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비친 우리의 초상
조한욱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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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담았던 정든 일터에서 떠나야 했고, 그 와중에 아내의 뱃속에서는 내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나의 정신 상태는 희미했으며, 세상은 너무도 부조리하게만 보였다.

 

실직과 함께 백수가 된다는 사실이 가장 큰 공포는 아니었다. 예전에도 급작스럽게 사표를 던지고 속없는 녀석처럼 즐겁게 백수 생활을 즐긴 적도 있었으니.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그 사이 더 늙어버린 내 모습도 초라했지만, 새로운 생명 앞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려왔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세상이었다. 도무지 온전한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살아오며 배웠던, 믿어 의심치 않았던, 확신했던 모든 가치들이 실은 아무런 힘도 없는 모래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정의는 사라졌다. 공정사회를 외치는 사회 속에서 정작 공정함은 실종되고 말았다. 정의구현사회를 외치던 대통령이 이제는 숨겨두었던 피 묻은 재산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는 것처럼,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외치던 이들은 줄줄이 감옥행 아니면 짐짓 모른 채 하고 있었다.

 

힘없는 이들의 절규와 곧 이은 죽음들이 이어졌다. 야만의 정글 속에서 채 재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그렇게 누군가에게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다 스러져갔다. 합법적이라는 단어, 공무집행 방해라는 단어가 치졸하게만, 역겹게만 들려왔다. 무엇이 합법적이고 무엇이 공무집행 방해인지 정의내리기 힘들었다. 다들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들처럼 허우적대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만 같았다.

 

인간은 위대하다. 하지만 동시에 망각의 동물이자, 회피의 동물이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많은 시행착오와 비극을 겪어왔지만, 정작 그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그다지 큰 교훈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

 

이명박 시대의 모든 야만은 천지개벽처럼 새로운 일들이 아니었다. 이 세상 어디에선가 유사한 일들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왔고,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인간은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역사를 슬그머니 외면한다. 지금의 우리처럼.

 

책은 서양사를 전공한 저자가 서양사 곳곳에서 찾아낸 ‘이성의 야만’ 사례를 들며, 이를 지금의 우리 모습과 함께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한다. 그 요구는 잔인하다. 우리는 이성의 야만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세상이 결코 ‘처음’이 아님을 말한다. 그렇기에 더욱 더 분노한다.

 

전쟁의 끔찍함을 겪은 우리가 다시금 전쟁을 운운하고, 이명박 정부 시기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까지 치달았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이라면 누구라도 반대하고 뿌리쳐야 할 전쟁이란 단어가 서슴없이 여기저기에서 호명되었다. 북한이 핵을 가졌으니, 우리 역시 핵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엄청난 이야기들이 거리낌 없이 나왔다. 그것도 지식인, 정치인의 입에서. 세상은 끔찍했다.

 

저자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종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겉으로는 그럴듯한 언어로 포장되어 잘 보이지 않는 ‘이성의 야만’이라는 아이러니에 마주 친다”고 말한다. 그것은 4대강 정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운하사업이 버젓이 벌어지고, 구제역 청정국 유지라는 미명 하에 백만 단위로 무고한 가축을 도륙하는 세상이었다. 법치라는 명목 아래 법은 있는 자들의 큰 권한을 비호하고, 없는 자들의 작은 권리마저 박탈하는 세상이었다. 그것은 일본 지진이라는 미증유의 참사를 곁에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실익을 위해 미래의 세대에 위험을 전가하는 세상이었다. 그것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빙자해 오히려 언론인이나 예술가들의 상상력과 생존권에 족쇄를 채우는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곧 태어날 나의 아이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이 세상을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난처했다. 아무런 인연이 없는 곳, 아무런 아픔도 들리지 않는 곳을 찾아 떠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성의 야만이 우리의 머릿속을 더럽히는 이 세상에서 현실을 개선시킬 출발점은 결국 그 모든 모순과 야만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스테판 에셀이 호소했던 것처럼 그 부당한 현실에 분노해야 한다.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 그것이 이성의 야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진정한 생존법이 아닐까.

 

저자는 1963년 6월 베트남 고딘디엠 독재 정권의 불교 탄압에 항거해 사이공 한복판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소신공양한 틱광득 스님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 사진을 찍은 작가는 퓰리처상을 받았고, 전 세계 사람들은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 고딘디엠 정권은 여기에 냉소를 보냈지만, 곧 정권은 무너졌다.

 

2010년 5월 31일, 경북 군위에 있는 지보사의 문수 스님은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폐기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소신공양했다. 자연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핍박받는 인간에 대한 가없는 자애심에 저자는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일갈한다.

 

“그런데도 보수 매체에서는 이 사건을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그들 역시 고딘디엠 정권의 최후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저자는 우리 사회의 탐욕, 위선과 기만, 강압, 차별, 배신, 몽매, 분노 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이, 과연 어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살아가며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딱 그만큼, 부당한 사회의 모습에 분노한다면, 세상은 어쩌면 조금 더 살만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깔끔하고 정제된 단어로 글을 풀어가는 저자의 내공에 감탄하면서도, 그보다 더 부러웠던 것은 어떤 곳을 바라봐도 함께 하는 따뜻함과 연대의 정신이다. 아직 제대로 붙어보지도 못하고 지레 겁먹어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자신감을 전해주는. 고마운 책이다.

 

그래서 지금 나의 결론? 다시 박 터지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내 딸에게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전해주는 것. 아름답고 슬기롭게,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찬찬히 가르쳐 줄 것.

 

이상이다. 아, 딸아~! 연애도 마음껏 해라~! 단 1차 서류면접 2차 현장면접 3차 논술 테스트가 있단다. 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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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아빠 2013-09-26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석광득 스님과 문수스님 소신 공양하신 부처들
 
정당한 위반 - 나쁜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묻는다
박용현 지음 / 철수와영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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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글로 말미암아 누군가 깊은 울림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니, 깊은 울림까지는 감히 바라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그 어떤 작은 이야기나마 전해주고자 한다. 글쓰기는 나와 너 사이의 진중한 대화가 아닌가.

 

하지만 대부분 겁쟁이이자 소심한 글쟁이들은 정작 자신의 마음을 ‘쿵’하고 울리는 글을 만날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겁쟁이이자, 소심한 그들은 또한 그리하여 지극히 마음이 여리고 눈물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내가 일컫는 글쟁이들은 돈이나 명예 따위에 글을 팔고 살아가는 이를 뜻하지 않는다. 물론 생계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돈이나 명예 따위에 글을 팔고 살아가는 이’들은 주로 거짓과 기만으로 많은 이들에게 ‘독’과 같은 글을 써대는 이들을 말한다. 그러니 이들은 내 기준에서는 글쟁이라 할 수 없다. 구역질도 아까운 이들일 뿐.

 

나 역시 마찬가지다. 멋이 들어지게 눈물 나는 글을 만나거나, 먹먹하고 뻐근한 이야기들을 읽을 때면, 솔직히 아프고 두렵다. 아, 생각해보니 이렇게 말하면 나 스스로 ‘나는 글쟁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셈이구나. 부끄럽다. 그냥 글쟁이 흉내 내는 어설픈 삼류 중 삼류다.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한 저자의 글은 내게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그는 세상 어느 한 곳 아픈 곳들을 놓칠세라 눈물겹게 눈을 부릅뜨고 글을 써왔다. 그 눈에서 서러움과 억울함, 연민의 눈물이 철철 흘러내려도, 채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여린 눈으로 세상의 온갖 서러움과 아픔을 다독거리려 노력했다.

 

2012년 말 집어 들고, 차마 빠르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질질 끌어왔다. 절망과 한숨이 이 땅 곳곳에 울리고 있는데, 그 아픔을 더욱 더 확실하게 각인시켜 줄 것만 같아, 아무래도 미완의 독서로 남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저자 역시 끝내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관심의 손, 외면의 손대신 타인과의 공감, 연대의 손, 서로를 끌어당기는 점성의 힘을 저자는 믿었다. 그리고 더러운 세상 속에 살아야 할 우리 모두를 위한 연서를 끝내 써내려갔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전보다 더 세련되어져 더더욱 잔혹하고, 예측보다 더 은밀해져 더더욱 야비한” 모습이다. “과거에는 일도양단의 명쾌한 논리로 정의와 부정의를 재단할 수 있었다지만, 이제 세상은 회색의 정의를 둘러 입고 그 모호함 속으로 추악한 본모습을 숨겨버렸다”

 

어찌 해야 하는가. 이대로 더러운 세상에 한 가득 침이나 뱉어주고 콱 죽어버려야 할까. 거꾸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더 이상 미련 따위 두지 말고 영영 눈을 감아버려야 할까.

 

아니다. 저자는 나쁜 세상을 그대로 기록하고, 그 세상에서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법을 종이에 옮겼다. “나쁜 세상에 깨지고, 스스로 성찰하고, 다시 일어나 부딪쳐 살아가고, 몸과 마음에 멍이 들어도 여전히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놓지 않는” 처절한 끈질김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얼마나 고마운가. 상식이라는 것에 대한 갈증으로 목이 말라 죽어가는 이들에게 그의 글은 분명 시원한 냉수 한 잔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끝내 생을 지탱하게 해주는 고마운 생명수임은 분명하다. 적어도 나는 그의 글에서 수많은 분노와 위안을 동시에 느꼈으니 말이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한 전직 대통령이자, 범죄자는 꽁꽁 숨겨둔 재산이 얼마인지 헤아리기 힘들고, 가난한 이들의 표로 당선된 귀족 출신의 대통령은 자신의 높은 지지도에 만족하며, 힘없고 소외된 이들의 외침에 귀를 닫고 있다.

 

자신이 대통령에 오르기 전 10년의 세월을 ‘잃어버린 10년’이라 당당히 명토 박아 두었던 전직 대통령은 정작 자신의 임기 중 우리가 잃어버리고 빼앗긴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다는 모습이다

 

이 책이 나온 후 두 해가 지나가는 지금도 역시 세상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더럽고 추악하다. 그리고 눈물겹게 치열하다. 그 시간을 온전히 기억한다는 것은 더더욱 벅차고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나쁜 세상에 살아가는 법을 배우도록 강요한 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왜 그렇게 옳지 못한 선택과 행동을 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이웃들의 눈물, 상처, 절망에 눈감지 말고, 그들의 고통이 곧 나에게 이어질 것이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외면해선 안 되리라.

 

저자는 해박하다. 어설픈 지식의 향연을 벌이거나 같잖은 논리로 다른 나라의 지식을 주워섬기는 사기꾼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삶의 치열한 복판 속에서 온 종일 아래만 두리번거리며, 함께 울어온 이만이 보여줄 수 있는 해박함이다. 눈물이 만든, 연대와 점성의 가치를 깨달은 해박함이다. 그렇기에 한 없이 부럽고, 또 고맙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선이고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악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 반대 역시 듣기 싫다. 하지만 지난 5년이 우리에게 준 상처와 아픔은 여간 크지 않았다. 애써 만들어 온 가치들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기란 여간 벅차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추락을 목격하고 있다.

 

책은 그 추락의 기록이자, 다시 날아오르고픈 희망의 고백이다. 아프지만 기억하고 생각해야 할 이야기들이다. 외면할 수 없다. 그럴 수도 없다.

 

매일 쓰레기와 같은 글들이, 이야기들이 오르내린다. 진실을 가리고 외면하는 이들의 끔찍한 욕망과 저열함이 나라 전체를 썩게 만든다. 추악한 권력의 범죄를 폭로하고 단죄하려 하기보다는 숨기고 덮어두기에 급급한 언론 그리고 언론인이라는 이들. 그들에게 저자의 글은 무엇보다 두려운 존재이리라.

 

저자와 같은 언론인, 기자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적어도 존경할 만한 선배들이, 언론인들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많이 배우고 많이 깨우쳤다.

 

위반은 ‘법률, 명령, 약속 따위를 지키지 않고 어기는 것’을 말한다. 정당한 위반은 그러나 이 시대에서 모순이 아니다. 대상을 선별해 적용하는 법, 명령, 약속 따위는 준수할 가치가 없다. 우리는 슬프게도 정당한 위반이 ‘정당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정당한 위반이 모순처럼 들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책을 덮는다. 감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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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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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지역을 무엇이라 지칭하느냐, 즉 어떻게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서울이 대한민국에서 단지 수도라는 의미만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동북아 국가인지, 환태평양, 아태평양 국가인지, 그냥 넓게 동아시아 국가인지, 보다 더 넓게 아시아 국가인지. 어떤 식으로 이름을 붙이고 규정하느냐에 따라 이해관계와 정체성은 변하게 된다.

 

때문에 항상 나는 우리나라 언론의 행태에 분노해 오곤 했다. 북한이라니? 세상에 북한이란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정말 북이 민주주의 국가인지, 인민을 우선시하는 공화국인지는 그 다음 문제이다. 우리가 우리 멋대로 상대 국가의 이름을 왜곡하여 부를 권리는 없다. 때문에 북 역시 우리를 ‘남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당치 않다. 대한민국이라 불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고집스럽게 북을 ‘북한’이라 부른다. 이는 상대방을 온전한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나 다름없다. 유치하고, 경박한 냉전시대의 유물이다. 그러면서 무슨 상호존중이며, 화해 협력인가.

 

자, 그렇다면 이제 강남을 살펴보자. ‘한강의 남쪽’이라 강남이라는 소리는 이제 우습고, 강남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 되었다. 선거 때마다 나오곤 하는 강남3구로 상징되는 극도의 이기주의, 혹은 보수성으로 인식되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이른 바 잘 사는 인간들이 모여 산다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정말 잘 사는 부자들은 더 이상 강남에 살지 않지만 말이다.

 

또 한 편으로는 좋은 가정 배경, 화려한 이력, 높은 학력, 풍족한 경제력을 가졌으면서 동시에 진보적 정치 성향을 보여주는 이들을 이른 바 ‘강남 좌파’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럴 때 강남은 특정 지역을 뜻하기보다, 재력, 혹은 높은 학력을 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강남은 대한민국에서 애증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강남을 저주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할까? 강남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젊은 세대들은 자신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는 한 강남 형성사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 벼락부자, 부모 잘 만나 호강하는 인간들이라는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조롱하면서도 부러워할 뿐이다.

 

《강남몽》은 바로 이런 강남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우리 현대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비극을 다시 호명하며, 그 곳에서부터 다시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현대사를 톺아본다.

 

강남의 역사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숨 쉴 틈조차 없이 빠르게 모든 것이 변해갔고, 그 사이에서 사람들 역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는 그야말로 일확천금의 행운을 맞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그 반대의 상황을 맞기도 했다. 법과 정의, 상식에 의한 변화보다는 부정, 야합, 독단과 부패가 더 어울리는 일들이 다반사로 이뤄지기도 했다.

 

어그러진 한국 현대사의 출발점은 일제 식민지 역사의 조악한 청산에서 시작된다. 단죄 받아 마땅한 이들이 거죽을 바꾸고 새롭게 태어났고, 역사의 올바른 흐름을 믿었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몰락하거나, 혹은 생명을 잃기도 했다. 그 과정은 고스란히 기형적인 구조를 사회 내부에 만들어 냈으며, 결국 지금과 같이 부패한 물질 만능시대, 부패와 야합의 후진적 정치, 바른 역사의식과 정의의 실종 시대를 만들어 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른 바 ‘강남 불패’ 신화에서 더욱 굳어지게 된다. 하루에도 몇 배씩 뛰어오르는 땅값으로 평생 땀 흘려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큰돈을 챙겨가는 사람들. 그들은 높은 어르신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일반인들은 알 수조차 없는 정보들을 근거로 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부를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물려 줄 수 있었다.

 

때문에 강남은 오늘도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자, 애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집단 이기주의, 지역주의 등으로 포장한다 해도 결국 그것은 집단이 아닌 돈에 의해 굴러가는 시스템일 뿐이다. 조롱과 선망의 이유조차 돈이 좌우한다. 강남의 꿈은 어그러진 코리안 드림의 하나일 뿐이다.

 

작가는 책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어둡고도 가슴 뻐근했던 이야기들을 마치 한 나절 꿈처럼 풀어 놓는다. 그리고 그 안에 다양한 군상들이 꿈꾸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덤덤히 묻는다.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숨 가쁘게 살아왔을까.

 

책을 덮은 후 2013년을 바라본다. 돈이면 무엇이든 합리화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 시대 수많은 ‘정아’들은 오늘도 애써 미소를 지어가며, 끈질긴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들의 삶이 비루하다고, 보잘 것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누구인가. 그야말로 비루한 삶을 살아온 이들은 정작 따로 있지 않을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우리 모두 한바탕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그 모두가 결코 온전히 비루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위로하자. 다시 시작하기에 너무도 늦었고, 너무도 썩었다 해도, 적어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나.

 

강남의 꿈은 우리가 그럼에도 안고 가야 할 짐이다. 어그러진 시작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어긋나고 비루하리란 체념도 굳이 필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것이리라. 개발독재의 시대 이후, 저자의 말대로 자본주의 스스로 재생산이 가능한 시기도 이제 지나가고 있다. 그 다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 역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 때는 부디.

 

강남 보다 더 아름다운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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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모아 극장
엔도 슈사쿠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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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참으로 소중한 시대에 살고 있다. 아직 많은 나이를 섭취하진 못했지만, 정말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배가 당기도록 웃어젖힌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깜빡거린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인데, 매일 출근길에 만나는 수많은 이웃들의 얼굴을 보자면 웃음기라고는 당최 찾기 힘들다. 하긴 모두들 얼굴을 스마트폰에 처박고 있으니 잘 보이지도 않지만.

 

예전부터 사람들을 곧잘 웃긴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온 편이다. 실없는 말장난이나 허무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피식거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것도 다 지난 얘기고, 내 스스로가 웃음을 잃으니 남을 웃게 한다는 것은 더욱 더 힘든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람은 웃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행복하게. 어처구니없어 짓는 쓰디 쓴 웃음이나, 허탈함에서 나오는 조소, 아니면 너무도 슬퍼 역설적으로 나오기도 하는 웃음과는 차원이 다른 웃음. 그런 웃음을 찾아야 한다. 그게 없다면 그야말로 재미 따위는 없는, 한심한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 사회는 웃기가 너무도 힘들게 되어버렸다. 고작 웃어도 티브이에 나오는 버라이어티 덕분일 때가 많다. 일상생활에서 우리 스스로 웃음을 찾는다는 것은 이미 힘들게 된 것일까. 우리는 무한도전이나 1박2일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웃을 수조차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뭐 그럼에도 유재석이나 이수근에게 훈장 정도는 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책의 저자인 엔도 슈사쿠는 《침묵》을 비롯한 기독교 계통 저술가로 유명한 일본 작가라고 한다. 아울러 20세기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란다. 역시 무지무지하게 무지한 나로서는 작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고, 이 책이 첫 만남이었다. 뭐 살짝 창피하긴 하지만, 요새 워낙 바빠서….

 

작품 활동 내내 일본의 주요한 문학상은 거의 섭렵했을 정도로 대단한 문인이었다고 옮긴이는 설명하고 있다. 대표작이라는 《하얀 사람》《침묵》《깊은 강》중 내가 들어본 것이라고는 《침묵》정도이다. 정말 일본 문학에 대해서는 조용히 침묵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런데 정작 작가 자신은 자신이 심각한 주제의 글만 쓰는 ‘재미없는’ 작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그렇게 싫었단다. 그래서 자신 스스로도 “나는 이런저런 형태로 나 자신이 경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애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했다”는 목적으로, 다양한 유머 에세이와 작품들을 썼다고 한다. 이 책 역시 그러한 시도 중 하나이다.

 

책에는 열두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첫 이야기인 〈마이크로 결사대〉는 사랑하는 여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여인의 몸속으로 직접 들어간 한 남자의 애절한(!) 인체 탈출기가 그려진다. 딱딱한 똥을 뚫고 이어지는 사랑의 대탐험은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 사랑의 위대함이여!

 

아울러 나머지 작품들도 모두 즐거운 미소를 짓게 만든다.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혹은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인데, 저급하다거나 요즘 식으로 말하면 ‘빵’ 터지는 스타일은 아니다. 은근히 우습고 미소 짓게 만드는, 그러니까 책을 덮고 그날 밤 자면서 떠올리며 웃게 되는 종류의 유머다. 유쾌한 경험이다.

 

하루 24시간을 내내 심각한 얼굴을 하며, 조국과 민족의 미래만을 생각할 수는 없다. 혹은 내가 지금 이렇게 일하고 있는 것은 시간당 얼마를 버는 것일까를 계산하며 조급해 할 필요도 없다. 아마 그렇게만 산다면 급속한 노화와, 화병으로 갑자기 세상과 작별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우리는 웃으며 싸우고, 웃으며 인생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생활 속 사소한 웃음은 분명 우리의 삶과 투쟁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대지진과 쓰나미라는 전대미문의 자연재해를 겪고 난 이후, 급속한 침체와 자신감 상실에 빠져 있다. 그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원래 보수적인 성향이 있는 국가라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을 정도로 극우 성향인 아베 정권이 들어서 더욱 더 일본을 세계 속 ‘왕따’로 만들고 있다. 부디 일본인들이 다시 웃음을 찾고 개념을 찾기를 바랄 뿐이다. 뭐 우리도 남 얘기할 상황은 아니지만.

 

일본이 자랑하는 작가 엔도 슈사쿠는 책을 통해 평범하면서도 품격 있는 유머를 선사하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하나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 새 우리의 마음도 예전보다는 덜 각박해지지 않을까 싶다. 출퇴근길에, 혹은 있는 힘껏 힘을 주는 화장실에서도 짬짬이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세를 바로 잡고 경건한 자세로 읽으면 안 된다는 소리는 아니니 오해 마시길.

 

제발, 일본이나 우리나 앞으로 웃는 일이 많이 좀 생겼으면 좋겠다.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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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김대중 완간 세트 - 전5권
백무현 글.그림 / 시대의창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무려 올 초에 읽었던 책을 이제야 이야기한다는 것이 매우 어색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읽은 책은 언제가 되었든 서평을 남겨야 한다는 매우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이렇게 늦었지만….

 

사실,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이 책을 끝내 이야기해야하는 것은 정작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어쩜 스스로 무언가 절박하게 믿고, 기대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아직 이 땅에, 이 시대에 상식이라는 것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차마 버리지 못하는 미련과도 같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시절 연평도를 방문해서 한껏 폼을 잡고 온 적이 있다. 당시 역겨운 언론들은 청와대가 불러주는 대로, ‘현직 대통령 사상 최전방 방문’이라고 떠벌리기 시작했다.

 

요새 언론들이야 하는 짓이 그런 것밖에 없으니, 이해하자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좀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네들이 주장하는 대로 MB가 최전방을 방문한 최초의 대통령이라면, 그만큼 국민들의 안위를 위해 최전방까지 방문하는 용기를 가진 위대한 인물이라면, 보수를 위장한 양아치 집단들이 소위 말하는 ‘적진’인 북한의 한복판에 들어가 ‘적장’과 담판을 짓고 내려온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무엇일까? 그들은 위대함을 넘어 초월적인 존재라도 된단 말인가?

 

역설적으로 청와대와 MB의 유치한 허세가 멍청한 언론을 타고,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더 높게 평가하게 만든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멍청하면 이래서 이래저래 골치 아프기도 하지만, 가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주기도 한다.

 

예전 이명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이기고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남북관계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박근혜 보다는 이명박이 그나마 나을 것이라는 생각. 이는 이명박이 대북정책에 대한 나름대로의 비전이나 철학이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 반대였다. 남북문제, 민족문제, 통일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더 두려운 것은 박근혜였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난 애초부터 박근혜가 북한을 싫어하는 차원을 넘어 증오한다고 생각해왔다. 자신의 개인적인 가족사와도 연결이 되겠지만, 애초부터 박근혜는 강력한 반공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뭐, 부친 박정희의 경력을 따지고 들자면 친일과 종북(남로당)의 피도 흐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난 박근혜가 더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이다. 상황을 보자. 이명박조차 건들지 않았던 최후의 마지노선 개성공단은 이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이 먼저 부당한 조처를 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의지만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개성공단은 재가동될 수 있었다는 사실도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울러 박근혜는 자신이 후보 시절 이야기한 것들과는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라는 당최 내용을 알 수 없는 구호만 외치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다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이라는 더더욱 달성하기 힘든 이야기까지 떠든다. 사실 그것은 미국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구상이다. 외교부는 아직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이나 구상조차 만들고 있지 못하다. 한심할 따름이다. 일단 말로만 떠들고 본 것이다.

 

이명박은 다시 말하지만 국가를 경영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당장 자신에게 주어질 이해관계, 쉽게 말해 돈에 따라 모든 것이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돈에 관한 한 그의 꼼꼼함은, 전두환에 따르지는 못하더라도 이미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남북관계가 다 뒤집어져도, 남북 서로가 영영 돌이킬 수 없는 불신의 나락으로 떨어져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북과 잘 지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봤자, 자신의 지지층만 불만을 가질 뿐, 어느 하나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북관계는커녕 외교의 기본적인 ABC조차 모르는 것들이 남북관계를 한답시고 설레발을 쳤고, 결과는 보시는 대로다. 북은 그 사이 핵 개발 능력을 더욱 키웠고, 이젠 비공식적인 핵 보유 국가가 되었다. 이명박 정권은 북한의 핵 개발 능력을 키워준 ‘반역 행위’를 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담, 박근혜는? 2002년인가, 북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한 경험까지 있는 그는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할 것인가? 과연 그는 남북관계 복원이라는 역사의 책임을 이행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서는 그것도 희박해 보인다. 현재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지지도가 60~70%를 넘어서고 있다. 개념 상실에다가 남북관계에 전혀 무관심인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정부 역시 기고만장이다. 즉,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씀. 남북관계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계획? 지금으로썬 이명박 정부와 다른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명색이 한 국가의 정보기관이라는 국정원은 동네 양아치 집단의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 게다가 대선 개입이라는 사상 초유의 불법 행위를 저질러놓고도 오히려 그걸 무마하고자,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두 정상의 대화록까지 공개하는 반국가적 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반성이나 쇄신의 노력은 없어 보인다. 아니, 스스로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사실조자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분명 사라져야 할 집단이다. 반국가 행위로 모두 다 잡아넣거나.

 

지금의 국제정세로 볼 때 앞으로 한반도 및 북핵 문제 해결에 있어 우리의 주도권이나 자율성, 독자성은 더더욱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어느 유명 대학의 국제학부 교수라는 이는 이명박 정권의 외교정책 중 잘 한 것으로 한미동맹 공고화를 통한 한반도 문제, 남북문제에서의 자율성 확보 및 강화라고 평가한 바 있다. 북한과의 관계를 10년 전으로 되돌려놓고 미국에 더더욱 종속되면서 경제적, 정치적 자산을 탕진한 것이 성과라고 주장하는 것에도 우습지만, 지금 전시작전권이라는 핵심적 주권을 다시 한 번 엎드려, 미국에 빌며 더 갖고 계셔 주십사 비는 꼴을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올지 궁금하다. 어느 나라의 교수인지, 일단 자신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미국과 중국, 즉 G2는 자국의 핵심적인 이익을 위해 협력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그 이익의 핵심적 충돌지점인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즉 이 두 나라의 이익에 맞게 한반도 문제를 풀어나갈 것이라는 소리다. 거기에서 과연 박근혜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 없이 자율성과 독자성을 지켜날 수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지금 하는 짓으로 봐서는 그럴 생각조차 없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국민들은 5년에 한 번씩 투표를 통해 바쁜 국민 대신 직업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대표 종을 뽑는다. 그게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위대한 왕이 아닌, 국민의 대리인, 국민의 종이다. 그런데 그 종을 한 번 잘못 뽑으면 사달이 나고야 만다. 주변에서 호심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는 강대국들과 수많은 국제적 이익집단에게 우리의 피와 땀을 고스란히 넘겨주게 된다는 소리다. 조선시대 말 우리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어리바리하고 있을 동안 일본은 국력을 키워 일사불란하게 동아시아를 집어 삼켰다. 우리가 첫 희생물이었고. 그런 꼴이 또 다시 반복되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일단 박근혜 정권은 국가 정보기관인 국정원의 불법 개입으로 만들어진 정권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상실했다. 게다가 대통령이란 작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자기는 몰랐다는 한 마디만 지껄였다. 국민을 자신의 주인이 아닌 하찮은 종으로 보고 있다는 소리다.

 

매일 매일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다. 공정해야 할 대선에 부정적인 행위가 개입되었다면, 그렇게 해서 정권을 얻었다면 이는 시정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며 살아간다.

 

촛불을 들고 외치는 이들은 처자식이 없을까? 전부 백수일까? 혹은 간첩인가? 생계를 핑계로 불의 앞에 침묵하는 것은 조․중․동 찌라시 언론이나 종편 방송에서 떠드는 거짓말쟁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더 치사하고 비겁한 것일 수도 있다. 적어도 그 따위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드는 인간들은 자신의 수준이 그 정도 뿐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셈이니까.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날까지 우리들에게, 불의 앞에 절대 침묵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하다못해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고 하라고 말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제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감각해지고, 세상 모든 비정상적 상황에 덤덤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엔 나 자신까지 불의와 타협하게 되기 때문이다.

 

연초 다시 한 번 거인의 삶을 되돌아보며, 지금 정치를 한다고, 국민들을 위해 봉사한다고, 거국적인 일을 한다고 떠드는 것들의 하찮음을 느낀다. 온갖 그럴 듯한 언사로 국민들을 속이고, 이용하고, 버리는 인간들. 그들의 모습에서 과연 정의가 무엇이고, 진정 정치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이 땅의 한 사람으로써 내가 가야 할 길도 돌아보게 되고.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때문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더 겸손해지려 노력했다. 그는 무엇보다 분단 이후 최초로 남과 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북한을 방문하고, 남북 간의 합의를 이루어낸 인물이다. 여기에 어떤 하찮은 것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이명박이 연평도 방문? 소가 웃는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겪으며, 이 두 정권 내에서 장관이 되어 관료가 되어 정치인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의 면면을 돌아보게 된다. 이미 돌아가신 고인들에게 저주와 증오를 퍼붓는 인간들도 보게 된다. 이명박 정부는 주제도 모르고 ‘국격’을 떠들었다. 박근혜 정부는 ‘격’이 안 맞는다고 남북 당국 간 회담을 거부했다. 진정한 국격, 진정한 격을 아는 이들이 전무한 지금의 모습이다.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여전히 아직까지는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를 우리는 얻지 못했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김대중을 극복해야 한다. 넘어서야 한다.

 

한심한 것들이, 화장실에서 똥을 싸는 순간에라도 이 책을 읽어봤으면 한다. 허접한 극우 사이트나 야동이나 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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