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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물이다 - 어느 뜻깊은 행사에서 전한 깨어 있는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생각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재희 옮김 / 나무생각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천재 문장가나 유명 연설가, 혹은 오바마와 같은 화술의 달인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단 몇 마디로, 그저 자신의 행동만으로 적지 않은 울림을 주는 이들이 존재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그 평범과 소박함 속에 놓여 있는 위대함, 명징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 혹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는 이를 만난다는 것은 분명 행운일 것이다. 온갖 거추장스러움으로 치장한 말들이 요란을 피우는 지금, 명료하고 깨끗하게 그리고 담백하게 우리를 일깨워주는 문장과 언어는 분명 축복이다.
과연 우리는 절망적으로만 보이는 이 세상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또한 대해야 할까. 절망 앞에서 절망하며, 극심한 회의와 혐오로 썩어버린 이 세상과 끝내 결별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아무것도 아닌 양 외면하고 살아야 할까.
물이 괜찮은지, 아니 그보다 먼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삶의 존재를 제대로 느낄 수나 있는지, 어쩜 나는 그것부터 고민하고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길지 않은 이 강연문을 통해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정작 실체도 알 수 없는 특별함을 찾아 헤매기 보다는,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그 진부함 속에서 진정 삶의 위대함과 치열함을 찾을 수 있음을.
이 짧은 강연의 주인공은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고 창조적인 작가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은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이다. 끝내 자신 안의 고통과 화해하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 천재 작가. 하지만 그는 삶을 마감하기 몇 해 전,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졸업식 강연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깨어있는 삶’이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우리는 자유를 누리고 살까?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의 정의에 따라 답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누리기도 하고 속박당하기도 하며, 때론 타인의 자유를 무의식 중에 침해하기도 한다. 자각을 하든 못하든 우리는 무언가를 잘 알고 있다고, 그것은 온전히 나의 이성에 따른 선택이라고 믿고 그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나는 온전히 자유로운가? 내 삶은 내 의지에 따라 이어지고 있는가? 자신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저자는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인문학 본연의 목표이자 가치인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은 한낱 지식과 지성의 뽐냄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나’ 위주의 눈과 귀를 고쳐나갈 수 있는 힘, 즉 디폴트 세팅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추상적인 사고 속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단순히 내 앞에서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주위 깊게 사물을 관찰하고,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 그것이 바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이 온전히 나의 생각인지, 누군가 미리 정해놓은, 누군가 미리 선택해 놓은 편한 길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며, 마치 그것이 나의 선택인양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그 질문 앞에, 그 의문 앞에서 언제나 게으르고 주저한다. 어쩜 두려운 것이다.
최근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온갖 유치하고 교묘한 상술이 판친다. 출판계나 방송계, 문화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인문학의 복원, 인문학의 귀환 등을 외치지만, 이는 상술과 속임수 속에 그럴 듯하게 차려진 거짓된 잔칫상은 아닐까. 저자는 인문학 교육의 진가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인으로서의 삶을 그저 편안하고 순조롭게, 그럴싸한 모습으로 죽은 사람같이 살지 않는 방법, 무의식적인 일상의 계속이 아닌 삶을 사는 방법, 또한 자기 머리의 노예, 허구한 날 독불장군처럼 유일무이하며 완벽하게 홀로 고고히 존재하는 태생적 디폴트세팅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
판에 박힌 직장 생활, 퇴근 후 사람들로 북적이는 마트에 들러 일용할 양식을 산다. 그 사이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 오직 나를 중심에 놓고 본다면, 모조리 다 짜증나는 족속이 아닐 수 없다. 교통체증을 유발하고, 차 안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소모하게 만드는 인간들, 마트에서 가뜩이나 피곤한데 긴 줄을 만들어 느리게 계산대를 통과해야만 하게 만드는 인간들, 예의 없고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들. 그런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나는 절대 불행 그 자체일지 모른다.
하지만 디폴트세팅에서 벗어나 ‘나의 선택’으로 다시 이들을 바라보면 어쩌면, 아주 어쩌면 다른 생각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지친 일상에 피로한 이들이고, 쉴 새 없이 물건들을 계산하고 돈을 받고 카드를 받고 할인 포인트를 손님에게 묻는 저 계산원들 역시 얼마나 지쳐있는가. 그들은 곧 나와 같은 이들이 아닌가. 나 역시 내 뒤에 줄 서있는 누군가들에게 걸림돌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주의를 기울여 사물을 관찰하는 법을 진실로 배웠다면, 내 생각의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저자가 졸업생들에게 말하고자 했든 것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이고, 무엇이 무의미한 일인가를 우리 자신이 자각적으로 결정하는 자유. 그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이다.
저자는 이어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믿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무엇을 믿고 숭배하느냐에 대한 선택권일 뿐이다.’ 돈, 권력, 명예, 자기애 등 수많은 숭배의 대상이 있다. 이것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분명 우리의 자유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저자는 “승리하고 성취하고 과시하는 행위가 주류를 이루는 위대한 바깥세상에서는 별로 언급되지 않는 자유야말로 가장 귀중한 자유”라고 말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진실로 중요한 자유는 집중하고 자각하고 있는 상태, 자제심과 노력, 그리고 타인에 대하여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능력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일매일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사소하고 하찮은 대단치 않은 방법으로.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그 어떤 묘수와 비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온정과 공감, 연민과 성찰의 자세를 갖도록 노력하면 된다. 물론 어렵다. 저자의 말처럼 “자각 있게, 어른스럽게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 이것은 상상도 못할 만큼 힘든 일”이다. 때문에 그 어떤 거창한 철학이나 이론보다 위대한 것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오직 나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동물일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이타주의적 삶을,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능성이 열려 있는 특이한 동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물속에서 살며, 물이 어떠한지, 혹은 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갈 수 있다. 그 물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어쩜 가장 어렵고도 위대한 일이 아닐까.
가끔씩 시간을 내어 한 번쯤 되풀이하여 읽어볼 이야기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나이 든 물고기 한 마리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는 어린 물고기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넵니다.
“잘 있었지, 얘들아? 물이 괜찮아?”
어린 물고기 두 마리는 잠깐 동안 말없이 헤엄쳐 가다가
결국 물고기 한 마리가 옆의 물고기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도대체 물이란 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