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 독일 대통령은 왜 지금 자유를 말하는가
요아힘 가우크 지음, 권세훈 옮김 / 부엔리브로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독재는 오래, 아주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리로 뛰쳐나와 그들 자신이 민중으로 존재함을 온전히 자각하고 주장하는 비판적인 군중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권력에 관여하느냐 아니면 복종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시민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 희망? 경제? 복지? 신뢰? 뭐 하도 많아서 늘어놓기도 힘들다. 하지만 내 생각에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닌 ‘목적’이 아닐까 싶다.

 

무엇을 위한, 무엇을 위해,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당최 애매하게 되어버린 세상이 아닌가. 오히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무엇을 피하고만 싶은 처지가 되어버린 것 같다.

 

책은 독일의 11대 대통령 요아힘 가우크의 연설을 담은 것이다. 그는 동독 출신의 목사이자 민권운동가이다. 하지만 모든 정파를 초월해 압도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다. 그는 민중이 일어나 어떻게 자유를 얻어냈는지, 삶으로 고스란히 체험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제 12월 19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도 5년 동안 국정을 꾸려야 할 대통령을 뽑는다. 그런데 희한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MB정권 5년 실정에 대한 뚜렷한 비판도 없고, 앞으로 5년 동안 어떻게 해나가겠다는 구체적인 정책도 보이지 않는다. 너도 나도 다만 표가 될 이야기들, 국민들이 듣고 싶어만 하는 이야기들을 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정작, 시민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없다. 무조건 자신이 당선되면 알아서 다 하겠다는 엄포만 늘어놓는다. 이러한 현상이 맞는 것일까? 국민들은 다만 5년 마다 혹은 4년 마다 투표를 통해 자신의 대리인들을 선출하기만 하면 끝이 날까?

 

MB는 70년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임기 5년 동안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받았다. 왜? MB는 자신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것으로 시민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자신이 하려는 것에 사사건건 시민들이 반대하고 나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권력을 쥐어주고, 왜 다시 딴소리를 하는가? 이게 MB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투표로 당선됐다고 해서, 그가 모든 것을 제 맘대로 시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해나갈 수는 없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다. MB는 절차적 민주주의만이 민주주의라고 믿었다. 그게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다.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은 말한다. 시민으로써 우리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무책임하게 포기하는 것일 뿐, 결코 관용이 아님을.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아닌, 무엇을 위한 자유, 무엇을 향한 자유를 추구할 때 비로소 스스로 책임을 지는 성숙한 자유를 누리는 ‘시민’이라는 것을 말이다.

 

독일 국민들은 스스로 선출한 히틀러가 오히려 자신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역사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다. 국민이 뽑은 권력이 국민을 억압하는 모순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주권을 행사하는 시민들이 깨어 있어야 하고, 시민의 자세로 목적성과 방향성을 가진 책임 있는 자유를 행사해야 한다.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은 다시 말한다. 민주주의는 결코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하지만 모범적인 성격의 학습 능력을 지닌 시스템이다. 때문에 성숙한 자유라는 책임을 가지고 모두가 함께 국가를 이끈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MB정권 5년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얼마나 우리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을 갈 수 있는지, 똑똑하게 목격했다. 그리고 그 후과가 비단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 후손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질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4대강 사업의 여파는 다음다음 세대에도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이제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누구를 찍어야 한다. 누구는 절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이미 각자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그대로 행동에 옮기면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 이제 2013년에는 다시 우리들의 ‘목적’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누구를 이겨야 한다, 누구보다 잘 살아야 한다는 모순된 생각에서 벗어나, 누구나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공존의 마음을 찾아야 한다. ‘부자 되세요!’로 대통령이 된 MB는 결국 우리를 잘 살게 해주지 못했다. 극소수의 배만 불렸을 뿐이다. 이제 다시 우리가 사람임을 시민임을 자각해야 할 때이다.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은 우리가 권력에 관여하느냐, 아니면 복종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시민이 될 수도, 그렇지 못하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언젠가부터 자유·정의·인권·민주주의가 식상해진 세상이다. 하지만, 아직 그렇기엔 우린 갈 길이 멀다. 자유·정의·인권·민주주의 그 어느 것 하나도 여전히 우리 사회엔 부족하고 어설프다. 그걸 확고히 만들 수 있는 것은 한 명의 대통령이 아닌 우리 시민들이다.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권력을 함께 행사할 수 있는 시민. 이제 그러한 시민들이 대한민국을, 한반도를 제대로 이끌고 나갈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책임과 관용에서 빛이 날 수 있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12월 19일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열망을 믿고 신뢰할 때,

우리로 하여금 부당한 지배에 순종하며

봉사하게 하는 두려움,

우리를 결박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그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두려움을

직시하여 ‘두려움’이라고 인정하고,

그 두려움과 순응이

모태가 같은 형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도 두려움 없이 살 수 있지 않을까’하고

그것을 시험할 준비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서 솟아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07 데블 메이 케어
시배스천 폭스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내 기억에 남아 있는 007에 대한 첫 기억. 음. 숀 코네리나 로저 무어 같은 옛 배우들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한참 여러 편의 시리즈에 출연한 배우도 아니었던 것 같다. 암튼….

 

프랑스 파리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액션신을 연출했던 작품이었다. 본드 걸이 흑인 배우였다는 것도 기억나고, 암튼 무슨 성인영화를 훔쳐보는 듯한 감동(!)으로(당시 내가 미성년자였고, 007이 성인영화이긴 하지. 아동영화는 아니니….) 감상했던 기억이 난다.

 

영국의 소설가 이언 플레밍이 007시리즈를 처음 선보인 것은 한반도의 전쟁이 비로소 멈춘 1953년이었다. 007은 그야말로 냉전과 함께 탄생한 ‘냉전의 아이콘’이었다. 구 소련 등 공산주의권 국가에 대한 공포와 증오로 만들어진 007. 이제 냉전이 끝나고 더 이상의 이념 갈등은 없다고 말들 하는 지금, 이지만 역시나 007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1억 권이 넘게 팔렸다는 007시리즈. 이언 플레밍은 이제 가고 없지만, 많은 후배 작가들이 그를 기념하는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다. 《데블 메이 케어》의 작가 시배스천 폭스 역시 그 중 하나다.

 

007시리즈는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무기와 함께 등장한다. 영국의 비밀 정보국, 즉 007의 직장(!) M16은 세계를 붉게 물들이려는 악당의 무리들과 필사의 대결을 벌인다. 물론 언제나 승리는 007의 몫. 그리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자본주의 사회의 몫이다.

 

《데블 메이 케어》에 등장하는 악당은 영국을 증오하는 인물이다. 물론 제정신은 아니고. 콤플렉스와 광기로 가득 찬 인물이 등장한다. 이 악당은 영국이 너무나 싫어서 소련과의 전쟁을 유도한다. 그렇다면 공멸인가.

 

007시리즈는 우리 편과 적의 명확한 구분 아래 시작한다. 그래야 시원시원하고, 독자나 관객들이 몰입하며 작품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악당은 결국 패배해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로 전개된다. 만약 악당이 승리하고 작품이 끝나버린다면? 뭐, 아마 속편이 나오겠지.

 

007시리즈는 모든 첩보영화의 기본 골격을 만들어준 작품이다. 〈미션임파서블〉이나 기타 수많은 첩보영화들은 007을 떼놓고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았다는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기본 구조에 충실했다는 반증이다. 증오와 대립, 반전과 유쾌한 승리. 영국 혹은 미국이 결국 이 미개한 인간들을 멸망에서 구해내고, 인류는 몇 나라들의 첩보원 몇몇으로 다시 생을 이어간다. 아름답다!

 

문학은 문학으로 이해해야 하고, 즐겨야 한다. 시비 걸고 싶지 않다. 전혀. 하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미개한 족속에 속하는 나로서는 마냥 즐겁게 볼 수만은 없다. 아름다운 본드걸이 등장하고, 온갖 화려한 액션과 거대한 스케일이 스크린을 압도해도 말이다.

 

1962년 10월, 전 세계의 운명은 미국과 소련의 핵 장난질로 멸망의 문턱까지 간 바 있다. 1994년 한반도는 미국 대통령의 한 마디로 불바다가 될 뻔 했다. 현실 역시 우리 의지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아쉽지만 현실이다.

 

영화를 통해 미국은, 영국은, 이른 바 선진국이라 말하는 패권국가들은(사실 영국을 패권국가라 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전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만방에 알린다. 아울러 자신들의 정의감, 선의를 믿어 의심치 말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현실과는 다른 이야기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약이 없어,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아이들은, 선진국 대통령의 한 마디에, 선진국이라 말하는 집단들의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대부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지적 재산권, 특허권이란 명분으로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의 숫자를 알게 된다면, 환멸을 넘어 인간에 대한 회의마저 들 것이다. 정말 돈을 위해 아이들을 매일 학살하고 있는 것이 같은 인간인지 말이다.

 

그래, 영화는 영화로 보자.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고, 온갖 명배우들이 출동해서 고생해가며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내니, 우리는 즐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적어도 진실은 무엇인지 명확히 알며 읽을 수 있고,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이들이, 난 그런 사람들이 그래도 다행스럽게 믿음직한 ‘시민’들이라 생각하고 싶다.

 

역대 007시리즈를 한 번쯤 다시 쭉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예 이언 플레밍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출시된 007시리즈 DVD전집을 구입할까도 생각해봤다. 뭐, 여유가 있으면 그러고도 싶다. 하지만 먼저 읽고 봐야할 우리의 이야기들이 더 많다. 그때까지 본드여, 조금만 기다려 달라. 아직 때가 아니다.

 

이언 플레밍의 재림이라 불리는 시배스천 폭스의 문장력도 나쁘지 않다. 한 번 읽고 그냥 그렇게 유쾌하게 덮으면 될 책이다. 아, 그런데 이건 또 뭐냐. 다른 007시리즈가 서재에서 보이는 이유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수녀들과 선교사들을 많이 파견했지. 정작 프랑스 본토에서는 1789년부터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면서 종교를 대단찮게 여기면서도 자기들한테 땅을 빼앗긴 힘없는 유색 인종에게는 언제나 가톨릭 신앙을 전파했거든. 아마 그렇게 해야 양심의 가책이 덜한 모양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상천녀 1 - 젊은날의 백일몽과도 같은 환상기담!
요시다 아키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애니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사실 일본 만화에 대해 그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편이 아니다. 때문에 ‘요시다 아키미’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이 전무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나나 피시》에 대해서도 몰랐으니, 원체 무식함이 자랑인 녀석이다.

 

《길상천녀》는 제29회 쇼가쿠칸만화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한다. 이 작품으로 스타작가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니, 대표작 중 하나라 할 만 하다. 일본의 전통적인 천녀 전설을 현대와 접목시켜 인간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는 문제작이다.

 

확실히 예전 스타일의 만화다보니, 그림체가 약간은 옛스러운 느낌이 난다. 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스타일을 좋아하는 나에겐 오히려 읽기에 거부감이 없었다. 촌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역시 이젠 늙었다는 서글픔이….

 

내용은 뭐라 그럴까, 판타지 스릴러 정도? 천녀의 전설을 지닌 유서 깊은 가문 카노 가(家)의 딸 사요코는 절세의 미모를 지닌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다. 그녀는 자신의 집안 재산을 노리는 토노 가의 아키라와 료를 상대로 숨막히는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그 와중에 그녀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남자들이 하나씩 죽기 시작한다.

 

지금은 물론 그렇지 않지만, 어린 시절 우리 만화를 보면서 느낀 아쉬움 중 이런 게 있었다. 소재의 빈약함. 물론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분명 작가들 역시 이러한 한계에 괴로워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을 표현하는 것조차 법의 판단,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자들의 판단에 좌우되는 어처구니없는 시대에 살았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이 지금도 아예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도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100% 누리지 못하며 살고 있다.

 

반면 일본 작가들의 만화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향연이었다. 단순히 흥미를 자극하기 위한 만화에서부터 장대한 스케일을 내뿜는 대작에 이르기까지, 스토리도 주제도 정말 다양하다는 감탄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작가들이 유독 뛰어나다거나, 우리 작가들의 상상력이 초라해서가 아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만화에 대한 투자와 관심을 두었을 뿐이다. 그 차이를 무시하면 안 된다. 오히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성장한 우리 만화가 더 대단하다는 평가를 내려야 마땅하다. 이건 애국심 따위와는 상관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지금도 재미있게 읽었던 일본 만화들이 떠오른다. 물론 내가 마니아 수준까지는 아니어서 다양한 작품들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아주 유명하거나, 평가가 높은 작품들은 어느 정도 읽은 것 같다. 여기에 내 개인적 취향도 포함되고.

 

《길상천녀》는 지금 읽으면 감흥이 덜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있다. 적어도 난 이 작품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무지막지한 편견과 폭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은 끔찍한 사실이다.

 

주인공 사요코는 뛰어난 미모로 인해 늘 남성들의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이는 남성들에겐 소유하고픈 하나의 정복 대상에 불과하다. 여성의 性(성)이 상품화, 전시화되는 지금의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다.

 

나는 작품을 읽으며 문득 강인규 교수(《망가뜨린 것 모른 척 한 것 바꿔야 할 것》의 저자)가 말했던 아이돌 그룹에 대한 글이 떠올랐다. 지금 여성 아이돌을 바라보는 시각이 과연 온전한 것인지, 아니, 여성아이돌들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오며, 인기를 얻고 있는지를 분석한 강 교수의 글은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한다. 소개하고 싶지만, 참겠다. 직접 확인하시길.

 

경제가 발전했다는데, 이상하게 한국의 자살률은 높아만 간다. 그것도 젊은 여성들의 자살률이 남성의 그것보다 앞선 것은 한참 된 일이라 한다. 왜 그럴까? 이 시대 여성들이 행복하다면 그렇게 많은 자살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또 개인적 문제로 덮어버릴 것인가? 다들 마음이 굳세지 못해서? 그렇게 말하는 인간에게 되묻고 싶다. 마음이 약하면 죽어버려야 하는 게, 그런 게 아름다운 세상인가?

 

저자는 일찌감치 남녀 차별과 여성에 대한 착취 그리고 성적 상품화에 대해 예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이 작품에서 어떻게 거기까지 나가냐고, 너무 앞선 해석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직접 확인해보시면 알 것이다.

 

경제적 압박으로 사랑조차 나눌 수 없게 된 청춘들. 그리고 젊은 여성들. 그들은 사회적 차별과 억압이라는 또 다른 굴레를 함께 짊어지며, 남성들과 경쟁에 나선다. 이 땅의 모든 딸들이 행복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는 것 아닐까? 곧 소멸되겠지.

 

때문이다. 이 작품이 단순히 기구한 운명을 가진 한 여성의 무시무시한 복수극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가.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를 여성들에게 알게 모르게 주었을까. 지금의 현상을 깨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이 땅의 모든 남성들은 어쩔 수 없이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반성하며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이란 말도 없이
우에노 켄타로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누구나 살아가며, 이별을 합니다. 우리는 짐짓 이별에 담담한 척 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이별에 무너지고, 또 무너지게 됩니다.

 

여기 한 개그만화가가 있습니다. 평생 남을 웃겨야만 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갑자기, 정말 ‘안녕이란 말도 없이’ 곁을 떠나고 맙니다. 이 황당하고 엄청난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느낄 수 없는 슬픔. 그는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이 평생 해온 만화라는 방식을 통해서.

 

이 작품 전체에 흐르는 슬픔은 애절함이나 비통함보다는 갑작스런 상실에 대한 주인공의 당황과 혼란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아내와의 사소한 일상, 추억들을 되새기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됩니다. 장례를 마치자마자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혹시 이대로 아내를 잊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합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장례가 끝나면 사람들은 곧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배설을 하며, 그렇게 또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냉정하다거나, 고인에 대한 예의가 없음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슬픔을 안고 살아갈 뿐입니다.

 

저자의 고통과 슬픔을 느끼며 책장을 넘겨야 했기에,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틈틈이 자신의 장기인 웃음을 무심하게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다시 나락에서 조금씩 조금씩 올라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삶은 참 허무합니다. 멀쩡히 어제까지 있던 사람과 오늘 이별하게 될 수도 있고, 나 역시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모릅니다. 그럼 이렇게 매일 아등바등 하면서 살 필요가 있나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에, 아무렇게나 살기 보다는 그래도 노력하며, 조금이나마 나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만화가 이렇게 무거워도 되는 거야? 혹은 이렇게 슬퍼도 되는 거야? 라고 하소연하실 수도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분명 삶의 의미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책임엔 분명한 듯 합니다.

 

많은 이들이 오늘도 우리 곁을 떠나갑니다. 그리곤 또 많은 이들이 우리 곁에 다가오겠지요. 이 모든 소중한 인연, 아름답고 후회 없게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부 인사 전하는 것도 잊지 말고요.

 

“어서와”

 

“안녕”이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 4월에서 8월까지 모든 진보에게 묻는다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권력은 태생 자체가 거대담론을 좋아해. 아주 많이. 때문에 내 월급 통장에 5만 원이 더 들어오는 것보다, 우리나라가 G20정상회의를 개최하고, 듣도 보도 못했던 핵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하는 것에 더 자부심을 가지라고 윽박질러. 뭐 사실 그렇게 좋아한 국민들도 별로 없었는데 말야.

 

그럼에도 권력은 말야. 우리가 그딴 건방진 모임이나 회의를 개최하거나 주최국이 된 것을 마치 국가가 꽤 성장한 것인양, 우리가 선진국으로 훌쩍 발돋움한 것인양 떠벌리곤 해. 그리고 그 따위 행사를 치르기 위해 국민들의 불편이나 뭐 이런 것은 신경에 쓰지도 않고.

 

손석춘 선생은 내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야. 이상하게 내가 존경하는 분들 중 상당 수가 보수 진영에서는 친북좌파라고 하더군. 글쎄, 그 말이 사실인 것인지는 보수 진영이 그리도 좋아하는 ‘역사가 평가’해 주겠지만, 적어도 내가 존경하는 분들은 가식적이지 않고, 썩지도 않았으며, 남을 무시하거나 억압하지도 않는 분들이야.

 

선생의 글을 읽다보면 글을 잘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게 돼. 그리고 진정 좋은 글은 온갖 미사여구에다가 외국 유명인사의 글 따위를 인용하는 게 아닌, 삶에서 우러나온 곰탕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정말이지 고맙고도 고마운 분이야.

 

하지만 이번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는 감탄보다는 울컥거리는 마음을 계속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소위 진보 진영이 처해있는 아찔한 상황과 그렇게 된 배경,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선생의 절실함이 담겨 있었거든.

 

통합진보당은 통합도 진보도 보여주지 못하고 무너졌어. 진보 진영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같이 감방가고 같이 투쟁하고 같이 진보의 세상을 꿈꿨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죽일 듯한 원수 사이가 되었지. 누구의 잘못이냐도 물론 중요해. 억울하게 보수 진영이나 쓰레기 언론들에 의해 희생된 분들도 물론 계시지. 하지만 국민들은, 대다수 국민들은 말이야. 누구 잘못이냐를 따지지 않아. 그냥 ‘저것들도 별 수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으로 끝나. 국민들이 멍청한 탓도 있겠지. 하지만 진보 진영에서 보여준 자중지란은 분명 큰 잘못과 책임이 있어.

 

선생은 책에서 이 땅에 모든 진보들에게 호소하고 있어. 진보는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고. 그리고 모든 세대에 걸쳐 존재하는 진보의 새로운 시작을 다시 꿈꾸자고. 1960년 4·19혁명 세대에서 1996년 8월 연세대 통일집회의 한총련 세대까지. 이 땅의 모든 진보가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뜨겁게 일어서자고 말하고 있어.

 

우씨, 이런데 울컥하지 않겠어? 선생의 말처럼 지금 진보는 ‘신자유주의 체제와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운동’으로 거듭나야 할 시점이야. 말이 어렵다고? 돈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전쟁과 증오를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말자는 말이야!

 

일부러 외면하면 세상은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고 누가 말했어. 그런데 우린 이제 그 수준을 넘어선 듯해. 아무리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무너지는 이웃들, 썩어가는 이 땅, 이 강, 이 바다, 더욱 더 착취를 일상화하려는 권력들의 광기가 느껴져. 하다못해 이 땅의 1%도 더 이상 편하게 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오고 있는 거야.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야? 도대체 뭐가 잘사는 나라야? 혹시 알아? 아이 낳기가 두렵고 노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야. 근데 잘 사는 나라야? 수치나 통계 좋아하시는 보수 분들 많이 있지? 한국갤럽에서 1992년과 2010년 사이의 소득변화와 행복지수 사이에 관계를 조사했거든? 이 시기에 국민소득은 3배나 커졌지만, 행복감을 느끼는 이들은 오히려 10%나 줄었어. 그리고 같은 시기에 하루 평균 자살자는 9.9명에서 42.6명으로 4배나 늘었고.

 

정말 생각해보자. 우리가 행복해? 그런데 아버지에 이어 권력을 잡겠다는 어떤 분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또 설레발을 치고 있다. 공부 좀 하신 분이 왜 그럴까? 우리나라는 더 이상 ‘내 꿈’으로는 안돼. ‘네 꿈’‘우리 꿈’을 함께 이뤄나가야 살아갈 수 있어. 행복할 수 있다고. 우리가 없는 나는 이미 행복하지 않아.

 

하지만 지금까지 우린 남을 밟고 나만 잘 사는 것을 가르쳐 왔어. 우리 사회는 ‘우리의 꿈’을 말하면 포퓰리즘이고 좌파라고 낙인찍어. 오직 나만 잘 살면 된다고 말해. 이게 정상이야?

 

어떤 사람들은 또 그래. 이명박 정부 5년이 너무 괴로웠다고, 이번 선거에서 두고 보자고 이를 박박 갈아. 하지만 강인규 교수도 말했듯, 착각하지 마. 지금 우리 사회가 비정상적이고, 최악의 야만 사회가 된 것은 이명박 대통령 잘못이 아니야. 지도자 하나 갈아치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우리의 비인간적인 탐욕이 비인간적이고 탐욕스러운 지도자를 고른 것 뿐’이야.

 

우린 모두 공감의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더라. 한 아기가 울면 옆에 있던 아기들도 따라 울잖아. 연대의식을 발휘해 주는 거야. 혼자 울지 말라고. 우리도 옆에서 누가 하품하면 따라하지? 왜 그럴까?

 

미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가 바뀌지 전에, 바로 내가 바뀌어야 해. 내가 변한 딱 그만큼 세상이 변하는 거야. 자, 그럼 손 선생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뭐겠니?

 

진보도 역시 권력을 차지해야 하고, 그 권력을 온전히 국민들을 위해 정의롭게 사용해야 해.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 과정이 보수와 마찬가지로 더럽고 추잡스럽다면? 권력을 잡지 말아야해. 많은 사람들이 민주통합당을 진보라 말하더라? 미쳤어? 민주통합당은 단 한 번도 진보인 적이 없었어. 여전히 맘에 안 들겠지만, 이 땅의 진보는 정치세력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통합진보당이고, 진보신당이고, 진보정의당이야.

 

정치가 중요해. 당연하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게 있어. 백 배는 중요해. 바로 당신이야. 당신이 투표를 하는 것도 아름답지만, 당신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해. 이웃을 존중하고, 정의를 사랑하고, 상식을 지키려 노력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우리는 거수기가 아니야. 5년마다 한 번씩 투표할 때만 시민이 아니라고. 그때만 민주시민인 척 하지 말자고. 그냥 하루하루 더럽지 않게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니까 나는 완전 성인군자같이 보이네. 물론 나도 아니지. 나도 더럽고 겁 많고 찌질해. 하지만 적어도 양심을 지키며 살고 싶어. 노력하고 있다고.

 

손 선생이 말한 것처럼 진보 진영의 대통합은 이번 대선 전까지 힘들 것 같아. 아무리 호소하면 뭘 하나. 인간들이 말을 들어먹지 않는데. 하지만 손 선생과 같은 분들은 반드시 이 땅에 존재해야해. 물론이지.

 

이 땅의 진보만 뭉치지 말자. 보수 진영들이 박정희를 반인반신의 경지에까지 올려 두었다고 한탄하지만 말고, 일상의 행동으로 쿨하게 상식을 지키며, 무엇이 정의인지 아이들에게 가르치며 살자고. 그러면 반드시 희망은 생겨. 그리고 바뀔 수 있어. 손 선생의 간곡한 호소를 잊지 말자고. 기억하자고. 그리고 실천에 옮겨보자고.

 

아, 그러기 위해서 선생은 부단히 공부하고 토론하라 하셨는데, 이놈의 게으름이 영 발목을 잡네. 하지만, 지난 5년을 견뎠는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 함 해보자고! 아, 생각해보니 지난 5년은 정말 군대를 다시 갔다 온 것 같았어. 너무 박터졌어.

 

우리는 올 해 12월만을 위해 살진 않아. 내년도 오잖아? 책의 제목은 ‘세계 7대 강국의 찬가를 부르대던 2012년 6월 바로 그 시점에 수도권에서 어느 60대 부부가 남긴 유서의 첫 문장’에서 따온 거야.

 

‘그동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월세방에서 15만 900원의 노인수당으로 살아온 노부부였어. 야, 이러면서 우리 선진국이니 복지병이니 경쟁력 강화니 떠들지 말자. 정말 양심 좀 갖고 살자고. 우리 인간이잖아.

 

바로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왜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지, 이제 우리 고민 좀 하고 살자. 사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