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진보
강수돌 외 지음, 임승수.장진숙 인터뷰어 / 시대의창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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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쉬운 일은 한 개도 없다. 이제야 아주 조금 살아보니 알겠다. 특히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역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다. 한 개인을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꽤나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우주를 품고 사는데, 어떻게 한 개인을 무 자르듯 딱 잘라 평가하고 규정지을 수 있을까.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때로는 나태함으로, 성급히 개인을 규정하곤 한다. 극히 일부분의 모습을 가지고 섣불리 평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게 함부로 평가나 규정을 당하는(!) 이들로서는 적잖이 당혹스럽고 화가 날 만도 하다.

 

그 중 정말 고민스러운 것이 이른 바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나누고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 더구나 우리사회처럼 진보와 보수에 대한 애매한 정의나 편견, 오해와 왜곡이 심각한 곳에서 말이다.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진보와 보수의 규정은 무수히 많이 달라진다. 다양성 존중의 측면에서 보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을 지경이다. 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이들에겐 새빨간 불순분자로, 다른 이들에겐 자유주의자로, 또 다른 이들에겐 친미 성향의 중도보수주의자로 비치기도 한다. 참 생각하기 나름이란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나 역시 외계인이나 뽀로로가 아니기에 딱 잘라 말하긴 어렵다. 나 스스로 봐도 그렇다. 물론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이렇게 떠들긴 한다. “저는 항상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할 때에는 사회적 불의를 민감하게 의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에헴

 

고백하건대, 어느 책에서 보고 심히 멋있어서빌려온 구절이다. 물론 그렇게 살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는 구질구질한 변명은 하고 싶다. 구질구질. 암튼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양심의 거리낌 없이(매일 찔리며 산다), 연대의 가치를 확신하며(덕후 기질의 왕따다), 주변을 돌아보며(길치다)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그것이 진보적 삶이라, 진보주의자의 길이라 말한다면, 뭐 아주 어설픈 진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어느 장면, 어느 공간에서는 별안간 깡보수3단 변신하는 나를 목격하게 된다. 오호, 신기하면서도 영 꼴불견이다. 행동 진행 과정에서 스스로 , 이건 극히 보수적인 행동인데!’라고 느끼는 것을 보면, 내 스스로도 그리 마음에 들진 않는다는 것일 게다. 그럼에도 자동반사적으로 행동 및 반응을 전개하는 것을 보면, 또한 나는 극히 보수적인 인간인 셈이다.

 

으아, 뭐가 그리 복잡하냐!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인간이다. 인간은 고정불변의 그 무엇이 아니다. 매 시간 매 초마다 극세사처럼 정밀하고 촘촘하게 변화한다. 물론 때로는 한 방에 훅 가기도 하지만.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분명 존재한다. 사실 하고픈 말이 이거였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그야말로 바위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한 번 아닌 것은 곧 죽어도 아니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두 눈 딱 감고, 때론 무모하게 때론 눈물겹게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사람들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일단 인정하고 존경한다. 그 집념만큼은 말이다.

 

한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구의 복지부동을 뜻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둔감하여, 혁신의 파도를 거부하는 꼰대도 아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 그것을 지키는 데 더 많은 노력과 비용을 지불하는 가련한 이들을 말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들은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소중함을 희생할 줄 아는 이들이고, 타인의 고통에 극도로 민감하기에, 차마 수많은 정치인들처럼 쌩깔 줄모르는 이들이다. ‘너의 고통으로 내가 너무나 아픈이들이다. 바로 이런 이들이 걸어가는 길이 한 길이다.

 

어쩜 이 엄혹하고 때론 너무 기가 막혀 가소로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당한 외면과 적당한 타협과 적당한 눈속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혼자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도, 모두가 외눈박이인 세상에선 두 눈을 가진 자가 외면 받지 않는가.

 

때문에 나는 적어도 진보라 자처할 수 있는 이들에겐 다음과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함부로 규정하지 않고, 또한 스스로를 쉽사리 단정하지 않는 마음, 타인의 고통 앞에 한없이 부끄러워하는 마음, 차별을 반대하고 정의로운 평등을 추구하는 마음, 나의 아픔과 너의 아픔을 함께 보듬을 수 있는 마음 그리고 사랑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마음이다. 난 그런 이들을 리얼 진보주의자라고 말하고 싶다.

 

이른 바 철이 너무 없어 온 몸에 쇠사슬을 묶고 다니기 전에 만났던 선생님 한 분, 그리고 누가 전해줬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책 한 권, 영상 하나, 나와 마찬가지로 가난했던 이웃들과 그 이웃들의 아이들, 그들의 웃음과 눈물. 이유도 없이 슬픔에 벅차 오히려 짜증을 냈던 기억들, 차마 볼 수 없어 모른 척 돌아설 때 느꼈던 빌어먹을 상실감과 죄책감. 아마 이런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빌빌거리고, 징징거리고, 구질구질 거리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유치찬란한 해피엔딩을 믿고 싶은, 가소롭게 어처구니가 상실된 세상이지만, 다시 그럼에도, 행복하게 눈물 흘릴 수 있는 그 어떤 날을 꿈꾸며, 내일도 빌빌, 징징, 구질구질 거릴 수 있는 힘을 내는, 지금의 나는, 가소롭지만 소중하다.

 

이 책이 나온 지 6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는 민주노동당이 있었고, 그 이후엔 통합진보당이 있었다. 지금은 없다. 민주노동당에서 갈라진 진보신당도 없다. 다른 이름들의 도전과 시련이 이어지고 있다.

 

처음 만나는 진보는 설레고 아름다워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 똑바로 눈뜨고 눈알이 빨개지도록 울어야 한다. 난 울음이 켜켜이 쌓여야 한다고 믿는다. 울지 않는 자는 타인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이 나왔을 당시를 떠올리며, 근원을 알 수 없는 아쉬움과 추억과 비통과, 그럼에도 희망을 갖고 읽어 내려갔다. 2014년에 한 번 읽고 올해 다시 읽었다. 그리곤 한 숨을 내쉬었다.

 

인터뷰에 응한 8명 중 나름 인사를 드린 분도 있고, 자주 뵌 분도 있으며, 심지어 존경하는 분도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이도 존경하는 분이다(페친!) 그들이 인터뷰를 하고 당하며(!) 느꼈던 2010년의 분노와 희망이 지금은 어찌 되었을까. 체념이 더 많아졌을까, 아님 그럼에도 희망을 끝내 놓지 않고 있을까.

 

치열해야할 정치가 !’로 탈바꿈해버린 지금, 만약 책 표지의 문구처럼 이제 처음 왼쪽으로 들어선이들이 있다면, 부디 과거의 실수와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은 반드시 가능하다는 가당치도 않은 믿음을 장착해 주기 바란다. 해피엔딩은 기필코 온다. 나쁜 놈은 죽고, 착한 편은 결국 이긴다. 잊지 말자.

 

진보를 처음 만나지 않는, 이미 많이 만나봤다고 착각하는 이들도, 한 번쯤 읽어보시라. 당신이 알고 있는 진보는 어디 소속인지, 아님 무소속인지. 아님 진보를 가장한 극우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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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손엔 공자 한손엔 황제 - 중국의 문화 굴기를 읽는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Arcade Project 1
이유진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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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와 관련하여 충무로에 갈 일이 종종 생긴다. 예전 충무로는 그야말로 한국 영화의 1번지였지만, 지금은 옛 정취를 찾기 쉽지 않다. 기껏 충무로역 내부 통로 벽에 전시되어 있는 대종상 시상식 사진들 정도랄까.

 

충무로는 또한 인쇄 및 출판 거리이기도 했다. 지금도 과거에 비할 순 없지만, 묵직한 인쇄물을, 개조한 오토바이 뒤에 싣고 열심히 달리는 노동자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마저 극심한 불황으로 과거에 비해 많이 사라진 느낌이다. 이래저래 충무로는 참 많이도 변했다.

 

대신 지금 충무로의 풍경은 조금은 낯설다. 온통 호텔 천지이고, 여기저기 중국어가 들려온다. 그리고 깃발을 든 채 한옥 마을을 찾는 중국인 무리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오래된 건물들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엔 어김없이 호텔이 들어선다. 그리고 노래방은 왜 그리 많은지.

 

사실 이런 모습은 비단 충무로뿐만이 아닐 것이다. 언뜻 언뜻 주위를 둘러보면 유난히 중국인들의 목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서울 광화문 한 복판에서 멀리 제주에 이르기까지, 중국 관광객들이 아니면 우리 경제가 이미 흔들렸을 것이라는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어설픈 졸부가 대개 그런 것처럼, 과거 우리는 갑자기 얻은 어색한 생활의 윤택을 엉뚱한 곳에 풀어내곤 했다. 지금도 그 모습이 아주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른 바 있는 티를 내며, 없는 이들을 깔보고 무시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생생하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도 그런 추태가 아주 사라진 건 아니다. 다만 규모의 차이에 압도되어 우리가 덜 드러날 뿐이다.

 

예전 우리의 그 모습을 이젠 중국에게서 확인하곤 한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에게 주어진 경제적 윤택을 어찌할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전체 중국 인구에 비해서는 소수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겐 엄청난 숫자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 엄청난 돈을 뿌려대며, 과시하고 만족하며 돌아간다.

 

중국은 대국이다. 광활한 영토와 또 그 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중화라는 문화적 자부심과 더불어 이젠 세계의 경제를 이끈다는 또 하나의 자부심이 보태져 그야말로 꼿꼿하다. 예전에도 물론 그랬지만, 이제는 한 차원 더해 미국조차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중국이다.

 

그런 중국과 우리는 긴 시간을 함께 공존해왔다. 역사의 대부분을 황제국과 신하국이라는 관계로 지내왔기에, 언뜻 생각하면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관계로 지내온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비교적 평화로운 공존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역사상 끊이지 않았던 침략과 약탈마저 평화라 부를 순 없지만. 그들이 너그러웠던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슬기로웠기에 가능했던 평화라고 할 수 있다.

 

현재에도 중국은 우리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분단된 한반도 상황에서 중국은 이제 사실 관계를 떠나, 마치 세계에서 유일하게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로 비쳐지고 있고, 우리 경제의 대중 의존도 역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률 하락이 전 세계 경제를 흔들고 있는 상황이니,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느끼는 체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 변변한 내수기반 없이 오로지 수출 위주의 산업경제정책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우리 물건을 팔아주는 나라가 재채기를 한 번 해도, 독감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국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강력한 국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여전히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진다. 여기저기 중국 전문가라는 이들은 많아 보이는데, 막상 중국의 행보와 의도, 배경을 제대로 짚어내는 이들은 드물다. 상황이 이 정도이니 미중 간의 패권경쟁에 대한 분석 역시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조금은 부끄러운 모습이다.

 

책은 중국의 새로운 부상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그들의 본색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이다. 공자로 상징되는, 중국이 자부하는 최고의 문화 자산 유교와 역시 중국의 오랜 정통성과 역사를 말해주는 황제. 저자는 다시금 새로이 부상하고 있는, 아니 중국이 새삼스럽게 다시 띄우고 있는 이 두 가지 상징을 통해 지금 중국의 욕망을 설명한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중화의 부활이다.

 

1838년 아편전쟁 이후 위대한 중화는 맥없이 무너졌다. 그 과정에서 황제는 서구에 무릎을 꿇었고, 유교는 망국의 근원으로 지탄받았다. 그 후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과거 문화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냈으며, 그 과정에서 공자는 공씨네 둘째 아들 놈이라는 모욕적인 표현으로 폄하되었다. 전국 곳곳의 공자 유적과 사당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런 공자와 황제가 지금, 함께 부상하고 있다. 저자는 공자와 황제의 부활에 대해 이렇게 단언한다. “세계를 모두 품을 수 있는 문화, 가장 유구한 역사를 지닌 국가라는 표상을 통해 중국이야말로 국제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지닐 자격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사실 중국이 문명의 중심을 자부할 수 없었던 시기는 불과 100년 남짓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100여 년 전 만청 시기에 엄청난 나락을 경험한 중국은, 오늘날 그 추락의 속도와 깊이에 상응하여 비상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두 역사적 시점에서 모두 공자와 황제가 나란히 불려왔다.”

 

중국의 국기 오성홍기는 중화민족 모두가 황제의 자손임을 나타낸다. 관용과 포용력을 지닌 다민족문화야말로 세계화에 적합한 구조이다. 중국은 이제 다시 세계의 중심에 서려 한다. ‘처음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하게도 다시이다. 과연 이런 중국이 세계와 평화로운 공존과 더불어 굴기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한때 구태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공자는 이제 세계에 문화 첨병으로 그 역할을 단단히 해내고 있다. 세계에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보급하기 위한 공자학원은 급성장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공자학원이 2004년 세워진 이래 7년 간 358개의 학원이 생겨났다. 매주 한 개꼴로 생겨난 셈인데, 의미심장한 것은 2004년 세워진 세계 최초의 공자학원의 이름이 바로 서울공자아카데미라는 사실이다. 한국이 공자학원의 근원지가 된 셈이다.

 

중국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힘은 돈과 문자와 제도에 있었다. 저자는 향후 중국이 공자와 황제로부터 뽑아내려는 것 역시 세계중심으로서 중국의 기초를 강화해 줄 보강제의 성격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다. 중국은 서구의 무지를 경멸한다. 그들의 단순함과 무례를 기억한다. 때문에 다르고자 한다. 적어도 자신들은 기존과는 다른 패권자의 모습을 갖고자 욕망한다. 하지만 그 다름은 모두가 인정하고 공감할 때에 비로소 다름으로 비쳐질 것이다.

 

여전히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겐, 중국의 욕망을 적절히 읽어내야 할 골치 아픈 과제가 주어져 있다. 분단의 극복과 향후 한반도의 안정된 발전을 위해서라도 중국은 앞으로도 우리에게 중요한 이웃이 될 것이다. 그들의 욕망을 읽어내고, 여기에 어떠한 대응을 하느냐는 결국, 우리의 미래와 생존에 결부되는 문제일 것이다.

 

때문에 조급하지 않았으면 한다. 중국에 쉽게 감동하고 쉽게 경멸하는 조급함과 경망함은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의 역사와 함께 해온 재중 동포들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여전히 못된 사대의 버릇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겐 쩔쩔 매면서 재중동포는 조선족이라 깔본다. 미국에 사는 동포는 재미동포인데, 중국에 살고 있는 동포는 조선족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경박함과 저열함부터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중국이 제대로 보일 것이다.

 

재미동포 3세는 우리말을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끝끝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 문화를 간직하고 지켜내 온 이들이 재중동포이다. 그들의 역량과 민족애를 우리가 끌어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참되게 이웃과 공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전히 중국은 우리에겐 죽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많은 이들이 중국에 관광을 다녀와도, 아무리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을 찾아도, 아무리 많은 우리 연예인들이 중국 대륙을 흔들어도, 여전히 중국은 우리에게 제대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틈새를 찾아내는 슬기가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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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 “이게 사는 건가” 싶을 때 힘이 되는 생각들
엄기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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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고백해야겠다. 적당한 삶이란, 저자의 말마따나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살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리고 파스칼의 말처럼 이해하기도 전에 동의하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음에도, 짐짓 이해하는 척, 건방지고 무책임하게 동의해버렸다.

 

이 세상을, 우리네 삶을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바라보지 말라는 말들에 어느 새 주저앉아버렸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구석에서 나 몰라라 오타쿠 행세나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2015년 끄트머리에서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다.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말들을 꼽아보라면 불행히도 그것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가장을 선택하기 두려울 정도로 많은 참혹함이 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 난 문득 이 말을 떠올린다. “일하기 싫으면 그만 둬,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아.”

 

이 말은 이제 우리가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일하는 것이 그토록 영광일까?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내가 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이는 나에게 무한한 영광을 베푼 것일까? 이게 이치에 맞는 모습일까?

 

뜬금없이, 왜 미생스러운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어줍지 않게 마흔이란 나이에 들어 불어 닥친 난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진정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따위의 고민은 물론 아니다. 그런 고민은 지금껏 매일매일 하면서 살아왔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하찮게 여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스스로 별 것 아닌 존재들로 만들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을 스스로 과소평가하고, 급기야 부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저자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지, 그리고 삶의 공동화를 이해하기 위해 어떠한 언어들의 미미한 차이점을 찾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체험과 경험, 기대와 희망, 힘과 용기, 공감과 동감, 장소와 공간의 차이였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두 단어들은 그러나,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에 대한 커다란 간극을 보여준다.

 

그냥 이대로, 어쩐지 우리가 이러한 대접을 받고,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온전히 나에게 있다고 자책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그것이 아니라 정작 원인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또 눈물 나는 노력을 통해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희망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인지, 말 그대로 내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강의하고 있는 여러 대학의 학생들과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입학과 동시에 취업 등 성공의 문이 열려 있는 이들이 아닌, 언제 어디에서 삶의 파국을 만날지 알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우리의 아이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상실과 불능을 확인하고, 회복과 가능성을 찾아 나선다. 물론 해답은 책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파국과 단절하고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가능성의 밑절미가 될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용기는 어떻게 누구로부터 얻을 수 있을까.

 

우린 이미 그 해답을 알고 있다. 내 삶에 대한 누군가로부터의 응원이다. 그 응원이 희망이 되고, 용기가 되고, 나를 억누르는 힘들에 맞설 수 있는 또 다른 힘이 되어 준다. 내가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누군가의 응원.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믿음. 그것이 힘과 용기를 만들어낸다.

 

책은 온통 회색빛이다. 일그러진 우리 사회, 우리네 삶은 도무지 파국 외에는 길이 없어 보인다. 경쟁과 경쟁, 그리고 또 다른 경쟁과 경쟁으로 점철된 시스템은 낙오와 배제를 합리화시키고, 불의와 불평등을 합법화 시킨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이 높은 곳으로 떠나간 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선 소수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오직 선거가 치러질 때만 구성원이나 사람취급을 받는다.

 

이 정도로 망가진 사회에선 그 어떤 현인이 출현한다 해도 회복이 어렵다.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구한다는 판타지는 그저 우리 삶을 위안하는 슬픈 동화일 뿐이다. 오히려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사회를 이상적인 세상으로 묘사하는 변태들을 양산할 뿐이다.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오직 응원과 연대뿐이다. 뒤틀린 삶에 맞설 수 있는 용기는 절대 혼자서 낼 수 없다. 용기는 동료로부터 응원을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저자가 인용하는 만화 <원피스>에서 주인공 루피는 말한다. “그래, 난 검술도 할 줄 모르고, 항해술도 없고, 요리도 못하고, 거짓말도 못해. 난 도움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어!” 때문에 루피는 말한다. “너는 나의 동료다!”

 

책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개인을 철저한 개인으로 몰아가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매일매일 증명해야만 생존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 되어버린 사회를 고발한다. 더 이상 나를 지켜주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내가 사회를 위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작동하고 복무해야만 할 뿐이다.

 

하지만 저자는 결코 무기력하게 책을 맺지 않는다. 삶의 이후엔 당연히 또 다른 삶이 존재함을, 때문에 우리의 삶이 아무리 하루하루 모욕을 감내하는 것이라 해도, 이를 인정하고 옹호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말한다. 삶은 끈질기기에 위대한 것임을.

 

여기에 필요한 것은 물론 동료이다. 내 삶이 삭제되지 않고, 휴지통에 처박히지 않고 끝내 버틸 수 있는 것은 바로 동료가 있기 때문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때문에 두렵지만 앞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다. 망해가는 세상,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상 앞에 그저 부정만 하고 있어서는, 아무런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무엇을 바꾸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이 끈질긴 삶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누군가, 지켜주고 싶은 누군가를 응원하고, 또 응원을 받으며 신나게 이야기하면 족하다. 망해가는 세상을, ‘망해간다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안을 받고 미미하지만 희망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바쁘게 살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상처받지 않아도 좋다. 삶이 어쩔 수 없다면, 그것 역시 좋다. 이 세상에 그 많은 참혹함을 다 껴안을 수는 없다. 먼저 내 자신을, 내 동료를 껴안으면 족하다. 그럼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이 자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아주 먼 훗날이라도 웃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분노와 격노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분노는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다. 분노에는 원인을 찾고 따지며 생각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격노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이다. 원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풀어버리면 그만이다.

 

이 더러운 세상에 살면서, 그야말로 초인과 같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우리는 분노하되 격노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아야겠다. 올해는 그렇게 살고 싶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 생각하나? 심장이 총알에 뚫렸을 때? 아니!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아니! 맹독 버섯스프를 마셨을 때? 아니야! 사람들에게서 잊힐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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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공기를 팔 수 있다는 말인가 - 시애틀 추장의 꿈
시애틀 추장 지음, 엘리 기퍼드.마이클 쿡.워렌 제퍼슨 엮음, 이상 옮김 / 가갸날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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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말부터 이른 바 크라임 스릴러에 묻혀 지냈다. 죄송하다. 범죄소설이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시리즈를 읽어왔는데, 어느 새 남은 작품은 두 권 뿐이다. 드라마로도 챙겨 봤으니, 본의 아니게 해리 보슈의 열성팬이 된 듯하다.

 

이미 세상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데, 굳이 인간의 잔혹함과 나약함, 비열함이 순도 높게 표현되고 있는 범죄 소설을 필요가 있냐는 질문을 한다면 딱히 대답할 만한 것은 없다. 애써 변명을 하나 찾자면 그럼에도 소설에선 나쁜 놈은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른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재미있기도 하고.

 

아주 조금 유감스럽게, 올해 40대에 접어들었다. 솔직히 실감은 아직까지 나지 않는다.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닐 수 있겠지만, 순진하게도 난 마흔이 되면 더 지혜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 같다. 너무 큰 꿈이었다.

 

은근슬쩍 마흔을 맞아, 살인과 음모, 배신과 욕망으로 뒤섞인 범죄 소설을 잠시 접고, 내가 집어든 것은 아주 얇은 연설집이었다. 그것도 160여 년 전 어느 인디언 추장의 이야기. 고리타분함이 밀려 올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짧은 글 속에 우주가 담겨 있었다.

 

백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신대륙이라 이름지어버린 땅에는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 앞에 겸손했고, 공존의 가치를 오래 전에 깨닫고 살아왔다. 자연의 일부분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이들은 먼저 살고 있던 이들을 살육했다. 반복해서 효율적으로 살육했다. 그리고 그들의 터전을 자신들의 재산으로 만들었다. 어머니와 같았던 땅이 부동산이 되는 순간이었다. 부동산 위에는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포함한 먼저 살았던 이들의 피와 눈물이 스며들었다.

 

시애틀 추장은 퓨젓사운드 만을 끼고 있는 킷샙 반도에서 그의 부족 수쿠아미쉬 족과 함께 살았다. 워싱턴 주의 시애틀을 마주보는 곳으로 미국의 북서태평양 연안으로 알려진 곳이다. 시애틀 추장의 조상은 그곳에서 수천 년을 살았다.

 

이 지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인들이 가장 늦게 도달한 곳의 하나라고 한다. 백인들은 이른 바 개척정신이라 부르는 살육과 침략의 반복으로 인디언들을 살육해가며 그곳에 도달했다. 그리고 정복에 막바지에 이르러 무차별 살육에서 유화책으로 전환하였다. 인디언에게 토지를 구매하는 형식이었다.

 

바로 이 시기, 아메리카 토착민이었던 인디언들의 마지막 숨결이 사라질 위기의 순간에 추장이었던 시애틀은(시애틀 시의 이름은 추장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거의 궤멸 되다시피 한 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온 생애를 바쳐 부족의 땅과 문화를 간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미국정부가 파견한 대표들과 조약체결을 협상 중이던 1854, 이 연설을 남겼다.

 

연설은 매우 명료하다. 백인 정착자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그들의 새로운 문화를 존중하겠다는 것, 대신 백인들도 자신의 부족과 자신들의 삶의 일부인 자연을 존중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의 노력에 대해 어떤 이들은 실패라고 말한다. 결국 많은 원주민들이 유럽계 미국인들의 병을 앓다 죽었고, 부족의 문화와 종교는 억압당했다. 부족의 땅 대부분은 백인에 빼앗겼고, 자유가 억압당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보호구역에 수용되었다. 1900년에 이르러 이미 수천 년 이어온 원주민 문화는 파멸의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시애틀 추장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었는지 모른다. 그의 부족은 백인과의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부족으로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들의 문화도 명맥을 이을 수 있었고, 퓨젓사운드 인근 수천 에이커의 땅에 대한 주권을 갖고 있다. 부족의 지도자는 지금도 그 지역 원주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그들 논리대로라면, ‘발견한 백인들은 이미 그 곳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같은 생명과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라져야 할, 없애야 할 방해물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 인식에 따라 행동했다. 인디언들은 버팔로와 함께 그렇게 학살되었다. 쌍권총과 카우보이모자를 쓴 보안관의 활약을 담은 웨스턴 무비는 그러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낭만적으로 일그러뜨려 보여준다.

 

원주민들과 백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나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인식 그 자체였다고 본다. 원주민들에게 자연은 신성한 생명의 그물이었다. 함께 공존해왔고, 공존해야 할 이웃이자 가족이었다. 하지만 백인에겐 그렇지 않았다. 재산이자, 돈이었다. 환산 가능한 그 무엇이었다. 그 차이가 비극을 불러왔고, 지금 이 시대 모든 땅에 비극을 초래하고 있다.

 

시애틀 추장은 연설에서 말한다. “우리에게는 이 땅의 구석구석 모두가 다 성스럽다. 언덕, 계곡, 벌판, 숲 모두 우리 부족의 아련한 추억이나 슬픈 경험이 깃든 성스러운 곳이다. …… 당신들 발 아래의 흙도 당신들보다는 우리의 발소리에 더욱 정답게 응답한다. 그 흙은 다름 아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맨발 또한 대지의 다정한 어루만짐을 느낄 수 있으니, 우리 형제들의 삶이 그 속에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말 중국의 살인적인 스모그 현상과 관련해 참담한 뉴스 하나가 전해졌다. 캐나다 산 공기 캔이 생수의 50배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불티나게 팔렸다는 이야기였다. 신선한 공기를 캔에 담아 돈을 받고 판매한다. 공기를 판매한다. 뉴스를 접했을 때의 참담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는 이제 공기를 판매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미국의 환경드라마 <>의 내레이션에서 시애틀 추장은 이렇게 질문한다. 백인들이 사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부족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고. “어떻게 하늘을 팔 수 있으며, 대지의 온기, 영양의 신속함을 사고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우리는 팔고 당신들은 살 수 있다는 말인가? 홍인(원주민)이 종이 한 장에 서명해 백인에게 주었다고 하여 당신들 마음대로 해도 좋은 당신네 땅이 되는 것인가? 공기의 신선함과 물의 반짝임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당신은 그것을 우리에게 사겠다는 말인가? 마지막 물소가 죽고 나면 그것을 되살 수 있는가?”

 

아마도 시애틀 추장과 부족 사람들이 영영 이해할 수 없었을 그 질문에 우리는 이제 공기 캔으로 대답하고 있다. 우리는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는 종족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미 어머니인 대지와 누이인 강,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신이 이 땅을 파멸시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시애틀 추장의 짧은 연설이 오늘까지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감동을 주고 있는 이유는, 물과 공기를 사고파는 이 시대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이 더 이상 모르쇠하기엔 벅찰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경계, 구분 짓기로 문명을 발전시켜온 인류는 바로 그 구분 짓기로 인해 멸망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은 더 이상 스스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인류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만족을 느낄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을 온전히 채우기에는 이 지구와 같은 별이 수백 개, 수천 개 있어도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과 더불어 겸손과 존중의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본다면, 우리는 언젠가 시애틀 추장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늦기 전에 말이다.

 

오로지 발전과 개발을 통한 성장이란 마약에 취해있는 인류는 스스로 파멸의 문을 열어왔다. 그리고 이젠 빠져나오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만족을 모르는 이들에겐 별들의 속삭임이 들리지 않는다. 다시 별을 헤고 싶다.

 

이 세상 어느 곳도 고독을 위한 곳은 없다. 밤이 되어 당신네 도시와 마을 거리에 정적이 내려앉고 모든 인적이 끊긴 것으로 생각될 때도, 한때 이곳에 살았고 아름다운 이 땅을 여전히 사랑하는 영혼들이 모여들 것이다. 백인들만 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 부족을 공정하고 친절히 대해 주기 바란다. 죽은 사람이라고 해서 완전히 무력한 것만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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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 사람을 얻는 마법의 대화 기술 56
샘 혼 지음, 이상원 옮김 / 갈매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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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크고 많은 단점 중엔 치명적인 것들이 적지 않다. 개중엔 과연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가능할까, 의문이 드는 그런 것들도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소통이다. 평상시엔 누구 못지않게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유지한다고 자부하다가도 어느 순간 특수한(!) 계기나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이내 좀비가 되고 만다.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말로.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타자와의 소통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어느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숙명이다. 아무리 홀로 있는 것이 좋아서, 가령 외딴 섬에서 그야말로 혼자 살아간다 하더라도 온전히 그렇게 평생 홀로 살 수는 없다. 불가능하다.

 

때문에 타자와의 소통은 삶의 질과 행복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타자와의 관계를 불행하게 이끌어 파국으로 끝나는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하는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지만, 그것도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비극이 된다.

 

책은 제목 그대로다. ‘아무리 유능해도 적이 많은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말로 적을 만들지 않는 방법, 그리고 역시 말을 통해 적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말을 통해 상대방과 일종의 대결을 펼친다는 의미에서 쿵푸에서 따온 텅푸(Tongue Fu)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일단 그럴 듯하다.

 

분명히 이 책은 자기계발서다. 개인적으로 그리 즐겨 읽는 분야의 도서는 아니다. 하지만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적이 아닌 친구를 만드는 대화법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모두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상대를 존중하는 데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래야 상대 역시 나를 존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정이 아닌 긍정을 불러올 수 있는 대화법은 자기계발의 차원을 넘어 삶의 질을 위해서라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워낙 팍팍한 세상이다 보니 예전에 비해 사람들이 부쩍 날카로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과거에는 그저 미안합니다’, 한 마디면 끝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고성이 오가고, 때로는 폭력과 살인까지 부르는 파국을 초래한다. 이는 단순히 사람들이 성질이 급해졌다거나 참을성이 없어졌다는 정도의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극심한 경쟁과 성과주의, 물질주의가 팽배해진 세상에 적응하고, 또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변태(!) 해버린 탓이 클 것이다.

 

이른 바 보복운전 문제가 새로운 사회현상 혹은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에도 운전 중 사소한 시비가 붙는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분을 이기지 못하고 상대차를 일부러 따라가 위협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깍두기 아저씨들만의 장기(!)였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평범한 시민들이 한순간에 도로 위 무법자 혹은 살인자로 변해버린다.

 

우리네 심성이 이렇게 팍팍하게 된 것은, 물론 우리 사회가 정상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그것을 모조리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의 생각과 태도는 온전히 나만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사회의 영향으로만 결정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며, 일정한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소통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다시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이 나를 분노하게 하고 누군가를 증오하게 만드는지 진지하게 돌아봤다. 무엇일까.

 

상대방이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상대방이 틀렸다고 단정 짓고, 비난하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그런 비난을 받는 사람은 심각한 모욕감과 함께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동안 내가 그랬던 적이 많았다. 물론 나이를 먹어가면서, 스스로 부끄러운 것이 많아, 자제하고 또 진중해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비겁한 놈은 되지 않겠다는 아집 비슷한 신념으로 무심코 상대방을 비난해버리는 실수를 범하곤 했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놈이 도리어 타인을 비난하고 매도해버린 것이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게다가 원체 심성이 나약해 상대방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상처받고, 그것을 두고두고 되새김질 하는 녀석이, 제 생각은 하지 않고, 타인에게 똑같이 그런 상처를 주곤 했다는 것도 나를 참으로 부끄럽게 만든다. 순간의 짜증이나 분노를 참으면 아무 갈등 없이 지나갈 수 있었을 문제도 꼭 시비 아닌 시비를 걸어, 사달을 일으키곤 했으니, 이 어찌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있겠나.

 

상대를 비난하고 무시하고 모욕을 주는 것에서 삶의 기쁨을 느끼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난 다행히도 그런 부류는 아닌 듯싶다. 오히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이, 오래 마음에 남아 불편하게 만든다. 영 개운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방에게 말을 해야,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야 서로 상처받지 않고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때로는 새로운 친구나 협력자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책 내용 중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멘트를 날려라식의 이야기는 조금 작위적이고 때론 너무 이상적인 느낌이 나지만, 그럼에도 그런 전략(!)들의 뿌리는 충분히 가슴에 새겨둘 만하다.

 

그것은 바로 공감, 이해, 적당한 인내, 위트, 적절한 침묵, 미래지향, 긍정,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 명령이 아닌 권유 혹은 부탁, 친절, 인간으로서의 예의, 두려움 다스리기, 경청, 분노에 대한 인정, 배려 등이다. 우리는 신이 아닌 부족함 많은 인간이기에 이 모두를 다 갖출 수는 없겠지만, 상황에 따라 이러한 것들을 다시 한 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크고 작은 갈등과 오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품위 있는 사회>의 저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모욕을 두 가지로 나눈다. 개인적으로 누군가 다른 이를 모욕하는 경우와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는 경우다. 그는 개인적인 모욕이 없는 사회를 문명화된 사회’, 제도가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품위 있는 사회라 말한다. 그에 따르면 모욕은 자존감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되는 행동이나 조건이다. 모욕은 인간의 명예나 자존감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그는 자존감이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가치라 말한다. 때문에 자존감이 사라지면 가치에 대한 인식도, 인생이 의미 있다는 인식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어쩜 그동안 너무 쉽게 누군가를 모욕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왔는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목적을 위해, 혹은 단순한 재미를 위해 생면부지의 타인을 모욕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알다시피, 현재 우리 사회는 품위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시민을 그야말로 범법자, 불온집단으로 매도하는 정부에 모습에서, 또한 대다수 시민들의 삶과 행복 보다는 알량한 기득권 유지에 목을 매고 있는 야당에 모습에서,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언론 및 방송에 모습에서 품위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적어도 문명화된 사회는 만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이는 자신의 분노, 혹은 욕망을 위해 타인을 모욕하지 않고, 배려와 공감으로 상생의 말을 던질 수 있는, 바로 우리들의 노력으로부터 조금씩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가, 정치가, 언론이 외눈박이라고 굳이 우리까지 멀쩡한 눈 하나를 없앨 수는 없다. 적어도 우리는 인간답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사회생활에 필요한 대화술을 알려주는 자기계발서로 이 책을 읽으면 딱 그만큼의 도움 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넓은 시야로 책을 바라본다면 의외로 얻는 것이,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다.

 

그나저나 난 언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에혀.

 

나는 삶의 과정을 단 한 차례 지난다. 그러니 내가 보일 수 있는 친절이나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있다면 모른 척하거나 미루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하게 해 달라. 나는 두 번 다시 이 길을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윌리엄 펜, 영국 출신 신대륙 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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