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일기
지허 지음, 견동한 그림 / 불광출판사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랫동안 여러 분들의 추천을 받아왔던 책을 드디어 접했습니다. 참 감개무량합니다. 강금실 전 장관의 추천부터 다른 많은 분들도 책을 추천했습니다. 과연 어떤 책이길래,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길래 그리 많은 분들이 이 책을 권했을까요. 얇은 분량의 책이지만, 읽은 후 고개를 절로 숙이게 되었다면, 아시겠지요.

 

지허 스님은 언제 입적을 하셨는지도 확실치 않은 분입니다. 출가의 시기도 명확치 않고, 세속의 이름이나, 출신, 학력 등 모든 것이 알려지지 않은 분입니다. 하지만 지허 스님은 이 책 한 권으로 이미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하셨고, 또한 언제나 매서운 죽비와 같은 가르침을 주고 계셨습니다. 다만 제가 너무 늦게 뵈었을 뿐이죠.

 

불교라는 종교는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으로 끝이 납니다. 아니, 사실 그 끝이라는 것도 없다고 봐야겠지요.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갑니다. 지허 스님은 “부조리한 백팔번뇌의 인간이 조화된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닦아 놓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불교”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같은 속인이 어찌 그 뜻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만, 다만 무서울 만치 치열한 구도의 연속, 그 사이 사이에 번민까지 모두 진리를 향한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은 스님이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를 수행하는 기간 동안 선방의 생활과 수행을 담은 글입니다. 깊은 감동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느낄 정도로 간결하고 정갈한 문장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흔히 스님들에게 여름과 겨울은 공부철이라 하고, 봄과 가을은 산철이라 합니다. 때문에 하안거와 동안거 기간에는 출입이 절대 불가합니다. 이때는 길을 가다 밟을지 모르는 곤충과 같은 생명마저 보호하기 위해 선방에 들어가 오직 정진에만 힘을 쓰게 됩니다.

 

이러한 수행 기간 동안 지허 스님은 끊임없이 진리를 탐구하고, 고뇌하고, 번민합니다. 그리고 끝내 밥 빌어먹는 식충이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모습은 처연하고 처절하며, 그리고 아름답습니다.

 

비정 속에서, 비정을 씹으면서도, 끝내 비정을 낳지 않으려는 몸부림, 생명을 걸고 생명을 찾으려는 비정한 영혼의 편력이 바로 선객들의 상태다. 진실로 이타(利他)적이기 위해서는 진실로 이기(利己)적이어야 할 뿐이다. 모순의 극한에는 조화가 있기 때문일까.

 

그리고 선방 생활의 아름다운 모습들도 읽는 이들을 즐겁게, 또는 숙연케 합니다. 초하루 보름에 먹는 별식, 단지 찰밥이나 만둣국이라 해도 너무나 맛있는 진수성찬이 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인 식본능, 이는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절망적인 공포가 바로 기아에서 오는 공포임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식본능을 억제하며 수행을 정진하는 스님들에게 찰밥과 만둣국은 그야말로 “평양감사 부럽지 않은”것들이겠지요. “다사(多思)는 정신을 죽이고 포식은 육체를 죽인다”는 말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해줍니다.

 

철학적인 명제가 아닌 종교적 신앙인 화두, “이 뭐꼬”와 함께 살아가는 스님들. 그들의 용맹정진(수면을 거부하고 장좌불와함) 속에 얻어지는 깨달음. 그것을 과연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중생이 고뇌에서 해방되는 것은 엉뚱한 기연 때문이다. 잡다하고 평범해서 무심히 대하던 제현상 가운데서 어느 하나가 기연이 되어 한 인간을 해탈시켜 준다. 불타는 효성에 기연하여 대각에 이르렀고 원효 대사는 촉루에, 서산 대사는 계명에 기연하여 견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을 해탈시키는 것은 그 기연이 기적처럼 오는 것은 아니다. 고뇌의 절망적인 상항에 이르러 끝내 좌절하지 않고 고뇌할 때 비로소 기연을 체득하여 해탈하는 것이다. 극악한 고뇌의 절망적인 상황은 틀림없는 평안이다. 왜냐하면 극악한 고뇌의 절망적인 상황은 두 번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을 이긴 사람에게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죽음은 결코 두 번 오지 않는다.

 

최근 우리 사회는 특정 종교가 타 종교를 무시하고, 폄훼하고 급기야 탄압마저 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유일신을 있기 때문에, 다른 신은 용납할 수 없고, 그 신을 믿는 이들마저 용서할 수 없다는 이들. 과연 그들이 믿는 신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지 걱정되곤 합니다. 패권주의와 배타성은 그 어디에서도 결코 용납될 수도, 용서될 수도 없는 것임을 그들은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린 겨울, 숲 속 혹은 적막한 산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스님들의 조용한 발걸음이 떠오릅니다. 모두가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보다 넓은 마음이 서로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에게 꼭 추천하고픈 귀한 책입니다. 성불하세요.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자주 만나 괴롭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기 전, 먼저 책을 읽은 분들의 서평을 읽었습니다. 일단 ‘텐구’라는 족속에 대해 설명해주신 친절한 분이 있어 반가웠고, 또한 유쾌한 소설이라는 평들이 대부분이어서 기분 좋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일본 판타지 소설은 사실 그리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는 몇 편 즐겁게 본 기억이 있지만, 책으로는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뭐 예전에 읽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일본은 너구리를 매우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 등에서 너구리가 등장하는 것을 자주 본 것 같습니다. 뭐 생김새도 그리 무섭지 않고 오동통한 것이 귀엽기는 합니다. 정말 둔갑술에 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책은 위대한 너구리 시모가모 소이치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남겨진 4형제는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받기에는 조금 많이 부족한 너구리들입니다. 특히 주인공 3남 시모가모 야사부로는 ‘일단 인생은 즐거워야 한다’는 철학으로 잘 노는 것 외에는 그다지 특기가 없는 너구리입니다. 뭐 귀엽기는 하지만 말이죠.

 

이들은 귀공자 청년으로 둔갑하고 당구를 즐기는 멋쟁이 어머니와 함께 힘을 모아 가문의 숙적인 에비스가와 집안과 명예를 건 한판 대결을 펼칩니다. 약간은 무천도사 필이 나는 텐구 사부 아카다마 선생과 원래 인간이었으나 아카다마 선생의 납치로 반텐구가 된 절세미녀 벤텐. 이들과의 흥미진진한 모험 속에 너구리들의 유쾌한 전쟁이 시작됩니다.

 

위대한 시모가모의 형제들은 그러나 모두들 어설프기 그지없습니다. 장남 야이치로는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결정적 순간에 약합니다. 둘째 야지로는 아버지의 죽음 뒤에 너구리를 포기하고, 개구리가 되어 우물에 칩거합니다. 인생무상을 느낀 너구리죠.

 

셋째 주인공은 설명드렸고, 막내 야시로는 아직 철부지에다 특히 겁이 많아 조금만 놀라도 꼬리를 드러내고 맙니다. 아카다마 선생은 야시로에게 덕담으로 “야시로, 넌 일단 어서 자라거라”말하죠. 그리고 야사부로와 약혼을 할 예정이었으나 취소된 에비스가와 집안의 독녀 가이세이. 그녀는 위급한 상황 마다 시모가모 집안을 돕습니다.

 

아, 에비스가와 집안의 덜 떨어진 형제 금각, 은각이 있습니다. 언제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사자성어를 가슴에 달고 다니죠. 항상 큰 형인 야이치로에게 엉덩이를 물려 도망가곤 합니다. 나중엔 쇠로 된 팬티를 입어 천재성을 발휘하지만 화장실엘 못가 변비 증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심각한 멍청이들입니다.

 

일본 교토 지방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한 관계로 지명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할 때면 조금 집중력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유쾌한 소설임엔 틀림없습니다. 유머와 위트 속에 가끔 정색하며 심각한 얘기를 늘어놓기도 하는데, 이는 읽은 이들의 각각의 경험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이 세상과 작별하면서 우리 아버지는 위대한 그 피를 정확하게 넷으로 나누어 주었다. 큰형은 책임감만 이어받았고, 작은형은 느긋한 성격만 물려받았으며, 동생은 순진함만 물려받았다. 그리고 나는 바보스러움만. 완전히 제각각인 형제를 이어주는 것은 바다보다 깊은 어머니의 사랑과 위대한 아버지와의 작별이다. 위대한 이별 하나가 남은 이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일도 있다.

 

제가 이 문장에서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위대한 바보와의 이별로 남은 이들이 하나가 되는 경험. 전 감히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너구리 세계에는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너구리도 있고 너는 또 고지식한 편이니 다툴 일도 많을 거다. 하지만 한 마리의 적을 만들 때는 친구 한 마리를 만들어야 해. 다섯 마리의 적을 만들 때는 친구를 다섯 마리 만들어야 하지. 그렇게 적을 만들어 언젠가 너구리 세계의 반을 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네 곁을 보렴. 네겐 동생이 셋 있다. 이건 아주 마음 든든한 거야. 그게 네 비장의 카드가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거다. 내가 늘 아쉽게 생각하는 건 그 비장의 카드를 나는 갖지 못했다는 거야. 난 동생을 믿지 않고 동생도 나를 믿지 않았지. 우리 형제가 서로 다투는 사이가 된 것은 그 때문이야. 피를 나눈 형제가 적이 되었을 때, 그때는 최대의 적이 된다. 그러니 너희들은 늘 서로 믿어야만 해. 형제간의 우애! 잊어서는 안 된다. 형제간의 우애! 어쨌든 너희들에겐 모두 같은 ‘바보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바보라서 숭고해진다. 우리는 그것을 긍지로 삼는다. 춤추는 바보로 보이는 바보. 같은 바보라도 춤추는 바보가 낫다고 한다. 그렇다면 멋지게 춤추면 된다. …아무리 눈물이 고여도, 그래도 또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세가 우리 형제의 진면목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바보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고 있는 너구리.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제대로 살아가는 것임을 아는 바보들. 그런 바보들이 많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처럼, 온갖 더러움과 상처가 흐르는,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그야말로 바보 같은 생각을 해봅니다.

 

남을 즐겁게 해주고, 또 자신 또한 즐거울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말 하기 어려운 ‘바보짓’이 아닐까요. 그런 바보들이 참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때문에 너구리들의 유쾌발랄한 모험기는 저에게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을 전해줍니다.

 

일본 판타지에 대해 일정한 선입견이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유쾌한 너구리들의 반란에 조금은 그 생각들이 줄어들 수도 있을 듯합니다. 세상을 즐겁게 만드는 바보 너구리들의 이야기.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교토를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을 찾는 아이 데이비드
안네 올름 지음, 이인숙 옮김 / 동산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정신연령이 원래 낮은 탓인지, 청소년을 위한 도서들도 감명 깊게 읽곤 합니다. 어떤 때에는 일반 서적보다 더욱 울림을 주기도 하죠. 요즘 청소년 도서를 만드는 분들의 수준이 워낙 높아서 그런지, 아님 요즘 청소년들의 수준이 높은 것인지, 암튼 전 아무 무리 없이 청소년 책들을 읽습니다.

 

《데이비드》는 그런 면에서 역시 아무런 충돌 없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읽기에 더없이 편했고, 페이지도 술술 넘길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세상이 어떤 것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아이 데이비드. 데이비드는 수용소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수용소가 그에겐 유일한 세상이었던 것이죠. 그곳에서 그는 자연스레 살아남는 법들을 배웠고, 말하는 법, 생각하는 법, 타인을 대하는 법들을 배워나갔습니다

 

항상 〈그들〉에게 감사당하는 삶, 조그만 자유도 용납되지 않는 수용소에서 그는 10살이 넘도록 갇혀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에는 대화도 나누지 않았던 〈그〉가 탈출을 권유합니다. 탈출을 위한 준비를 미리 해 놓은 〈그〉는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를 거쳐 덴마크로 가라고 말합니다.

 

데이비드는 이탈리아가 어디에 있는 곳인지, 덴마크엔 왕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지 등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탈출합니다. 어차피 죽어도 그만이라는, 어린 아이에겐 좀처럼 볼 수 없는 ‘체념의 마음’이 이미 데이비드에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탈출에 성공합니다. 생전 처음 맛보는 자유. 데이비드는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김을 느낍니다. 살고 싶다, 자유를 계속 누리고 싶다. 사실 그가 바란 자유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이끌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자유를 찾아 멀고 먼 여정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덴마크까지 갈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는 착한 아이입니다.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타인을 기쁘게 하고,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진정 사람 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어린 소년의 마음은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추지 못한 그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닌데, 다만 이익이라는 것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생명을 앗아가는 세상. 돈이라는, 권력이라는 헛된 것들로 인해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세상. 우리는 사실 그런 세상에서 살아간 지 얼마나 오래 되었나요.

 

데이비드는 타인의 물건에 욕심을 내거나, 타인을 괴롭히는 행위가 결코 옳은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아주 단순히. 저는 데이비드의 그 단순한 행위가 사실 얼마나 숭고하고 어려운 일인지 느끼게 됩니다.

 

오직 나만, 내 가족만, 내 주위 사람들만 생각하는 이기주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런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나만 잘 되면 이 사회가, 이 세상이, 이웃들 모두가 고통에 빠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요. 그건 절대 아니겠죠.

 

데이비드와 같이 어쩌면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 그것이 바로 천국이고 극락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울한 뉴스들이 이어지는 지금, 남북이 또 다시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려는 지금. 상식을 갖추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든 지금입니다. 이번 사건으로 숨져간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빕니다. 전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보스를 찾지 않는다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6
오타비오 카펠라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들녘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대부》. 내 인생 최고의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Top10 안에 넣는 작품이다. 말론 브란도의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연기와 알 파치노, 제임스 칸,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배우들의 명연기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영화.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대부는 이른 바 ‘마피아’에 대한 동경과 공포를 동시에 주었다. 깊은 고뇌에 찬 대부, 그리고 피를 부르는 복수와 패밀리의 끈끈한 정. 범죄조직을 미화한다는 ‘판에 박힌’ 비판 속에서도 대부는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 마피아들의 세계가 과연 이런 것일까, 상상하곤 했다. 예전 홍콩 영화에 빠지며, 홍콩 뒷거리를 주름잡는 폭력조직에 대해 동경을 품었던 것과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 오해하면 안 되겠다.

 

《아무도 보스를 찾지 않는다》는 마피아도 결국 인간이고, 또 가족이라는 구성원들 속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이야기한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게 말이다. 잔인한 살인과 보복이 판치는 암흑가지만, 조직을 이어가야 할‘어리바리’손자나 조카가 영 미덥지 않은 것은 보스도 어쩔 수 없다. 하나하나 챙겨주고 가르쳐줄 수밖에. 물론 젊은 세대들 역시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삼촌이 영 귀찮다. 그저 술과 여자면 행복한데 뭔 조직이냔 말이다.

 

저자는 매우 새로운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당최 정신이 없긴 하지만,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며 독자를 바쁘게 만든다. 아울러 재치 있고, 기발한 문장들이 읽는 맛을 더해준다. 저자는 기존 소설이란 문학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뭐 소원 성취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독특하긴 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돈, 권력을 손에 쥔 마피아계의 입지전적 보스‘돈 루 쉬오르티노’. 그는 할리우드에 몰려드는 돈을 이용해 돈 세탁을 성공적으로 해 나간다. 영화사를 하나 차려 거기에 손자를 사장으로 앉힌 다음, 영화의 인기에 상관없이 ‘합법적인 돈’을 거둬들인 것이다.

 

하지만, 원인 모를 테러가 발생해 많은 이들이 죽자, 돈 루는 손자를 급히 이탈리아로 피신시킨다. 그곳의 지역 보스 살 스칼리에게 손자를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살 스칼리는 오히려 손자를 자신들의 영역 싸움에 이용하고 만다. 이에 꼭지가 돌아간 돈 루는 직접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오른다. 자신의 심복이자 전설의 ‘협죽도’킬러 핍피노와 함께…. 자 이제 시칠리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두둥~!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우르르 등장하고, 또 사라진다. 책을 읽다가 다시 앞장으로 돌아가 ‘등장인물 소개’를 몇 번이나 본 다음 돌아갔다는 고백을 한다. 하지만 그게 책을 읽는데 그리 큰 불편을 준 것은 아니었다는 점 또한 밝힌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장면 장면이 그대로 ‘씬’이 되고, 등장인물의 이야기 모두가 대사다. 할리우드에서 조금 잘 나가는 배우들을 캐스팅해 영화로 만들어도, 뭐 중박 정도는 치지 않을까 싶다.

 

재미있는, 하지만 조금은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종종 나와 더 반가웠다. 그냥 웃고 지나가기엔 조금 아쉬운 이야기들 말이다. 어쩌면 지금과 같은 비열하고 저열하고, 돈과 권력에 영혼을 팔아버린 ‘쓰레기’들이 설치는 세상에서, 나름의 정도를 지키고, 신사적으로 행동하려 애쓰는 돈 루와 같은 마피아들이 차라리 더 정이 간다고 하면, 이것도 구속감일까?

 

“젠장, 그래도 왕이 있었을 때는 총을 겨눌 대상이 확실했어. 근데 지금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어디 자네가 한번 얘기해봐.”

그가 코지모에게 눈짓을 주었다. 하지만 코지모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정치인이 처신을 제대로 못하면 선거 때 안 찍어주면 돼. 그것밖에 할 게 없어.”

밈모 삼촌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봤자 그놈은 콧방귀도 안 뀌어. 당을 바꿔버리면 그만이거든. 그렇더라도 총 맞을 일은 없으니까. 젠장, 그게 민주주의라는 거야.”

코지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요즘 정치인들은 토끼보다 더 잽싸다니까.”

 

여러분들은 모르겠다. 그런데 난 이 장면에서 키득키득 거렸다. 토끼보다 날쌘 인간들 보신 분들 손 한 번 들어보시라. 손이 부족하면 발까지 들어보시라. 공중부양이 안 되는 게 안타까울 것이다.

 

언젠가 암흑가를 배경으로 그야말로 가슴 시원한 소설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엉터리가 되겠지만, 적어도 그것 하나는 약속한다. 읽은 이들은 아마 속이 아주 아주 후련할 것이다. 왜냐고? 적어도 내 소설에서는 우측통행을 강요하지도, 자율적 2부제를 강요하지도,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검문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소설에서는 국민을 ‘성숙한 시민의식’ 들먹이며 노예처럼 다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 벽보에 그림 그렸다고 구속영장 신청하는 개념 상실의 공권력도 내 소설엔 없다.

 

어떤가. 좋지 아니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왜 기다리는 걸까? 왜 기차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복도에 서서 기다릴까? 아마 우리가 기다림만큼 고통스럽게 배운 건 없기 때문일 테지. 유치원과 학교 입학 기다리기, 졸업 기다리기, 은퇴 기다리기, 그리고 어쩌면 기다림조차 기다리기. 병원에 약간 일찍 도착해서 그 앞을 오가며 기다리기, 이 기다림이 끝나면 대기실에서 또 기다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림의 기다림을 기다리기.

 

무슨 일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할까? 효율성이라는 괴물이 없다면, 모두 쓸데없는 일일까? 그렇다면 과연 쓸모 있는 일은 무엇일까? 돈이 되는 일?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일? 아니면 땅 파고 삽질하고, 강을 뒤집는 일?

 

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은 ‘넉넉함’과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규격화’된 그 무엇이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말한다. 때문에 그의 글을 소소하지만, 따뜻하고 위안이다.

 

기다림과 의례. 우리가 점점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기다림에 익숙해졌기에, 기다림을 ‘기다린다’는 것을 모른다. 언제나 정확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안절부절한다. 시간이 우리를 지배한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의미 있는 일만 해야 한다면 인생은 얼마나 피곤할까.

 

또한 우리는 의례를 잃어가고 있다. 전통이라는 이름이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가 되고, 소중한 기억들이 쓸모없는 행동으로 전락한다. 저자는 의례가 의미 없어 보이는 일에 정성을 다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참여하는’ 의식이라 생각한다. 의례라는 형식 안에 담겨 있는 삶의 열정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점점 의례는 필요 없는 것들 중 하나로 치부되고 있다.

 

의례가 필요한 곳은 공동사회뿐인데, 이 공동사회는 이제 사적으로 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모두는 게토에 살게 된다. 호화스러울 때도 있긴 하지만, 탈의례화한 게토에.

 

저자는 관찰이 아닌 그저 ‘바라본다’고 말한다. 성급하게 관찰하고 결론을 짓기 보다는 그저 바라봄으로서 단순함 속에 본질을 찾는다. 이는 넉넉함을 상실한 이 시대에서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지만, 매우 소중한 일이기도 하다.

 

단순하고 짤막한 문장 속에 튀어 오르는 깨달음은 놀랍고 반갑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우리는 무질서만이 아니라 아마 질서 때문에 환경을 훨씬 더 많이 파괴할 것이다. 우리 마음에 들어야 할 뿐 환경의 동의는 얻지 않는 질서 때문에.”

4대 공사나 기타 등등이 ‘질서적인’ 재앙들이 떠오르는 것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니니라.

 

이해하기보다 ‘듣기’를 소중히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세상은 조금은 더 정돈되고 차분해질지 모른다.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멋지기 때문이다. 이해가 때로는 공격과 반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 저자는 이미 알고 있다.

 

글에는 따스함이 담겨있다. 거창한 명분이나 이상보다는 다만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이 있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함 속에 자질구레한 인간들이 존재함을 조용히 상기시킨다. 작은 소속감을 사랑하지만, 그 어떤 배타성에도 반대하는. 그는 더불어 살 줄 아는 아주 ‘희귀한’ 인간 중 하나다.

 

인사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인식했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소속감을 서로 표현하는 상징의 하나다. 인사를 받고 인사를 안다는 것은 우울한 날에 약간의 온기를 가져다주는 행위다. 자동차를 몰고 가는 사람은 이런 기회가 없다. 인사는 보행자의 특권이다.

 

저자는 권력, 국수주의에 반대한다. 단호히 거부한다. 축구와 같은 국가 대항 스포츠 경기에서 나타나는 ‘광적인’ 분위기는 자칫 상대에 대한 무차별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것들을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로 몰아가는 행태에 대해 저자는 ‘빌어먹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따위 국수주의에 매몰된 국가라면, 민족이라면 ‘탈퇴’하겠다고 말한다. 2002월드컵으로 시작된 우리의 살벌한 민족주의, 혹은 이상야릇한 애국심을 보았을 때, 우리 역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G20과 같은 쓸데없는 짓거리에 국민들을 동원하고 겁주는 정부의 형태 역시 똑바로 봐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권력에 순응하고, 그 권력에게 관심을 받게 된 이들은 자신들 역시 권력의 주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으로 타인을 구속하고 괴롭혀도 된다고 합리화한다. 이런 빌어먹을 발상들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정부와 국가라는 괴물이 만들어낸 손쉬운 무기이기도 하다. 권력에 굴복하고 기생하는 것은 ‘융화’가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바쁘게 살아간다. 안 그러면 죽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 왜 사는 지를 잊는다. 먹기 위해 왜 먹는지 잊는다. 살기 위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잊는다. 그리곤 왜 살았는지도 모른 채 죽는 것을 기다린다.

 

때로 빨대 크기만이라도 숨 쉴 구멍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말’ 살 수 있다. 똑바로 살 수 있다는 말이다. G20이 어서 끝나버렸으면 하는 바람이 자신의 ‘생각’이라면 정당하다. 그 다음 또 아시안게임으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려는 수작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 거부감이 진실이다.

 

소소한 행복조차 허용하지 않는 사회, 오직 효율성과 이윤만을 미친개처럼 거품 물어가며 떠드는 사회는 단언컨대, 살만한 곳이 아니다. 저자의 조용하지만 묵직한 울림은 때문에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또 다른 고민을 던져준다.

 

넌 도대체 뭣 때문에 이리 바쁘게, 생각 없이 사느냐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