이렇게 만들어 지는구나~”였다. 우리는 정말 모르는 것이 많다. 굳이 몰라도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본차이나’가 당연히 ‘중국에서 태어난’ 정도로 이해했었는데, 젖소의 뼈를 태워서... 강도가 높고... 가볍고...

라면 한 가닥의 길이가 65센티미터, 총 면발 길이가 49미터. 생각했던 것보다, 아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수치이지만. 왜 65센티미터와 49미터라는 특정한 수치가 나왔는지가 문득 궁금해졌다. 라면이라는 것이 적어도 한국에서는 완전체 음식이고, 기업 간 경쟁도 굉장히 치열한데, 책에 소개된 기업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라면만 65와 49라는 특정 수치를 가진 것인지 다른 기업의 제품도 그런 것인지 문득 궁금했다. 아니면 수십 년 동안 누적된 고객의 데이터와 제품에 대한 연구데이터가 쌓여서 나온 지극히 과학적인 통계는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를테면, 라면 한 가닥의 길이가 64센티미터이거나 총 면발의 길이가 48미터라면 포만감이 부족하다든지, 66센티나 50미터라면 포만감이 지나쳐 라면 본연의 맛을 잃어버리고 구매욕까지 떨어뜨린다든지 하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분명 뭔가 더 노골적인 이유가 있을 텐데...

 

 

 

“ㄱ팀장님의 설명에 따르자면, 지구본이 불티나게 팔리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렇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을 때, 리비아 내전이 일어났을 때, 지구본이 팔린다.” (p.107)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공장은 지구본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숙련된 직원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구의 남반구와 북반구를 맞춰 하나의 지구본을 만드는 행위도 뭔가 창조적이라 생각되었는데, 지구본이 가장 잘 팔리는 때가 전쟁이 일어날 때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온 지구가 평화롭고 지구상 어느 구석에서도 아주 작은 내전조차 일어나지 않는다면 지구본을 만드는 공장의 사장님은 슬퍼해야 할지, 그래도 좋아해야 할지... 참... 이상한 세상이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조립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서로를 조립하고 있는 셈이다.” (p.9)

 

 

나와 당신은 공장에서 돌아가는 기계다. 그리고 그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다. 그 제품을 만들기 위해 투입되는 원자재 일 수도 있다. 그렇게 서로가 맞춰지고 섞이고 분해되고 조립되고 떨어져 나가고 뭉뚱그려 지면서 사는 것이 공장이다. 세상이다.

재밌는 공장, 이상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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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개 1~3 세트 - 전3권
강형규 지음 / 네오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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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어떤 것이 사람의 모습일까? 인간은 선한 존재일까? 악한 존재일까?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이런 철학적인 문제는 금방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든다. 지혜로운 역사상 인물들이 남긴 수많은 문장과 책이 있고, 현세를 함께 살아가는 지식인들에게서도 각종 정의와 분석을 소개 받는다. 하지만 결론은 개인이 주체가 되어 내리는 것이다. 시대와 기분에 따라, 입장과 관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철학적 담론을 개인적으로 체(體)화 하는 과정은 지극히 개인적이어야 한다. 세상은 그만큼 녹록하지 않고 패자부활 같은 배려는 없는 세상이니까.

이 책에서 학수는 ‘악’으로 그려진다. 명동 지하세계를 주름잡는 숨은 실력자 학수. 피도 눈물도 없는 그는 부하들도 무지막지하게 다룬다. 이미 버린 아들에게 “아빠야~”라며 다정하게 말할 만큼 위악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굳이 쓸개와 쓸개의 엄마가 숨긴 금덩어리를 손데 넣지 않아도 될 만큼 돈과 권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끝까지 그 금덩어리를 놓지 못한다.

 

 

학수가 처음부터 악마가 된 것은 아니다. 건실한 청년으로 주변 상인들에게 칭찬받았다. 순진하고 열정적이며 선한 청년에게 잘나가는 상점주인 아주머니는 자신의 가게를 학수에게 넘긴다. 그리고 그녀는 학수를 양아들로 삼는다.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이다. 우연찮은 기회에 함께 사업하는 형으로부터 대박 아이템을 제안 받는다. 그것이 ‘악마’가 된 경위다. 눈앞에 금덩어리가 보이고 당장 손만 뻗으면 그 금덩어리를 품에 넣을 수 있다면, 학수처럼 눈이 뒤집히고 ‘악마’가 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 욕심을 끊어내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금덩어리에 집착한 학수의 마지막 모습이다. 모르겠다. 처음 이 장면을 책에서 봤을 때는 ‘학수도 악마는 아니야. 맞아. 상황이, 사람 욕심이 다 그렇지 뭐.’ 생각했다. 그런데 반복해서 보면 볼수록 잘 모르겠다. 작가는 마지막에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되찾은 학수를 그리고자 했는지 모르겠지만 인자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한 그림에서 나는 오히려 더 무서운 학수의 모습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나와 같은 독자가 마음이 꼬일 대로 꼬여서 작가의 본래 뜻을 왜곡한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겠다. 그러나 현실이 어디 그런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진리와 같은 이 명제에 고개를 저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진짜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학수도 과연 변한 것일까? 비로소 그토록 원하던 금덩어리를 품에 안자마자 아들과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회한이 몰려온 것이 진실일까? 일단 나는 아니라고 보고,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잠깐이었다고 생각한다. 감옥에 들어가서 판결을 받았다 손 치더라도 형기를 다 채우고 출소할까? 아니, 형을 받을 수는 있을까?

 

학수가 쫓은 금덩어리에는 다른 불나방도 뛰어 들었다. 강력한 정치인의 오른팔도 뛰어 드는데, 그것은 쓸개가 꾸민 덫이다. 한방에 학수와 정치인의 오른팔도 엮으려던 것이다. 결국 학수는 뜻을 이룬다. 학수와 정치인의 오른팔은 구속된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이 이상하다. 그 정치인은 영웅이 된다. 그들만의 난장판에서 영웅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맞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엄청난 특종이 터지면 그것을 덮는 또 다른 특종이 터지는 것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하게 보여 준 세상의 현실이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 판단할 수조차 없다. 학수와 오른팔과 영웅이 된 유력 정치인은 삼위일체다. 금덩어리만 없었다면 자기들끼리 쿵짝쿵짝 하면서 해 먹고 또 해 먹고 봐 주고 또 봐 주고, 끌어주고 밀어 주면서 자기들만의 세계를 확장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만 영웅이 된다. 아니, 영웅으로 만들어 진다. 익숙하다. 착한 놈과 나쁜 놈을 만들어내는 프레임들. 학수와 오른팔은 반드시 만기를 채우지 않고 감옥에서 나올 것이다. 만약 쓸개 4권이 나온다면 그 이야기가 등장해야 한다. 현실적이니까.

 

 

쓸개가 덫을 놓고 그 덫이 성공할 수 있게 만든 1등 공신은 학수의 부하 정환이다. 학수의 명령 한 마디에 목숨을 거는 인조인간 같은 정환은 어쩐 일인지 쓸개의 진심을 알게 된다. 그래서 명함을 주면서 나를 “인질로 써”는 주옥과 같은 대사를 남긴다.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현실적이다. 이 시대에도 이런 내부고발자(?) 혹은 양심발로자(?)들이 있다. 물론, 그들의 결말은 모조리 비극이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하던 일을 빼앗기고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잠시 그들에게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 이런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돕고 싶다. 등등등. 그러나 잠시만 시간이 흐르면 깜빡! 하고 잊어버린다. 그것 또한 사람의 진짜 모습이다.

만약 4권이 나온다면 정관계 로비로 일찍 감옥에서 나온 학수에 의해 복수를 당하는 정환의 모습이 담겨야 한다. 그게 현실적이니까.

 

오늘 자 뉴스 중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며칠 전 대구에서 20대 청년이 뿌린 800만원 상당의 지폐에 대한 사연이다. 정신질환을 겪는 청년의 할아버지가 평생 폐지를 팔아 모은 돈이 800만원이라는 것이다. 사건을 접수한 지구대에서 혹시 그날 그 거리에서 돈을 주운 사람들에게 지구대로 돌려주면 당사자에게 전해줄 거라는 뉴스였다. 5만원권 160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한다. 더군다나 얼마 전 홍콩에서의 경우처럼 돈을 주워가면 절도죄가 성립되지 않는 경우라고 하는데, 얼마나 지구대에 돈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나조차도 며칠 전 “800만원 길거리에 뿌려져”라는 기사를 보고 “아~~ 왜 나는 그 시간에 그곳에 없었던 것인가?” 낙담했었으니까.

진짜 연말이고, 내일이면 연시다.

며칠 후 “길거리에 뿌려진 800만원 모두 지구대로 돌아와 주인에게 전해져” 라는 기사를 꼭 봤으면 좋겠다.

그래도 아직은 착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믿고 싶은 요즘이니까.

금괴를 두고 서로 싸우기만 하는 세상은 아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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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 스캔들 - 저작권과 해적판의 문화사
야마다 쇼지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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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기 반 소리 반>

이 말은 굉장히 유명하다.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K팝스타라는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으로 나온 기획사 JYP의 대표 박진영씨가 한 말이다. 음악 좀 하고 좀 듣고 좀 안다는 사람들은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말을 대부분 박진영을 까고 조롱하는데 쓴다.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알아듣지 못할 박진영만의 표현을 듣고 ‘그러네~ 맞아. 노래는 공기 반 소리 반으로 해야지’하는 시청자가 있을까? 그 소리를 들은 오디션 참가자는 다음번 스테이지에서 또 같은 말을 듣는다. <공기 반 소리 반>이 무슨 소리인지 당최 알 수 없는데, 뭘 고쳐야 하는 지 알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아니! 공기 반 소리 반이 뭔 소리요! 당신이 먼저 그렇게 불러 보든지”하는 오디션 참가자는 없다. 혹 있다 해도 모조리 편집! <공기 반 소리 반>이 인구에 회자되고 이번 시즌 K팝스타에서 유독 박진영의 심사평이 도드라지게 편집되는 건 어쩌면 프로그램 담당자의 욕심일 수도 있다. 워낙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고 어쨌든 살아남고 시청률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만인이 깔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물론, 심사위원 박진영은 함께 하는 두 사람보다 더 프로의식과 전문가의식을 가지고 심사를 하겠지만 말이다. 시청자와 음악 좀 하고 듣고 안다는 사람들 중 많은 숫자가 박진영을 까는 것은 그의 허무맹랑한 심사평과 더불어 박진영 개인에 대한 호불호의 차이다. 그가 구원파에 연루가 되어있느니, 결혼 생활과 여자관계가 어쩌느니, 기획사가 엄청난 재정난에 빠졌다느니 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사실여부를 알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의 표절 의혹이다. 여기서 의혹이라 하는 것은 국내 발매되는 음반과 음원에 대해 표절 판단을 내리는 주최도 애매하고 그것에 대한 신뢰도 마음껏 보낼 수 없는 골 때리는 음악 환경 탓에 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표절>이라고 하고 싶지만 몸을 사려 본다.

그렇다면 박진영의 표절은 나쁜 것일까? 표절이라면 당연히 나쁜 거지! 남의 것 갖다 베낀 거 아니야! 당연할 걸 가지고!

 

맞다. 남의 것을 갖다 베끼는 행위는 잘못된 거다. 그런데 이런 표절 논란 같은 것에 휘말리는 가수나 작곡가들의 변명 중 대다수는 이런 것이다. “아~ 말이죠~ 음악을 잘 모르시나 본데 말이죠~ 얼마나 많은 음악이 존재합니까. 세상에는 말이죠. 창작 이라는 것은 말입니다. 무지하게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 뼈를 깎는 고통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말이죠. 멜로디 라인 몇 개가 비슷하다고 해서 표절이라고 하면 말이죠. 어떻게 음악을 만듭니까!!” 라고.

 

 

“책에 씌어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이미 어딘가에 씌어 있는 것이나 들은 것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식에 소유권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 예전에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던 지식을 사용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다. 책뿐만 아니라 문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무언가에 얼마간을 덧붙여가는 것이 문화 행위이기 때문이다.” (p.302)

 

 

저작권을 비롯한 창작물에 대한 관습·성문법의 시초가 되는 ‘도널드슨 대 베케트 재판’에서 결과적으로 도널드슨이 승리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된 문장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창작은 자연스러운 행위이자 활동이었다. 출판물을 비롯해 음악·미술, 인류의 삶 전반에 걸친 모든 영역에서 창작은 반복되고 반복되어 왔다. 정말 아무도 하지 않았고 만들지 않은 순수한 창작물을 만드는 행위가 가능할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서 표절을 반복해서 일삼는 이들의 행위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남의 창작물을 베끼거나 가져가는 행위가 아무런 절차 없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과도한 카피라이트의 적용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컴퓨터 인터페이스나 브라우저와 같은 경우 마이크로소프트와 대척점에 있는 오픈소스집단과 그들의 콘텐츠는 알 만하고 그것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로운 정보의 이용으로 사용된다. 인터넷 브라우저가 당연히 마이크로소프트밖에 없는 줄 알았던 나와 같은 IT관련지식 문외한에게는 가르쳐줘도 사용하지 못하는 개념과 정보지만 창작물이 어떤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공유의 개념이라는 큰 틀에서의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것이 더 자유롭고 창의적인 정보의 생산과 창작물의 생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상에, 인류에게 공유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학과 학문입니다. 그것들은 공기나 물처럼 자유롭고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p.191)

 

 

이미 18세기에 이런 생각을 하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것으로 인해 카피라이트의 개념이 지금까지 세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18세기 영국의 대형 서점주는 책의 기획에서부터 제작, 인쇄, 유통, 판매까지 모두 관여했다. 그 무렵의 서점주는 출판문화의 종합 프로듀서였던 셈이다.” (p.24)

“요컨대 이 싸움은 밀러처럼 에든버러에서 일찌감치 런던으로 진출한 서점주와 도널드슨처럼 뒤늦게 찾아온 사람과의 싸움, 즉 선발 업체가 독점한 시장에 신규 참여자가 파고들려고 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p.41)

 

진짜 이유는 기득권 싸움이다. 기득권을 쥔 쪽이 후발주자를 견제하고 자신들의 방으로 기웃거리는 새싹을 짓이겨 다시는 움트지 않도록 하려는 시도였다. 저 멀리 촌구석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 서점가에 들어와 자신들의 밥상 한쪽을 차지하려는 도널드슨을 없애버리려는 시도였다. ‘도널드슨 대 베케트’재판의 양쪽 당사자들과 법률 대리인들이 펼친 이야기들은 보편적 인권과 인류의 자유로운 정보교류 등 고상한 것들이 많았다. 책에서는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고상한 용어와 문장과 단어들 뒤에 숨은 의도는 결국 자기 기득권 지키기였다. 결국 재판에서 승리한 도널드슨도 에든버러에서 서점주로 성공한 후 런던으로 진출해 더 큰 성공을 바란 것이지, 처음부터 영국과 자유국가와 그 시민들의 인권과 공유의 가치 실현을 위해 재판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독점과 ‘해적’은 선악이라는 이분법으로 가를 수 없다. 양자는 어디까지나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지만 자신들의 처지를 옹호하는 방편으로 저자의 권리나 독자의 편의를 말해왔다. 양자의 힘과 힘이 충돌하고 거기에 법률가들의 인간관계가 뒤얽히며 시대가 움직여갔다.” (p.324)

 

 

이 책의 주제라고 생각한다. 솔직한 주장이다. 가치 판단은 너무 어렵고 골치 아프다. 오늘 날짜로 정당이 없어진 통합진보당 관련한 대법원의 판결을 가지고 ‘악’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나? 그리고 17만 장이나 된다는 판결문의 내용만큼 오늘 날짜로 없어진 통합진보당의 구성원들이 ‘악’이라고 규정지을 수도 없다. 선악의 이분법은 간단한 듯 어렵고 골치 아픈 문제다. 이분법이 간단해 지면 그 틈을 비집고 폭력과 야만이 기어 들어오게 마련이다. 차라리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주된 관심이자 목표다. 권력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다.

 

 

“저작권 연장에 찬성하는 쪽의 논의에는 저작권 사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열쇠를 쥐고 있는 자란 곧 콘텐츠 유통 사업이다. 저작권이 연장되면 가장 득을 보는 것은 저작자가 아니라 저작권자이고 저작물을 유통시켜 이익을 얻는 회사다.” (p.320)

 

 

한국에서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대형 기획사가 찍어낸 보이·걸그룹은 제외하고)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뮤지션이 한 곡당 가져가는 저작료가 몇 십 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음반 시장은 붕괴한지 오래고 음원 시장이 현재 갑인 구조다. 이것 떼고 저것 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돈을 저작료로 받는 다는 것이었다. 그런 현재 한국의 음악시장의 구조를 놓고 보면 저작권 및 카피라이트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창작자는 물론 소비자까지 ‘을’을 지나쳐 ‘병’이나 ‘정’쯤으로 만들어 버린 ‘갑’들에게 있다. 대형 유통 업체. 수백, 수천 곡의 음원을 싸게 사 들여 그것보다는 조금 더 비싼 금액으로 소비자에게 파는 그들의 ‘갑’질에 대해 제재하거나 수익구조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 이상 한국의 뮤지션들에게 ‘도널드슨 대 베케트 재판’ 판결의 주요 요인이 된 개념을 들이밀며 “에이~ 만인을 위해서 저작권, 카피라이트 따위 매달리지 말고~~ 에이~ 더 만들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폭력의 구조를 바꾸지 않고 고통의 연속인 창작에만 매달려도 시원찮을 뮤지션들에게 정보의 공유와 오픈소스 개념을 주장하는 것은 과도하다.

어? 그러면 K팝스타의 심사위원 박진영씨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은 과도한 거 아닌가? 표절의혹이 아니라 단지 너무 허무맹랑한 심사평과 유명한 해외 뮤지션들을 한방에 깎아내리는 절대 신공의 용기가 싫은 건가? 잘 모르겠다. 크흐흐...

 

 

“‘도널드슨 대 베케트 재판’의 결과, 카피라이트는 영구적이지 않고 기간이 정해진 권리라는 원칙이 만들어졌다.” (p.10)

 

 

아무튼 ‘도널드슨 대 베케트 재판’은 런던의 기득권 대형 서점주들에게 패배를 안겼다. 그들이 가진 독점적 권리와 자폐적 탐욕은 사라졌다. 물론! 잠시 동안! 카피라이트가 영구적이지 않고 기간이 정해진 권리라는 원칙이 이미 200년도 훨씬 전에 만들어 졌지만 아직도 모든 영역의 창작활동과 창작물에 대해서 표절 논란과 의혹이 넘쳐나는 세상이니까. 쉬운 일이 아니다. 간단하게 선을 긋기도 모호하다. 선악의 이분법만 들이밀기에는 골치 아픈 문제다.

 

결론은 공기 반 소리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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