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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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기다리는 걸까? 왜 기차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복도에 서서 기다릴까? 아마 우리가 기다림만큼 고통스럽게 배운 건 없기 때문일 테지. 유치원과 학교 입학 기다리기, 졸업 기다리기, 은퇴 기다리기, 그리고 어쩌면 기다림조차 기다리기. 병원에 약간 일찍 도착해서 그 앞을 오가며 기다리기, 이 기다림이 끝나면 대기실에서 또 기다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림의 기다림을 기다리기.

 

무슨 일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할까? 효율성이라는 괴물이 없다면, 모두 쓸데없는 일일까? 그렇다면 과연 쓸모 있는 일은 무엇일까? 돈이 되는 일?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일? 아니면 땅 파고 삽질하고, 강을 뒤집는 일?

 

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은 ‘넉넉함’과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규격화’된 그 무엇이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말한다. 때문에 그의 글을 소소하지만, 따뜻하고 위안이다.

 

기다림과 의례. 우리가 점점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기다림에 익숙해졌기에, 기다림을 ‘기다린다’는 것을 모른다. 언제나 정확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안절부절한다. 시간이 우리를 지배한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의미 있는 일만 해야 한다면 인생은 얼마나 피곤할까.

 

또한 우리는 의례를 잃어가고 있다. 전통이라는 이름이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가 되고, 소중한 기억들이 쓸모없는 행동으로 전락한다. 저자는 의례가 의미 없어 보이는 일에 정성을 다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참여하는’ 의식이라 생각한다. 의례라는 형식 안에 담겨 있는 삶의 열정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점점 의례는 필요 없는 것들 중 하나로 치부되고 있다.

 

의례가 필요한 곳은 공동사회뿐인데, 이 공동사회는 이제 사적으로 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모두는 게토에 살게 된다. 호화스러울 때도 있긴 하지만, 탈의례화한 게토에.

 

저자는 관찰이 아닌 그저 ‘바라본다’고 말한다. 성급하게 관찰하고 결론을 짓기 보다는 그저 바라봄으로서 단순함 속에 본질을 찾는다. 이는 넉넉함을 상실한 이 시대에서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지만, 매우 소중한 일이기도 하다.

 

단순하고 짤막한 문장 속에 튀어 오르는 깨달음은 놀랍고 반갑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우리는 무질서만이 아니라 아마 질서 때문에 환경을 훨씬 더 많이 파괴할 것이다. 우리 마음에 들어야 할 뿐 환경의 동의는 얻지 않는 질서 때문에.”

4대 공사나 기타 등등이 ‘질서적인’ 재앙들이 떠오르는 것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니니라.

 

이해하기보다 ‘듣기’를 소중히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세상은 조금은 더 정돈되고 차분해질지 모른다.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멋지기 때문이다. 이해가 때로는 공격과 반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 저자는 이미 알고 있다.

 

글에는 따스함이 담겨있다. 거창한 명분이나 이상보다는 다만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이 있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함 속에 자질구레한 인간들이 존재함을 조용히 상기시킨다. 작은 소속감을 사랑하지만, 그 어떤 배타성에도 반대하는. 그는 더불어 살 줄 아는 아주 ‘희귀한’ 인간 중 하나다.

 

인사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인식했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소속감을 서로 표현하는 상징의 하나다. 인사를 받고 인사를 안다는 것은 우울한 날에 약간의 온기를 가져다주는 행위다. 자동차를 몰고 가는 사람은 이런 기회가 없다. 인사는 보행자의 특권이다.

 

저자는 권력, 국수주의에 반대한다. 단호히 거부한다. 축구와 같은 국가 대항 스포츠 경기에서 나타나는 ‘광적인’ 분위기는 자칫 상대에 대한 무차별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것들을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로 몰아가는 행태에 대해 저자는 ‘빌어먹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 따위 국수주의에 매몰된 국가라면, 민족이라면 ‘탈퇴’하겠다고 말한다. 2002월드컵으로 시작된 우리의 살벌한 민족주의, 혹은 이상야릇한 애국심을 보았을 때, 우리 역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G20과 같은 쓸데없는 짓거리에 국민들을 동원하고 겁주는 정부의 형태 역시 똑바로 봐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권력에 순응하고, 그 권력에게 관심을 받게 된 이들은 자신들 역시 권력의 주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으로 타인을 구속하고 괴롭혀도 된다고 합리화한다. 이런 빌어먹을 발상들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정부와 국가라는 괴물이 만들어낸 손쉬운 무기이기도 하다. 권력에 굴복하고 기생하는 것은 ‘융화’가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바쁘게 살아간다. 안 그러면 죽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 왜 사는 지를 잊는다. 먹기 위해 왜 먹는지 잊는다. 살기 위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잊는다. 그리곤 왜 살았는지도 모른 채 죽는 것을 기다린다.

 

때로 빨대 크기만이라도 숨 쉴 구멍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말’ 살 수 있다. 똑바로 살 수 있다는 말이다. G20이 어서 끝나버렸으면 하는 바람이 자신의 ‘생각’이라면 정당하다. 그 다음 또 아시안게임으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려는 수작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 거부감이 진실이다.

 

소소한 행복조차 허용하지 않는 사회, 오직 효율성과 이윤만을 미친개처럼 거품 물어가며 떠드는 사회는 단언컨대, 살만한 곳이 아니다. 저자의 조용하지만 묵직한 울림은 때문에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또 다른 고민을 던져준다.

 

넌 도대체 뭣 때문에 이리 바쁘게, 생각 없이 사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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