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 독일국민과 히틀러의 공모, 집단적 애국주의의 광기에 대한 르포르타주
라파엘 젤리히만 지음, 박정희.정지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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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는 국민들을 실업과 절망감, 민주주의적 혼란과 국가적 몰락에서 해방시켜 승리의 최정상에 올려놓았다. 독일은 그가 이끄는 가운데 세계의 강대국으로 우뚝 솟았다. 히틀러는 신뢰를 넘어서 국민에게 밝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열어주었다. 독일국민은 그들의 놀랍도록 훌륭한 지도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살면서 독일인을 만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독일 문학에 정통하지도, 독일의 문화·예술을 깊이 알고 있지도 못합니다. 기껏해야 독일 철학자·사상가들에 대해 아주 조금 주워듣고, 어설프게 공부했던 기억만 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 유년 시절, 독일이라는 국가는 이미 하나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 같습니다. 나름 아닌 ‘악마’의 이미지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의 세례를 받으며 자라난 제 기억 속에, 거의 대부분의 역사물, 전쟁 영화에서 독일은 ‘나쁜 국가’‘죄악을 저지른 악마의 국가’등으로 남습니다. 이제 그러한 미국의 ‘악마 만들기’가 냉전 시절 소련 등을 거쳐 현재 이라크, 북한, 시리아 등으로 바뀌었지만 말이죠.

 

독일군이 쓰고 있는 철모는 M35, M42 등으로 불리는데, 어린 제겐 그것이 마치 악의 상징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화에서 당연히 죽어야 하는 나쁜 대상으로 각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조금씩 먹으며 무언가 석연치 않은 감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무지하고 무지한 제가 보아도 지금 세계를 어지럽히고, 자기 맘대로 군림하며, 약소국들을 마치 식민지처럼 통제하려는 국가는 독일이 아닌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이 진정한 악의 축으로 비쳐졌습니다.

 

물론 6·25전쟁을 겪으며, 민족의 분단이라는 비극을 경험한 우리에게, 그런 우리를 구원해 준 미국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비난하고, 적대시할 수 없는 신성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때문에 적잖은 혼란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은 결국,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히틀러는 지하벙커에서 자살이라는 선택으로 삶을 종결지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어갔고, 그 수의 몇 배에 달하는 이들이 지옥 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대부분 각 나라의 평범한 국민들이었습니다.

 

유태인에 대한 잔혹한 학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집시에 대해서도요. 히틀러가 얼마나 잔악한 사람이었는지, 집요한 사람이었는지, 그것 역시 기억해야 겠지요. 그래서 다시는 그러한 독재자, 학살자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태인 학살을 비롯한 히틀러와 나치정권의 만행은 결코 그들만의 힘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히틀러라는 인물은 결코 혼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시 궁핍하고 고통스러웠던 독일 국민들 스스로 만들어낸 악마가 히틀러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히틀러를 추종하고 신뢰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웃이었던 선량한 유태인들의 고통과 죽음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습니다. 대다수의 독일국민들은 애국, 국가의 번영이라는 이름으로 유태인 학살을 동조, 묵인, 방조했습니다. 당시 독일의 종교계 역시 대부분 입을 닫았습니다.

 

아울러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 이른 바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국가들 역시 유태인 학살의 일정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을 도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국익 앞에 인권이나 생명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세계 제2차대전의 비극이 비단 독일만의, 히틀러만의 ‘단독 범죄’가 아님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식민지 쟁탈전 등이 섞인 추잡한 전쟁이었을 뿐입니다. 할리우드 영화가, 수많은 책과 이야기들이 전쟁을 아무리 미화하려 해도, 그 전쟁은 더러운 식민지 쟁탈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패권 다툼이었죠.

 

그리고 책은 히틀러라는 인물, 나치라는 집단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과 독일국민들의 집단적 애국, 마치 최면과도 같았던 그들의 복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집단적 최면에 빠진 민족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책은 조심스레 말하고 있습니다.

 

최근 탈북자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과 한국 정부는 마치 자신들이 탈북자들의 수호신인양 떠들어 대고, 감히 인권과 생명을 주절거립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미국과 한국이 탈북자들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지금과 같은 호들갑이 도움이 될까요? 오히려 중국에서 북으로 돌려보내진 탈북자들이 더 힘든 상황을 겪게 만들진 않을까요?

 

미국은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이 인권 국가인양 ‘북한인권법’을 만들어, 탈북자들을 자국민으로 받겠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부시 정권 8년 간 고작 80여 명의 탈북자들만을 받아들였습니다. 미국의 호언장담을 믿고 생명을 건 탈북을 감행한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미국은 정치적 이익이 될 만한, 자국에 도움이 될 만한 이들만 선별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왜 탈북자들이 미국 의회에 가서 온갖 과장을 섞어가며, 증언을 해야만 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MB정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참여 정부는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빚지 않고도 적지 않은 수의 탈북자들을 매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러던 탈북자들의 남한행이 현 정부 들어 뚝 끊겼습니다. 탈북자 정책에 관한 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게 바로 현 정부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탈북자 이야기를 꺼내듭니다. 왜 그럴까요? 4월 11일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탈북자 이야기에 묻혀 자신들의 온갖 비리와 더러운 진실이 묻혀지길 바라는 것입니다.

 

인권을 외치고, 생명을 외치는 이들은 위선적이어선 안 됩니다. 히틀러는 분명 인류 역사상 잊어선 안 될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현 북한 정권 역시 인민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핑계로 소중한 생명을 정치 도구로 이용하는 집단들 역시 경계하고 비난해야 마땅합니다. 악마는 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악마를 돕는 이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바로 이 시간, 우리는 악마를 돕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론 순수한 동포애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탈북자 문제를 이야기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까지 싸잡아 비난할 순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순수함이 더러운 목적으로 악용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독일의 사례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기억해야 합니다. 집단 애국의 잔악성, 그리고 무관심의 죄악. 무관심은 곧 방조입니다. 그리고 범죄를 묵인하는 행위입니다. 부디 탈북자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어 더 이상 고통을 겪는 이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하다못해 사람의 생명까지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함부로 이용하는 집단.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혐오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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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따르는 말 사람이 떠나는 말 - 인간관계를 망치는 39가지 습관
히구치 유이치 지음, 홍성민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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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였나요. 제가 전공한 과의 교수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자신의 강의를 하루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2시간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전공을 살려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제 경험을 섞어 이야기하면 된다는, 참 단순해 보이는 제안이었습니다.

 

전 깊게 생각하지도 않은 채 그만 냉큼 알겠다고 대답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 도대체 제가 왜 그런 무모한 대답을 한 것일까요. 수락 이후 강의일 전까지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제 생애 첫 강의였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외모 안 되고, 키 안 되고, 학벌과 재력, 부모님 배경 등등 뭐 하나 제대로 내세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단 하나 자신감 충만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뭐 부끄럽지만 다름 아닌 목소리였습니다. 목소리도 괜찮고, 노래도 좀 한다고 생각했고, 속된 말로 ‘말발’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후회하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단 말입니까. 강의는 다행히 별 탈 없이 마쳤고, 학생들의 반응도 나쁘진 않았지만, 전 그 이후 어디 가서 ‘말 잘 한다’‘한 노래한다’는 말을 다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일생을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들 역시 수화를 통해 대화를 합니다. 자신의 의사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언어, 말은 인간을 여타 동물들과 크게 구분 지을 수 있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때문에 말하기는 너무나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은 그냥 생긴 말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말로 상처를 받고, 말로 위안을 얻습니다.

 

책은 오랜 시간동안 논술과 작문 등을 가르쳐 온 저자가 실제 생활에서 겪고 느낀 점을 정리한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가 말 주변이 없었고, 또한 대체적으로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글 또한 매끄럽게 쓰지 못한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을 잘 한다는 것, 말하는 법은 곧 사고의 습관이라고 합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함께 물 흐르듯 대화하는 사람은, 성품 역시 훌륭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제 할 말만 두서없이 늘어놓고, 상대방의 말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들은, 대화만이 아닌 삶의 모든 것들을 그런 식으로 이어나갈 확률이 높습니다.

 

책은 김제동이나 손석희 아나운서, 나아가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처럼 될 수 있는 달변가의 비결을 일러주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런 것은 따로 비법이 없죠. 대신 책은 피해야 할 대화 습관, 유형 등을 소개합니다. 이를테면 사회생활에서 흔히 나타나는 ‘도덕적 설교만 늘어놓는 유형’‘근거를 말하지 않고 결론짓는 유형’‘궤변으로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유형’ 등입니다.

 

아울러 이성에게 외면당하기 쉬운 유형들도 일러 줍니다. 적어도 이런 점들을 조심해서 이성과 대화한다면 호감 까지는 아니더라도 비호감으로 찍힐 수 있는 위험성은 줄어든다는 것이겠죠. 예를 들어 ‘끝난 일을 계속 문제 삼는다’‘감정에 휘둘린다’‘자기 말만 한다’‘낮은 수준으로 해석한다’ 등입니다.

 

덧붙여 인간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대화 습관이나, 자칫 잘못하면 상대방에게 만만하게 보일 수 있는 대화 습관 등에 대해서도 친절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말을 잘하는 것에는 왕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 또 일부러 ‘나는 말을 잘 해야 겠다’는 의식 하에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 말한다 해도 그 모든 것이 계획대로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말하기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성 아닐까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진심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설령, 어설프고 조금은 촌스럽더라도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지금도 전 말을 잘 하고 싶습니다. 단순한 말발이 아닌, 상대방의 공감을 얻을 수 있고, 울림을 줄 수 있는, 그런 말을 잘 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공부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단정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죠.

 

때문에 말하기는 여전히 저에게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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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한번인.생
조대연 지음, 소복이 그림 / 녹색문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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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평생 만든 4백 개 수정란 중의 하나와 아빠가 평생 만든 12조 개 정자 중의 하나가 우연히 만나, 평범 씨가 태어났어요.

4백 곱하기 12조…… 4,800조분의 1의 기적이군요.”

 

평생 5억 번의 호흡을 하고, 1500번 울다 숨을 거두는 인간. 그 첫 호흡과 울음을 내지르는 태어남의 순간. 엉엉 울면서 생을 시작하는 동물은 사람뿐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은 위로받고 싶은 것이군요.

 

기적 같은 삶을 시작했지만, 우리는 결국 평범 씨와 그리 다르지 않을 삶을 살다 숨을 멈추게 될 터인데, 왜 이렇게 복잡하고 무참하고 힘들게 살아갈까요. 어린 시절이 끝난 날, 사람들은 이름을 얻고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립니다.

 

오늘 한국에서 태어난 1000명 중에서 딱 1명만 커서 부자가 된답니다. 사회도 그릇처럼 정해진 크기가 있으니까요. 부자 꿈처럼 다들 바라는 꿈은 못 이루는 게 정상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왜 모든 사람들은 다들 자신이 부자가 될 것 마냥 아등바등 살아갈까요. 왜냐고요? 999명의 하나가 된다는 것이 너무 무섭기 때문이겠지요.

 

인생에서 꼬박 25년을 잠자는 시간으로 보내는 우리는 10만 번의 꿈을 꾼다고 합니다. 하지만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은 그리 미덥지가 못하네요. 새우잠을 자더라도 고래 꿈을 꾼다면 그건 아름다운 것일까요.

 

잠자는 시간만큼, 그러니까 25년이란 세월을 우리는 어떤 형태이든 일을 하면서 보낸다고 해요. 그것이 공부든, 직장일이든, 집안일이든 말이죠. 배부르면 사냥하지 않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배가 불러도, 배고프지 않아도 일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미래의 두려움으로 말이죠. 미래의 두려움은 상상의 두려움인데, 우리는 미래의 두려움을 현재에 느끼며 살아가는 셈이네요.

 

이처럼 책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습니다. 태어남과 사랑, 죽음과 행복, 꿈과 죽음까지. 우리는 어떤 삶을 꿈꿀까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일까요. 누구에게나 딱 한 번뿐인 삶인데 말이죠.

 

“벌어도, 또 벌어도, 만족한다는 사람은 드물어요. …… 돈으로 되는 일이 많아서일 거예요. 아니,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어서일 거예요. 벌이는 유한한데 쓸 데가 무한하다면 애당초 승산 없는 시합이잖아요?”

 

과연 우리는 더 가지면 더 만족할 수 있을까요. 꿈을 이루면 만족할 수 있을까요. 이미 또 다른 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그 꿈이 결국 손에 쥐어서 같은 크기라면. 꿈엔 정말 끝이 있을까요.

 

평범 씨의 삶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그저 그런 일상처럼 지나갑니다. 그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 누군가는 기억하겠지만, 기억하는 이들마저 사라진다면, 결국 세상은 또 다른 평범 씨들에게 눈을 돌릴 것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무언가를 얻기 위해 때론 남을 짓밟고, 상처를 입히며 살아가는 우리들. 그리고 얻은 성취에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들. 또 다시 뛰는 우리들. 가끔 쉬고 싶지만, 그 쉼마저 부담스러운 우리들.

 

작은 책 한 권이 전해주는 의미는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정작 책을 덮은 후에 밀려오는 고민들과 반성은 더 당혹스럽습니다.

 

난 과연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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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클로 제국의 빛과 그림자 - 찬란한 성공 뒤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
요코다 마스오 지음, 양영철 옮김 / 서울문화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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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1월 11일, 대한민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싸다는 명동 한 복판에 글로벌 SPA 브랜드 ‘유니클로’ 명동중앙점이 오픈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개장 당일 아침 1000명이 넘는 인파가 미리 매장 앞에서 줄을 길게 늘어뜨리며 기다리고 있었고, 오픈 행사가 진행된 13일까지 매장 주위에는 항상 5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기했다. 아울러 오픈 3일 만에 매출액 36억 원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유니클로’에 대한 인기를 실감나게 했다.

 

이미 유니클로는 일본은 물론 세계가 주목하는 ‘성공 신화’의 표본이다. CEO 야나이 다다시는 이 시대의 ‘카리스마 경영자’로 불린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이미 그를 일본 최고의 갑부로 선정했다. 유니클로는 소니와 도요타 같은 쟁쟁한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는 가운데, 15퍼센트의 이익률을 자랑하며 세계를 점령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금은 허망해진 도요타의 신화에 이어 너도나도 유니클로의 성공을 추켜세우는 분위기다.

 

여기서 한 권의 책이 주목된다. 이미 2005년 ‘아마존 닷컴’의 잠입르포를 통해 웹 시대의 노동소외현상을 고발했던 저널리스트 요코다 마스오의 《유니클로 제국의 빛과 그림자》다. 그는 성공의 신화 속에 가려진 유니클로의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곧바로 우리에게도 다가온다. 국내 의류 제조업체에게도 그의 고발은 유효하기 때문이다.

 

지난 해 말 일본 유니클로 측은 이 책의 한국어판 발행을 중지해 달라는 출판금지가처분신청을 냈다. 그리고 올해 1월 법원의 기각으로 비로소 책은 발행될 수 있었다. 참 흥미로운 모습이다. 왜 유니클로는 그토록 이 책이 한국에서 발행되는 것을 막으려 했을까.

 

사실 일본에서 이 책이 2011년 3월 발행되었을 때에도 유니클로는 발행 금지와 피해 보상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 한다. 하지만 출판사 측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취재에 의한 사실만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유니클로는 전 세계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며 글로벌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이미 이를 추앙하는 책들이 국내 서점가에도 적지 않게 나와 있는 상황이고, 최근 제일모직도 유니클로를 따라 잡겠다는 목표로 SPA 사업에 뛰어들었다. SPA는 원료 조달에서 제조 및 소매까지 한 회사에서 해결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세계적 불황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고, 또한 소비자들에게 질 좋은 상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이 비난할 일은 물론 아니다. 배울 점이 있으면 분명 배워야 마땅하다. 특히 우리는 유난히 일본의 성공에 자극을 많이 받는 민족이 아닌가. 도요타의 허망한 사례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과연 유니클로의 성공이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가이다. 만약 중국 등 해외 생산현장에서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강요한 결과로 우리가 값싼 유니클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가.

 

저자는 책의 말미에 유니클로가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는 브랜드 ZARA를 소개한다. 스페인의 글로벌 기업 ZARA는 유니클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유니클로의 정규직 비율이 10%인데 반해, ZARA는 80%에 달한다. 유니클로처럼 인건비를 줄여 효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눈높이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생산 시스템의 효율화를 추구하는 방식을 택한다.

 

유니클로가 중국 공장의 공개를 한사코 꺼리는 것에 반해 ZARA는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는다. 물론 제작 중이거나 디자인에 들어가 아직 시판하지 않는 제품을 제외하고 말이다.

 

여기에 더해 유니클로의 CEO 야나이 다다시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국내 재벌 기업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독단적이고 제왕적인 경영 스타일, 말과 행동이 다른 모습, 자신만이 기업을 이끌 수 있다는 강한 신념 등은 마치 삼성 이건희 회장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중국과 동남아 국가에서의 장시간 저임금 노동, 직원들의 잦은 이직, 낮은 정직원 비율. 아르바이트 사원에게까지 강요하는 가혹하고도 비정상적인 근무 매뉴얼. 이는 저자가 파악하고 취재한 유니클로의 모습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국내 의류업체의 현실이다. 국내 업체들 역시 중국,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에서 저임금 노동력으로 의류를 제조하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의 노동자 폭동 사태를 기억하는가. 노동 착취라는 유니클로의 의혹은, 그대로 우리 기업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적절한 임금과 공정한 노동력 위에서 질 좋은 저가 의류가 나온다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언제나 그것은 마치 신기루처럼 멀게만 보인다. 국제 기업들이 아시아 노동력을 착취해 이윤을 뽑아내는 현실, 그 현실을 유니클로는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우리의 기업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더 이상 값싼 노동력으로 의류를 생산할 수 없는, 그 언젠가가 온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까지 올린 수익을 바탕으로 타 사업에 진출할 것인가? 아니면 북한과 같은 마지막 ‘노동 착취 낙원’을 전쟁을 해서라도 쟁취할 것인가.

 

우리는 더 이상 정의롭게 성장하고, 정의롭게 성공하고, 정의롭게 풍요를 누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가.

 

책은 유니클로라는 기업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책은 동시에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든 성장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추악함을 말하고 있다. 그 누구도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내가 구입한, 당신이 구입하고 사용하고 있는 그 어떤 상품이 온전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한 것인가, 아니 관심은 있는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타인의 착취를 용인하고 눈 감는 것은, 스스로를 착취하고,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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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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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극을 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때로는 무모하고, 위험하고, 해선 안 될 일에 뛰어들어 파멸을 맞기도 한다. 인간이란 종족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었는지도 모른다.

 

아울러 인간은 끊임없이 비교하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을 합리화한다. 자신의 현재에 대한 이렇다 할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임에도, 결국 어떻게 해서든 무언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인간의 습성이랄까, 이것을 이용해 국가와 조직 그리고 사회는 우리의 죄책감을 조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회 순응과 통제를 위해 사용한다. 우리는 삶의 곳곳에서 이러한 어이없는 조작의 피해를 입으며 살고 있다. 부지불식간에 말이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상징 만들기 또한 이런 모습 중 하나다. 장애인이 적어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기회와 삶의 조건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대신, 사회는 장애인에게 “장애를 극복하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비장애인들에겐 그런 ‘슈퍼 장애인’의 예를 들며, “너희들은 장애인보다도 못할 것인가!”윽박지른다.

 

이는 비단 장애인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무한경쟁을 당연시하는 사회에서 약자와 패자가 될 가능성이 극도로 높은 계층에게도 적용된다. 사회가 만들어낸 불합리성, 불의를 개인의 초인적인 노력으로 극복하라고 강요한다. 사회의 책임, 국가의 잘못은 그 사이 덮어진다.

 

얼마 전 차 안에서 어이없는 공익광고를 듣게 되었다. 출산 후 어쩔 수 없이 휴직을 했던 주부가 다시 생계를 위해 취업 전선에 나가게 되었는데, 당연히 그 주부는 걱정을 할 수밖에 없다. “내 나이에 가능할까?”라는 걱정의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광고의 대답이 걸작이다. “무얼 망설이세요. 인생에 늦은 것은 없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이러면서 예를 드는 것, 해외 유명 인사들의 삶이었다. 누구는 몇 살에 위대한 문학작품을 썼고, 누구는 늦은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등. 죄다 헛소리에 불과했다.

 

왜 대한민국에서 결혼한 여성은 육아의 엄청난 부담을 감당해야 하며, 임신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회사에서 눈치를 보다 결국 스스로 나가야 하며, 왜 다시 취업하는 것이 하늘에 별 따기가 되어버렸는지, 여기에 대한 설명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온전히 여성 혼자 책임져야 할 문제인가 말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모습은 사회 곳곳에 널려있다. 무슨 불평과 불만이 있을 성 싶으면 곧바로 과거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 장애를 극복했다고 알려진 유명인들의 이야기가 줄줄이 사탕이다.

 

이쯤 되면 욕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저자 김원영의 말대로 세상 모든 장애인이 헬렌 켈러, 스티븐 호킹, 오토다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바로 여기에 위대한 가카의 말씀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지 알 수 있다. 가카는 자신이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살아 대기업의 사장이 되었고, 서울시장과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결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취업을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겐, 눈높이를 낮추라고 하고, 군대에서 총기사고라도 날라치면, 죄다 요즘 아이들이 허약해서 그렇다고 한다. 정작 자신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는데도.

 

희망이란 단어는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된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해낼 수 있다고 떠드는 것은 오만에 불과하다. 현재 스펙이라면 유사 이래 최고라 자부하는 젊은이들이 원하는 직장에서 일을 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무작정 희망만 가지면 되는 일인가. 다 해결되는가.

 

저자는 이른 바 슈퍼 장애인이 되기 위해 몸부림쳤다. 수시로 뼈가 부러지는 골형성부전증을 안고 태어나, 15년 동안 좁은 방 안이 유일한 세계였던 아이. 하지만 재활학교를 거쳐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서울대를 지나 로스쿨에 합격한 사람. 흔히 사회에서 추켜 세워주는 ‘귀감’이 될 법하다.

 

하지만 저자는 단호히 말한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장애를 극복한 적이 없었다고. 자신은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지 않다고. 다만 야한 장애인, 뜨거운 인간이고 싶다고.

 

그가 과연 초인적인 노력을 통해 슈퍼 장애인이 되었을까. 아니, 그렇다 쳐도. 과연 그것이 혼자 노력으로 가능했을까. 부모님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도움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그리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저자와 같은 행운을 누릴 수 있을까.

 

장애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회에 마땅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다만 그 새삼스러움이 여전히 지난한 우리 사회, 국가가 문제이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홍종두(설경구)와 한공주(문소리)는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사회는 그 사랑을 강간으로 규정한다. 장애인들은 성욕이 없는, 인간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욕망이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로 단정 짓는다. 과연 무엇이 옳을까. 아니 무엇이 틀린 것일까.

 

저자 김원영의 뜨거운 인간, 야한 장애인의 길은 여전히 가시밭길일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듯, 잠깐이나마 관심을 갖다 잊게 마련이니. 하지만 사회에 대한 그의 정당한 분노는 계속 될 것이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돌아본다. 지극한 겁쟁이에 소심한 성격. 장애인들에 대한 특별한 차별의식 같은 것은 전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온전히 바라본 적은 있었는지, 돌아본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진보를 떠들고, 더 나은 세상을 떠드는 사람들이라면, 읽어봐야 할 그의 삶 이야기다. 누구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를 터뜨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정말 세상이다.

 

“내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자유’다. 우리 사회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기존 질서를 마음껏 거스르는 존재이자, 수많은 이들이 열망한 자유가 모여 만들어낸 구체적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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