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부유한데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 동아시아 행복도상국의 국민이 살아남는 법
메자키 마사아키 지음, 신창훈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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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행복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물질과 권력으로 이 세상 모든 행복을 온전히 설명하려 하는 이들이 이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행복은 그들에게 점령되지 않았다. 어쩜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저마다 행복의 기준과 크기와 실체가 다르기에, 일방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난 불행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이들은 없다. 심지어 바라는 행복이 어떤 행복인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오래전부터 끊임없이라고 말하면 사기겠지만, 국가의 존재 이유, 필요성에 대해 늘 고민해 온 것 같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국가의 존재 이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히려 그 해악만을 절감하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오늘은 그 자체로 재앙처럼 보인다. 평소 늘 그 필력에 감탄해왔던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주간의 최근 칼럼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남북관계 진전이 거의 없던 상황에서 광복 70주년을 나홀로 축하하던 민망함은 그렇다 치더라도, 당최 밑도 끝도 없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코스프레와 심지어 역사에까지 이르는 억압, 강요는 그리 애국심이 없는 나에겐 심한 혐오감과 함께 구토를 유발케 했기에 더욱 그렇다. 이대근 논설주간은 우리가 이렇게 살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정부 신뢰도는 인도네시아, 에스토니아가 한국보다 높다. 사법부 신뢰도 역시 멕시코가 높고, 콜롬비아와는 비슷하다. 남녀 임금차는 네팔보다 크다. 노인이 살기 좋은 나라 순위는 스리랑카, 필리핀이 더 앞선다. 지난달 경제협력개발기구가 발표한 삶의 질은 칠레, 멕시코가 더 높다. 필요시 도움 구할 친지가 있다고 응답한 한국인의 비율은 36개국 중 꼴찌다. 공동체가 무너진 것이다. 이제 믿을 건 가족뿐이다. 그런데 가족이라고 온전할 리 없다. 하루 중 아빠가 자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3, 21개국 중 21위다. 이 모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적 승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를 위한 승리인가?”

 

굳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국가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다. 국가를 이루는, 국가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구성원들의 행복과 안정이다. 그것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국가는 이미 국가라 부를 수 없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우리는, 대한민국은 과연 온전한 국가인가? 우리들은 진정 행복한가?

 

이제 연예인들만 그것도 특히 노래 부를 때만 허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복면 때문에, 졸지에 이슬람국가(ISIS)와 동급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국민들. 사실 ISIS 역시 이라크와 시리아가 온전한 국가의 기능을 상실했기에 존재하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과연 ISIS인가? 아님 그만도 못한가.

 

저자는 한때 세계적인 국제금융투자회사인 메릴린치에서 근무하며, 사내 가장 큰 금액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자본의 추악한 욕망으로 들끓는 그곳에서 그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지, 무엇이 인간을 온전히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10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세계 100여 국을 여행하며 그가 품었던 생각은, 단순한 경제적 조건 만으로는 행복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한 나라가 진정한 강국, 선진국으로 불릴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그 나라의 구성원인 시민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런 면에서 일본과 한국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짧은 시간 동안 높은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정작 구성원들은 불행한 나라. 불행한 일본인의 이야기는 그렇게 온전히 한국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자살률이 낮다 하더라도 그 국가의 행복지수가 반드시 높은 것은 아니다. 또한 출산율이 높다고 행복한 나라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전 세계 여러 국가들을 직접 찾아가며 또한 여러 통계자료로 확인한 사실이 있다. 자살률이 높고 출산율이 낮은 나라 중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딱 지금의 대한민국과 일본의 모습이다.

 

다시 이대근 논설주간의 글을 살펴보자. 그는 한국 사회 자체가 대량살상무기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미국인 총기사망자는 12563, 한국인 자살자는 13836명이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미국은 국가보다 개인의 자유를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2살짜리 아기가 엄마의 핸드백 속에 있는 권총을 무심코 꺼내 방아쇠를 당겨 엄마를 숨지게 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인가. 미국은 자신들의 가치를 위해, 즉 개인적 합리성을 위해 총기사고의 일상화라는 집단적 피해를 감수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키려는 가치는 무엇인가. 미국은 타인을 죽이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 그럴만한 가치가 우리에겐 있는가.

 

더 이상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자신의 아이를 낳기 두려운 사회, 매일 40여 명이 스스로 삶의 끈을 놓는 사회. 과연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파국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국가는 존재의 이유가 있을까.

 

저자는 다양한 국가와 민족의 행복 지수를 살펴보며, 행복은 사회적 관대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개인의 선택에 대한 사회의 존중, 그리고 개인의 요구와 의견을 적극 받아들이고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이러한 환경을 갖춘 국가의 시민들은 그렇지 않은 국가의 시민보다 확실히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더욱 불행하고 우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전히 기형적 집단주의와 획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역사책을 국정화하겠다는 정부 앞에서 사회적 관대함, 다양성 존중은 무색하고 무참하다.

 

오로지 국민을 동원하고 이용하고 소모하는 국가, 그리고 시민의 선택이 존중받고 나아가 실현될 수 있는 국가. 어느 국가의 구성원이 더 행복할지는 자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랑스러운 광복 70년을 맞은 지금에도 전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죽어라 일만 하고, 국가의 영광과 발전을 위해 내 한 몸 바치다가, 늙고 병들어 더 이상 활용 가치가 없어지는 상황에 몰리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사회. 산업화의 역군으로 자랑스러워하던 이들이 이제 노령층이 되어, 우리 사회의 잉여로 취급받는 모습. 우리는 분명 행복하지 않다.

 

저자는 개인의 요구와 사회의 이익을 아우를 수 있는 사회개인주의를 주장한다. 돈으로 그 어떤 기적도 창출할 수 있는 미친 자본주의 사회도, 개인을 억압하고 국가와 집단 속에 매몰시키는 집단주의 체제도 행복을 전해줄 순 없다. 개인이 행복하고, 행복한 개인들이 모여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극히 당연한 논리. 우리는 그 당연함을 위해 얼마나 더 많이 죽어야만 할까.

 

대한민국의 위대한 발전과 영광보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구성원들의 행복이다. 한반도 구성원이 행복해야 한반도가 비로소 제 위치에 놓일 수 있다. 저자의 이야기는 다시 한 번 행복이란 무엇인지, 국가란 왜 필요한지 고민케 한다.

 

, 그리고, 대한민국은 부유하지도 않다. 그래서 더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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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 거리의 인문학자 최준영 에세이
최준영 지음 / 이지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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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듯, 글 역시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발간된 뒤에는 바꾸기 힘들다. 특히 지금처럼 활자가 온라인을 통해 짧은 시간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때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매우 어렵고 두려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글이 갖는 위력은 여전한데, 적지 않은 이들이 이러한 양날의 칼을 마구 휘두른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다치고 때론 생명마저 잃는다.

 

특정인의 의지에 따라, 또는 특정 정부의 입맛에 따라 한 국가의 역사가 재단되는 것이 심히 위험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역사책을 바꾼다고 해도, 역사 그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획일화된 역사책으로 역사를 상상해야 하는 아이들은 정신적 빈곤함과 더불어 무오류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클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향한 글에서는 심한 악취가 나곤 했다. 위를 향한 끝없는 찬양과 굴종은, 당대에 그 글을 쓴 이에겐 부와 명예로 화답했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악취와 병폐는 더욱 커지게 된다. 어찌 보면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불변의 진리이다.

 

하지만 그 반대는 어떠한가. 힘없는 자, 나약한 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행복은커녕 삶의 정상적 유지조차 힘든 이들을 향한 따뜻한 글에는 언제나 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 어떤 권력과 부귀 앞에서도 주눅들 수 없는 힘. 글은 분명 그처럼 아름답고 고귀하게 역할 할 수도 있다.

 

거리의 인문학자, 거지 교수로도 잘 알려진 저자는, 낮은 곳에서 인문학을 매개로 오랫동안 이웃들과 소통해 온 사람이다. 교도소 수감자, 미혼모, 노숙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긴 시간 이어왔고, 노숙자를 위한 잡지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스스로 거창한 학벌이나 지연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이였기에, 힘없는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낮출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들과 같은 시선으로 인문학을 이야기했고, 삶을 나누었다.

 

책은 그가 매일 매일 거의 빠뜨리지 않고, 페이스북에 올린 짧은 글들을 모았다. 그는 스스로 글을 잘 쓰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쉬지 않고 꾸준히 글을 쓰는 이유라고 말한다. 아무리 당시에는 제법 잘 썼다고 느낀 글이라도 다음 날 다시 보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댓글을 이미 달아, 차마 삭제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가 택한 방법은 다른 글을 다시 올려 옛글이 화면 아래로 내려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꾸준히 글을 써왔다.

 

하지만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고백하는 글이 아닌가. 온갖 미사여구로 꾸며진 글보다는 담백하고 솔직하게 생각의 끈을 이어가고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좋은 글 아니던가. 권정생 선생의 글에서, 이오덕 선생의 글에서 그 어떤 화장과 과장과 겉치레를 찾아볼 수 있는가.

 

그런 눈으로 본다면 저자의 글은 썩 훌륭하다. 적어도 가식이나 겉치레가 없다. 또한 위를 향한 구차하고 눈꼴 시린 찬양 따위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내 이웃과, 힘들어하는 이들을 향한 끈끈한 사랑이 따뜻하다. 그런 글이기에, 거북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반갑고, 살뜰하다.

 

특히 별 것 아닌데도, 가슴을 때리는 글들이 적지 않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이다. 미안한 걸 미안해할 줄 알고, 부끄러운 걸 부끄러워할 줄 알고, 잘못한 일을 반성할 줄 알고, 표피 너머의 심연을 성찰하려는 자세를 가지려 노력한다면 실수나 무지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삶이란 무지를 헤쳐 나가는 끝없는 배움의 과정이고 실수를 되풀이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본질을 외면하면서 수단에만 매달린다든지, 정작 소중한 사람에겐 소홀히 하면서 입만 열면 사람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며 저자가 느낀 심정이다. 저자는 후배나 제자들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강사 수입에 신음하고 있는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도움은커녕 지지 발언 한마디 하지 않는 교수들이 밖에 나가서는 진보 인사로 불리며 노동을 부르짖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꼬집는다.

 

어찌 그것만일까. 미안한 짓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일,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도 반성은커녕 오히려 당당한, 그런 후안무치한 이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자라 외치며 그야말로 꼴값을 떨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기억한다. 노무현이 스러진 이후, 그와의 인연을 들먹이며 부귀와 명예를 얻으려 했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그리고 지금 다시 한 번 바라본다. 정치인 김영삼의 마지막마저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영악한 이들의 뻔뻔함을.

 

저자는 실의에 빠지고 삶의 무게에 스러지려 할 때, 오직 글의 힘으로, 문학을 버팀목 삼아, 인문학을 동아줄 삼아 끝내 살아낸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글이 가진 놀라운 힘과 치유력을 이웃들과 나누고자 한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이들은 뻔뻔하고, 순하디 순한, 한없이 어여쁜 이들이 자신의 무력함과 시대의 몰염치에 부끄러워하고,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이웃의 고통에 눈물 흘리고, 이웃의 상처에 자신도 생채기를 입는다. 염치가 사라진 시대, 남은 것은 평범한 이들의 용기와 위로, 연대와 공감뿐이다. 하지만 이 얼마나 위대한 소박함인가.

 

타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성실함으로 만들어진 책 한 권은, 소통의 글쓰기가 가진 적지 않은 힘과 위로를 전해준다. 도무지 정들기 힘든 세상, 도무지 기대기 두려운 세상, 도무지 눈물이 서러운 세상.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함께 울고 웃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른 바 기존 지식인 사회에서,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거리의 인문학자, 거지 교수 최준영이 전해주는 따뜻한 소통의 인문학, 그리고 소통의 글쓰기. 이는 이 벅찬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허기짐을 잠시나마 달래줄 수 있는 소중한 차 한 잔과 같다. 그는 적어도 수많은 우리 이웃들에게는 당당히 인정받은 인문학자 이자 교수이다.

 

그의 치열한 책 읽기 역시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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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소년에게 - 2.0세대를 위한 기성세대의 진실한 고백 대한민국 청소년에게 1
강신주 외 지음 / 바이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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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5000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밝혀진 이집트의 토편 문서를 보면 주로 국가의 법령과 왕의 칙령 같은 글들이 적혀 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흙벽돌 문서 중에는 일상생활의 소소한 글들도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글들이다.

 

요즘 젊은 것들이란, 도무지 버릇이 없어서…….”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대 차이라는 것은 늘 있어왔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젊은이들은 늘 버릇이 없고, 그 윗세대는 자신들의 젊은 시절은 기억조차 않고, 개구리마냥 올챙이들의 천방지축을 한탄한다.

 

단군 이래 역대 최고의 스펙이란, 도무지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 대한 평가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오직 좋은 대학엘 가겠다는 집념 하나로, 그 후에는 좋은 직장을 얻어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만 똘똘 뭉쳐있다는,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나 개인의 철학 혹은 역사적 인식은 태부족하다는 비판.

 

생각해보면 우습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젊은이들을, 그런 구도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 안으로 몰아넣고 이른바 사육을 해온 집단들이, 정작 자신들의 의도대로 이뤄지자, 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성공이다!”라고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보다 항상은 아니겠지만, 많은 경우 보다 현명하고 또한 용감하다. 때론 지혜롭기까지 하다. 그것을 경이롭다거나 기적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미 마음까지 노화된 상태라고 보면 된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은 거짓 앞에 보다 당당히 진실을 말하곤 했다.

 

책은 부제가 말해주듯 아름다운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기성세대들의 고백이자 사과이자 격려다. 20085월이었던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바로 그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고백이다.

 

하나의 촛불은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부터 시작되어 대한민국의 자주성과 연결되었고, 급기야 이명박 정권 퇴진이라는 구호까지 불러오게 되었다. 그때 등장한 교복을 입은 소녀들은 0교시 철폐와 더불어 자유롭게 상상하고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며 거리를 환하게 수놓았다. 당시 기성세대가 이들로부터 받았던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늘 그래왔지만, 여권은 물론이요, 야권마저 이들의 촛불을 감히 따라가지 못했다. 기존 시민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역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한 국가의 역사를 일개 가족사로 만들고 싶어 하는 지도자와, 그를 보필하는 환관세력, ‘묻지마지지로 스스로의 존엄을 시궁창에 던져 버리는 가여운 이들과 눈먼 앵무새마냥 오직 무조건 대통령의 생각이 옳다를 중얼거리는 언론까지. 이 구역질도 아까운 시대에, 바른 말을 던지고 바른 행동을 하는 젊은이들은 거리로 나왔고, 또한 당당하게 자신의 존엄성을 증명했다.

 

학생들은 아직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주절대는 정치인들의 비루함 속에서도 젊은 학생들의 기개와 소신은 퇴색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우뚝했고, 선명했다. 정작 비굴한 것들은, 먹고 살기 위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바른 소리라고 우기는 기성세대들이었다. 역사 앞에 진정 버릇없는 것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항상 그래왔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그 아이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온갖 추악한 짓거리에 눈을 감거나 혹은 적극 동참한다. 먹고 사는 것의 숭고함, 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음에도, 오직 비루함을 숨기기 위해 다른 모든 이유와 변명을 그 안에 매몰시킨다. 비겁하다못해 처량하다.

 

책은 그나마 양심이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어른들이, 촛불을 들었던 아이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이 더러운 세상을 살아가야 할 모든 젊음에게 바치는 글이다. 그들을 향한 따뜻한 애정과 함께, 스스로 이 따위로 세상을 더럽힌 기성세대로서의 미안함이 묻어난다. 그리고 부디 지금의 젊음은, 다가올 젊음에게, 자신들이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말기를 바라고 있다. 진심이다.

 

개소리에 확성기를 가져다 댄다고 해서, 음악으로 바뀌진 않는다.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모조리 다 틀어막는다고 해서, 과거가 변할 순 없다. 추악함이 사라질 순 없다. 지금의 아이들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오직 어른이라 짓까부는 기성세대들만 모르쇠하고 있을 뿐이다.

 

책 속에 담겨진 따뜻한 어른들의 이야기들 속에, 아이들은 물론, 마음이 지쳐버린 어른들도 한번 쯤 귀기울여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적어도 비겁함과 비루함을 애써 포장하려 하지는 말자는 생각이다. 그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만 살아도 우리 생은 충분히 본전은 뽑는 것이다.

 

언젠가 이 문제가 해체되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경쟁과 공존이 병행하는, 효율과 협동이 병행하는 그런 한국이 생겨났을 때, 그리고 10대들이 비로소 지금의 교육 파시즘과 학교 파시즘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그때 우리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우리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 212p, 우석훈 <우리를, 언젠가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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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위대한 시작 - 새롭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리더의 힘
유승찬 지음 / 산호와진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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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새가 조금 우습게 되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이문을 남겼을지 모르지만, 정작 책의 주인공은 요즘 영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앞으로 정치인 문재인이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해 보인다. 아직까지는 위대함과는 거리가 있다. 개인적 지지 여부를 떠나서 말이다.

 

책은 분명 자기계발서이다. 개정판 출간 시기를 본다면, 아마도 문재인 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대선에서 승리할 것을 염두에 두고 집필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고, 이를 패배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선리더십을 강조하는 측면으로 다듬어 펴내지 않았나 싶다. 이 부분이 아쉽다. 개인적 판단으로는 경제적 계산 외에는 굳이 개정판을 낼 필요를 찾기 힘들었다.

 

물론 요즘 솔직한 심정으로 바라본다면 자질과 인격 등을 고려해볼 때 전혀 자기계발서의 주인공으로 내세울 만한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을 주인공으로 숱한 미사여구와 과장으로 포장된 리더십 관련 책들을 흔히 볼 수 있으니, 그런 면에서 문재인이라는 정치인은 그동안 나름대로 리더십을 보여줬고, 현재에도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앞으로 더 많은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그가 일생의 벗 노무현과 함께 만들어간 참여정부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고, 두 번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이 진정 국민들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었는지는 각자 선택과 평가의 몫이겠지만, 사람들의 삶이 그리 넉넉해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렇다고 참여정부가 선이었고, 지난 이명박 정부, 현 박근혜 정부가 악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애초 불가능한 작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정치인 문재인이 한 결 같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가 굳이 문재인 리더십이라고까지 명명한 만큼, 진실로 이 시대의 리더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책의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솔직히 말해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와 같은 바람은 나 역시 가지고 있다. 문재인이라는 정치인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 문재인을 지지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그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이 팍팍한 삶이 나아지는 데 더 많은 정치인들이 진실로 노력해주길 바라는 이들 역시 그럴 것이다.

 

저자의 의도이든 아니든 리더십 주제의 자기계발서의 주인공이 된 문재인. 그가 살아온 길이 스스로 당당하고 떳떳했다 자부한다 해도, 이제 이미 그는 진흙탕에 뛰어든 상황이다. 이 곳에서 연꽃을 피울 수 있느냐가 앞으로의 관건이 될 것이다. 그의 벗 노무현은 기어이 연꽃을 피웠지만, 끝내 자신도 스러지고 말았다. 안타까움과 눈물, 아쉬움과 비통함이 노무현의 마지막이었다. 그런 전철을 밟으면 안 될 것이다. 그가 여러 번 강조했듯, 노무현을 넘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도 그리고 많은 국민들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이다.

 

애초 서평을 통해 책을 적잖이 비판하려 했다. 아무리 판매가 관건인 자기계발서라지만, 아직 현재진행형인 문재인을 소재(!)로 리더십 관련 책을 펴냈다는 것이 영 마뜩잖았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문재인이라는 이름을 빌어 펼치는 빤한 상술 같았다.

 

하지만 비판을 위한 서평을 쓰기 위해서 한 번 더 책을 읽은 결과, 마음이 조금은 바뀌었다. 독자가 훌륭하면 된다는 생각! 까지는 아니지만, 읽기에 따라, 느끼기에 따라 전달되는 것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너그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 역시 내용은 확인도 하지 않고, 책 표지와 제목만 보고 덥석 책을 쟁여 놓지 않았나.

 

자기계발서의 전형을 충실히 따르던 저자는 말미에 정치인 문재인에 대한 바람과, 그가 가야 할 길에 대한 애정 어린 조언(!)을 담았다. 자기계발서가 갑자기 숙연(!)해지고, 애매해지는 순간이다. 자신이 감히 리더십’ ‘위대한등의 수식어를 헌사한 인물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사고는 저자가 쳤지만, 감당은 온전히 문재인이 해야 한다. 그는 최소한 위대하지는 못하더라도 한결같은모습으로 국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가 정치에 투신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다른 이의 말을 빌려 문재인의 없음의 힘을 꼽았다. 우리사회에서 소위 성공한 이들이 갖춘 화려한 스펙, 재력, 학벌, 가문 모두 빈약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에겐 힘이 될 수 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없기에 겸손할 수 있고, 또한 타인의 지혜와 힘을 구하려 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요즘 잘 나가는 이들에게 빈약한 겸손과 배려가 그에겐 있다는 것이다.

 

갑의 전성시대에서 분명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는 진정 국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한결같은 길을 간다면 말이다.

 

그다지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인물에 대한 아직도 남아있는 미련, 희망과 함께 부디 그가 한결같은길을 가기는 바라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덮는다. 진정으로 그가 위대한 시작을 할 수 있기를 아직도 나는 바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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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물이다 - 어느 뜻깊은 행사에서 전한 깨어 있는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생각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재희 옮김 / 나무생각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천재 문장가나 유명 연설가, 혹은 오바마와 같은 화술의 달인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단 몇 마디로, 그저 자신의 행동만으로 적지 않은 울림을 주는 이들이 존재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그 평범과 소박함 속에 놓여 있는 위대함, 명징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 혹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는 이를 만난다는 것은 분명 행운일 것이다. 온갖 거추장스러움으로 치장한 말들이 요란을 피우는 지금, 명료하고 깨끗하게 그리고 담백하게 우리를 일깨워주는 문장과 언어는 분명 축복이다.

 

과연 우리는 절망적으로만 보이는 이 세상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또한 대해야 할까. 절망 앞에서 절망하며, 극심한 회의와 혐오로 썩어버린 이 세상과 끝내 결별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양 외면하고 살아야 할까.

 

물이 괜찮은지, 아니 그보다 먼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삶의 존재를 제대로 느낄 수나 있는지, 어쩜 나는 그것부터 고민하고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길지 않은 이 강연문을 통해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정작 실체도 알 수 없는 특별함을 찾아 헤매기 보다는,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그 진부함 속에서 진정 삶의 위대함과 치열함을 찾을 수 있음을.

 

이 짧은 강연의 주인공은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고 창조적인 작가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은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이다. 끝내 자신 안의 고통과 화해하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 천재 작가. 하지만 그는 삶을 마감하기 몇 해 전,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졸업식 강연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깨어있는 삶이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우리는 자유를 누리고 살까?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의 정의에 따라 답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누리기도 하고 속박당하기도 하며, 때론 타인의 자유를 무의식 중에 침해하기도 한다. 자각을 하든 못하든 우리는 무언가를 잘 알고 있다고, 그것은 온전히 나의 이성에 따른 선택이라고 믿고 그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나는 온전히 자유로운가? 내 삶은 내 의지에 따라 이어지고 있는가? 자신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저자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인문학 본연의 목표이자 가치인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은 한낱 지식과 지성의 뽐냄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위주의 눈과 귀를 고쳐나갈 수 있는 힘, 즉 디폴트 세팅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추상적인 사고 속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단순히 내 앞에서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주위 깊게 사물을 관찰하고,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 그것이 바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 온전히 나의 생각인지, 누군가 미리 정해놓은, 누군가 미리 선택해 놓은 편한 길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며, 마치 그것이 나의 선택인양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그 질문 앞에, 그 의문 앞에서 언제나 게으르고 주저한다. 어쩜 두려운 것이다.

 

최근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온갖 유치하고 교묘한 상술이 판친다. 출판계나 방송계, 문화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인문학의 복원, 인문학의 귀환 등을 외치지만, 이는 상술과 속임수 속에 그럴 듯하게 차려진 거짓된 잔칫상은 아닐까. 저자는 인문학 교육의 진가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인으로서의 삶을 그저 편안하고 순조롭게, 그럴싸한 모습으로 죽은 사람같이 살지 않는 방법, 무의식적인 일상의 계속이 아닌 삶을 사는 방법, 또한 자기 머리의 노예, 허구한 날 독불장군처럼 유일무이하며 완벽하게 홀로 고고히 존재하는 태생적 디폴트세팅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

 

판에 박힌 직장 생활, 퇴근 후 사람들로 북적이는 마트에 들러 일용할 양식을 산다. 그 사이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 오직 나를 중심에 놓고 본다면, 모조리 다 짜증나는 족속이 아닐 수 없다. 교통체증을 유발하고, 차 안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소모하게 만드는 인간들, 마트에서 가뜩이나 피곤한데 긴 줄을 만들어 느리게 계산대를 통과해야만 하게 만드는 인간들, 예의 없고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들. 그런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나는 절대 불행 그 자체일지 모른다.

 

하지만 디폴트세팅에서 벗어나 나의 선택으로 다시 이들을 바라보면 어쩌면, 아주 어쩌면 다른 생각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지친 일상에 피로한 이들이고, 쉴 새 없이 물건들을 계산하고 돈을 받고 카드를 받고 할인 포인트를 손님에게 묻는 저 계산원들 역시 얼마나 지쳐있는가. 그들은 곧 나와 같은 이들이 아닌가. 나 역시 내 뒤에 줄 서있는 누군가들에게 걸림돌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주의를 기울여 사물을 관찰하는 법을 진실로 배웠다면, 내 생각의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저자가 졸업생들에게 말하고자 했든 것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이고, 무엇이 무의미한 일인가를 우리 자신이 자각적으로 결정하는 자유. 그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이다.

 

저자는 이어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믿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무엇을 믿고 숭배하느냐에 대한 선택권일 뿐이다.’ , 권력, 명예, 자기애 등 수많은 숭배의 대상이 있다. 이것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분명 우리의 자유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저자는 승리하고 성취하고 과시하는 행위가 주류를 이루는 위대한 바깥세상에서는 별로 언급되지 않는 자유야말로 가장 귀중한 자유라고 말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진실로 중요한 자유는 집중하고 자각하고 있는 상태, 자제심과 노력, 그리고 타인에 대하여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능력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일매일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사소하고 하찮은 대단치 않은 방법으로.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그 어떤 묘수와 비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온정과 공감, 연민과 성찰의 자세를 갖도록 노력하면 된다. 물론 어렵다. 저자의 말처럼 자각 있게, 어른스럽게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 이것은 상상도 못할 만큼 힘든 일이다. 때문에 그 어떤 거창한 철학이나 이론보다 위대한 것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직 나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동물일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이타주의적 삶을,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능성이 열려 있는 특이한 동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물속에서 살며, 물이 어떠한지, 혹은 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갈 수 있다. 그 물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어쩜 가장 어렵고도 위대한 일이 아닐까.

 

가끔씩 시간을 내어 한 번쯤 되풀이하여 읽어볼 이야기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나이 든 물고기 한 마리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는 어린 물고기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넵니다.

잘 있었지, 얘들아? 물이 괜찮아?”

 

어린 물고기 두 마리는 잠깐 동안 말없이 헤엄쳐 가다가

결국 물고기 한 마리가 옆의 물고기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도대체 물이란 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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