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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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유시민이 다시 지식소매상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는 한 순간도 자신이 지식소매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던 그가 이제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게만 느껴졌던 정치판을 떠나 다시 손에 책을 쥔 지식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처럼 욕(!)을 많이 섭취한 정치인도 없지 않나 싶다. 물론 고 노무현 대통령도 언제나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셨고, 고 김대중 대통령 역시 추종세력 못지않게 비판, 음해세력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현존 정치인 중 유시민처럼 많은 비판과 논란에 휩싸였던 이는 없지 않았나 싶다. 본인이 들으시면 화내실 지도 모르겠지만.

 

정치인 유시민 이전, 저자 유시민으로 먼저 그를 알았던 나는 그가 언젠가 다시 책을 낼 것을 기대해 왔다. 그의 책은 일단 재미있었다. 그리고 소설도 아닌 것이 읽어가는 동안, 남은 페이지가 아까워지는 경험을 하도록 만들었다. 많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사랑했으니,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닌 듯싶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저자 유시민으로 있을 때 가장 그답게 보였다. 이건 전적으로 나의 생각이다. 정치인으로, 때론 장관으로써의 유시민도 물론 의미가 적지 않았지만, 살짝 국민의 입장을 떠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의 책이 기다려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책은 조금 달랐다. 스스로 밝힌 것처럼 스스로에게 보다 더 솔직해진 글은 살짝 나를 당황케 했다. ‘이젠 지친 걸까’라는 생각도 들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호불호를 떠나 그의 정치역정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 아니었나. 참여정부 당시의 모습도 돌이켜보면 마냥 그에게 황금기만은 아니었지 않았나 싶다.

 

더 솔직해진 그는 정치인이라는 ‘자아 검열’의 원인이 제거되었음을 글로써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그의 신념이나 이상이 변한 것도 아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과 정치적 이상을 지키고 있다. 다만 이제는 ‘자연인’의 입장에서 그것을 보듬고 또는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한때 유시민에게 ‘정당 파괴자’라는 오명이 붙은 적이 있다. SNS에서였는지, 인터넷 상이었는지, 여기저기서 ‘그가 만들었거나 참여한 정당은 결국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다. 또 살펴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불운인지, 혹은 운명인지, 그가 참여하거나 만들었던 당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혹은 그 존재감이 상당히 미약해졌거나.

 

여기에서 그의 정치적 행적을 두고 평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럴 능력도 주제도 안 된다. 단 나는 언제나 그랬듯 독자의 입장에서 저자 유시민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의 책을 훌륭하다고 평가했다고 해서 ‘유빠’라든가, ‘노빠’라고 비판한다면, 그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책은 그가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는 가운데, 정말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 그것도 이 시대,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고민한다. 그리곤 참 그다운 이야기를 한다.

 

「나와 유전적으로 무관한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 그들의 복지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자기의 사적 자원을 기꺼이 내놓으려는 자발성, 이 모두가 자연이 인간에게 준 재능이며 본능이다. 이런 이타적 본성, 공감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나는 연대라고 부른다. 연대는 일, 놀이, 사랑과 더불어 삶을 의미 있고 존엄하고 품격 있게 만드는 제4원소이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연대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지금 이곳의 행복이 그들의 것이리라!”」

 

그는 책을 통해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죽는 것인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며 고민한다. 사는 것에만, 그것도 참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지도 않은 채, 오로지 물질에 휩싸여 살아가는 것에만 몰두하는 현대인들에게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조금은 낯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인간답게 죽는 것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이 유시민을 생각하면 고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리게 된다. 유시민은 노무현 대통령을 돕고자 정치에 뛰어들었고, 그로 인해 영욕의 세월을 지나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가 없는 지금, 유시민은 혼자다. 그가 인간다운 죽음을 이야기하며, 역설적으로 참다운 삶을 말하는 것에는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분명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책을 마무리하며 그는 마치 자신의 유언을 말하는 듯, 자신의 장례식 모습을 상상한다. 그리곤 지구라는 행성에서 품위 있게 작별하는 법을 말한다. 사실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냥 지금처럼 살지 않으면 된다. 지금처럼 남을 짓밟지 않고, 남에게 상처주지 않고, 남들과 연대하며 살아가면 된다. 그럼 그것이 품위 있는 인간의 마지막으로 인도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저자 유시민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이번에는 그의 다른 저서들과는 다른 차원의 위안이다. 다시 거꾸로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지금, 그의 위로는 값싼 힐링 도서와 자기계발서와는 분명 다른 차원의 위로다.

 

그가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글을 쓰길 바란다. 정계은퇴를 선언했지만, 정치에 다시 복귀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저 지식소매상이란 본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의 글로 위로를 받고, 지성의 자극을 느끼는 독자들이 있는 한, 이는 그의 사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항상 응원한다.

 

예전 아주 우연히 그와 맞담배를 태울 기회가 있었다. 토크카페의 주인공으로 나온 그는 토크가 시작되기 전 잠시 담배를 찾았다. 그리고 우연히 나와 함께 인사를 주고 받으며, 담배를 태웠다.

 

당시 그의 눈빛을 기억한다. 매우 피곤해하면서도, 특유의 날카로움은 잃지 않은 모습. 조금은 슬퍼보이던 눈이었다. 하지만 책을 다시 내고 난 뒤에 그의 모습은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무엇이 잘 된 일인지, 무엇이 정말 슬픈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온전히 유시민 개인의 차원에서 본다면, 잘 된 일이지 싶다.

 

해박한 지식 속에서 길어 올리는 지혜와 깨달음. 언제나 기분 좋고도 감사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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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첫 생각 -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우는
정우식 지음 / 다음생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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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과연 수천 년 전보다 나아진 것일까?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과학의 눈부신(사실 개인적으로 눈부셔 본 적은 없다만) 발전으로 우리는 과거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다지만, 과연 그렇다고 우리가 과거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암튼 그런 생각이 요즘 자주 드는 게 사실이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다 조금 서글펐던 기억이 있다. 돌이나 결혼을 알리는 초대 문자를 가장한 스팸이 극성을 부린다는 뉴스였다. 하다하다 별 짓을 다 한다고 쓴웃음 지으며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냥 난 문득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참 재미없고, 염치없는 것은 아닌지 싶었다.

 

휴대폰이라는 것이 없고,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당연히 스팸문자를 통한 사기행각도 없을 것. 과거 공중전화나 집 전화를 사용하던 때에도 상상치 못한 일들이다. 그냥 ‘아, 정말 각박하고, 재미없고, 짜증나는 세상에서 나는 꾸역꾸역 살고 있구나.’ 사실 조금 화도 나려 했다.

 

참으로 싸우길 좋아하고, 남을 헐뜯기 좋아하고, 자신만을 위해 아귀다툼에 몰두하는 세상이다. 물론 ‘아직도 이 사회는 따뜻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운운하며, 간혹 나오는 미담이나 훈훈한 이야기들이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미담으로 조명된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지금 이 세상이 얼마나 살기 팍팍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또 듣고 살 수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가능하면 서로를 챙겨주고, 사랑해주는 따뜻한 말을 나누며 살 수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러면 이 팍팍한 세상에서 그나마 숨 쉴 틈이 생기지 않을까.

 

난 너무 게을러서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녀석이다. 그래서일까. 제일 존경스럽고 부러운 이들이 바로 ‘아침형 인간’이다. 아침형 인간에 대한 온갖 찬사에는 100% 동의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나보다 먼저 시작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존경을 표한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니 말이다.

 

저자는 매일 새벽 눈을 떠 명상의 시간을 가지며, 느끼고 결심하고 반성하고 되돌아본 시간들을 글로 담아두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나온 성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생명평화운동가인 저자는 자연과 생명, 인간과 또 다른 인간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바람을 글에 담았다. 지극히 소소한 이야기부터, 가슴에 뜨끔 와 닿는 글귀까지 다양하다.

 

그는 이런 ‘하루의 첫 생각’을 지인들에게 메일로 보냈다. 그만의 아침인사인 셈이다. 어떤 이에겐 상쾌할 수도, 어떤 이에겐 지난밤의 숙취로 인해 힘겨울 수도 있는 아침에, 그는 짧은 글귀로 하루를 보다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도록 그만의 방식으로 ‘인사’했다.

 

나쁜 말, 저주가 가득 담긴 흉기와 같은 말보다는 편안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듣기 좋은 법이다. 글 역시 마찬가지. 때론 매섭게 상대를 비판하고 때론 치밀하게 무언가를 분석해야 하는 글도 있지만, 저자처럼 짧지만 부드러운 여운을 남기는 글도 삶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좋은 말과 글을 지금보다 더 많이 보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 혼탁하고 ‘어이’가 사라진 시대를 견디려면 말이다.

 

정치인들을 보면 가끔 이건 아니다 싶게 말을 내뱉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언론인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서 그들을 언론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욕정을 분출해 결국 조용히 사라진 윤창중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문재인 전 후보를 지지한 정운찬 전 총리, 윤여준 전 장관 등을 싸잡아 ‘정치적 창녀’, 야권 전체는 ‘쓰레기 인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추모하는 인파는 ‘황위병이 벌인 환각파티’로 매도한 바 있다.

 

게다가 박원순 서울 시장의 당선 직후에는 ‘종북세력들이 점령군 완장 차고 몰려가 서울시청 요직은 물론 17개 산하 단체 모두 꿰찰 것’이라는 근거 없는 막말을 쏟아 부었다. 도무지 정신의 문제가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인물을 청와대 수석대변인으로 선정했다는 그 사실이 이 정부의 비극이기도 하다.

 

이런 인간들의 말은 단순히 말이 아니다. 무서운 흉기와도 같다.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때론 죽음으로 몰고 간다. 어설픈 언론들의 저주의 펜 놀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절망으로 몰아갔는지, 그들은 분명 깨달아야 한다.

 

저자의 글들을 읽으며, 어떤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 ‘당연한’ 글귀에 눈을 모아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정의와 상식과 ‘지극이 당연함’을 잃어가며, 혹은 잊어가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른 아침 한 페이지씩, 찬찬히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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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완벽한 하루
채민 글.그림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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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남성의 권익을 위해 만들었다는 어느 민간단체의 대표가 안타깝게 스스로 한강에 뛰어들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절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마지막 자신의 모습을 인터넷에 올려 모든 이들이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스스로 삶을 버린 셈이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게다가 그 이유가 단체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니, 단체의 대표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들을 바라보면 그리 아름다운 죽음은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난 솔직히 그런 단체가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단체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쉽게 수긍할 수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고인이 생전,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 발언들 역시 인정할 수 없다. 그는 이 시대의 남성들이 오히려 여성들에게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식으로 발언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식의 표현도 있었다. 전혀 수긍할 수 없다.

 

과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행복할까? 온전히 말이다. 남녀평등의 시대, 혹자는 여성 상위 시대라고 비꼬기도 한다. 하다못해 우리는 ‘여성 대통령’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정당성 여부는 잠시 접어두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여성들이 행복한가?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너무도 피곤하고 너무도 많은 역할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녀들은 모두 스스로 ‘수퍼울트라우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있다.

 

때문에 남성이 오히려 힘든 세상이라느니, 여성이 행복한 시대라는 등의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인간적으로 양심이 있는 남자들이라면 내 주장에 수긍이 갈 것이다. 당장 우리 주변의 어머니, 아내, 여동생, 전업 주부, 여성 직장인들의 모습을 본다면 그런 말을 함부로 쉽게 내뱉을 수 없다.

 

《그녀의 완벽한 하루》는 딱 지금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들의 삶을 담았다.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기쁨에 차 넘치지도 않는, 그냥 그런 일상, 삶을 꾸려가기 위해 버텨야 하는 일상의 모습들을 담담히 그려냈다. 그리고 잘 알려진 유명 시인들의 시를 그 내용의 바탕으로 삼았다. 독특한 시도다.

 

남루한 삶, 구질구질한 삶을 바라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모두들 티브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화려한 삶을 동경한다. 하지만 그것은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경우가 많다. 정작 삶은 그렇게 아름답지 못하다. 저자는 자신이 아니어도 이미 이 남루한 세상을 짐짓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꾸며 내놓는 이들이 차고 넘쳤음을 알고 있다. 때문에 자신은 “삶의 단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삶의 어두운 면에서 눈 돌리지 않는 것. 희망이 없다고 해서 짐짓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는 것. 대신 절규해 주는 것”을 택했다. 그 선택은 때문에 희망을 거짓으로 꾸며 내놓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각박해지는 현실만큼, 오히려 막장드라마나 싸구려 판타지가 난무하는 지금이다. 상처받고 힘겨운 사람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거짓된 삶이 말 그대로 거짓임을 알면서도, 이를 통해 현실을 잠시나마 잊으려 한다. 그리고 잠시나마 남루한 자신의 삶을 유예시킨다. 하지만 그건 결국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짝 가리는 것뿐이다. 아니, 가릴 수도 없다. 짐짓 눈을 감는 것뿐이다. 결국 우리는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새삼 잔혹한 현실에 더 힘겨워 한다.

 

여성을 중심에 둔 만화는 대부분 순정 판타지나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 기억한다면 채민 작가의 만화는 잔인하게 현실적이다. 현실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담담히 보여준다.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6명의 여성들의 일상을 통해,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네 삶, 생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왜 암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까. 아픔은, 괴로움은 잠시 접어두고 마약과 같은 환상에 빠져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 이유는 간명하다. 거짓된 희망을 지어내지 않는 것이 참다운 희망을 노래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고통’을 겪어야 만이, 우리는 허황된 외면이나 회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애인과의 의무적인 섹스, 더 이상의 감정도 없는 사이. 오늘이 어제와 같은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는 그것도 희미해진, 동사무소 사회복지사 강희정. 오래전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홀로 살아가던 독거노인 김발근례 할머니. 그녀는 이생의 마지막 순간, 가장 행복했던 그날을 떠올리며, 행복하게 눈을 감는다.

 

그리고 차가운 세상 속에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백화점 판매원 박윤정, 노예처럼 자신을 부려먹는 시어머니와 우유부단한 남편 사이에서 힘들어 하는 전업주부 정지은, 일상의 끈이 갑자기 끊어진 순간, 처음 만난 남자와의 섹스를 위해 훌쩍 떠나버린 출판사 편집인 김미영, 그리고 삶이 더 나아질 것이란 생각이 결국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일러스트레이터 양수현.

 

누구에게나 삶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단 하루만이라도 누구에게나 완벽한 ‘하루’는 주어져야 한다. 철저하게 아프고 남루하지만 그럼에도 따뜻한 책이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 기형도 〈가는 비 온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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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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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란 단연코 환상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고와 의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배경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상당히 도발적인 주장이다. 사실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논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 자유 의지의 존재 인정을 기반으로 흉악한 범죄에 대한 처벌이 정당화되기도 한다. 즉 ‘너는 그렇게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또 다른 가능성도 있었는데, 결국 너의 의지로 그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살인마들이 있다. 하지만 만약 그들은 물론 매일 매일 쏟아지는 흉악범들이 스스로 ‘그럴 의도가 없었다’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그들의 구차한 변명?

 

여기에 또 하나, 범죄자들이 어릴 때 학대를 받았거나, 혹은 뇌에 종양 따위가 있어 정상적인 뇌 기능이 힘들었다면? 이것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도 그 사람의 자유 의지로 봐야 할까?

 

워낙 개념 없고 무분별하고, 민족적 자긍심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농담을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분들 계시겠다) ‘미드(미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이다. 사실, 나의 백수 시절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 것은 독서와 함께, 바로 미드 감상이었다. 특히나 범죄 수사물.

 

그 중 크리미널 마인드라는 미드가 있다. 말 그대로 범죄자의 심리 상태를 분석해, 결국 그들을 잡아내는 내용이다. FBI에 소속된 이들은 범죄 현장이나 범죄 수법 등을 토대로 범죄자를 프로파일링한다. 즉 그들을 ‘어떤 종류’의 범죄자로 분류하고 정의내리는 것이다.

 

즐겨보는 드라마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볼 때마다, 이건 좀 ‘어거지’라고 느낄 때가 많다. 몇 건의 사건만을 토대로 범죄자의 연령, 인종, 성별, 성격, 직업까지 추측한다. 아니, 거의 단정 짓는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거의 다 들어맞는다.

 

물론 통계자료나 여러 가지 근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러한 통계자료만으로 새롭게 발생하는 범죄를 ‘정형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기존의 수많은 범죄 유형 중 한 가지를 따랐다면, 범인 역시 그 유형에 맞는 사람이라고 100%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저자는 널리 알려진 자유 의지의 관념이 다음 두 가지 가정에 근거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우리 모두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것과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가 하는 사고와 행동의 의식적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단연코 강조한다. 이 두 가정은 모두 틀렸다고.

 

나는 오늘 아침 커피를 마셨다. 왜? 우유를 마실 수도 있었는데, 왜 커피를 마셨을까? 커피가 더 좋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는 왜 우유를 마셨던 것일까? 알 도리가 없다. 원래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내 의식 몰래 우유를 먼저 선택하여,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의지를 꺾은 것일까? 나는 의식적으로 커피 말고 우유를 자유롭게 선택한 것일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 선택은 ‘내 뇌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그마저도 내가 조사를 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설사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내안의 내’가 눈치 채기 전에 우유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해도 그것은 나의 치밀한 의지의 결과가 아닌, 무의식적 요인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게 만약 내 의지의 산물이었다면 왜 하필 어제가 아닌 오늘이었을까? 왜 나중에는 이런 충동이 생기지 않을까? 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알 도리가 없다.

 

저자는 우리의 뇌가 매 순간 처리하는 정보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과학적 실험의 결과들을 근거로 제시한다. 뇌파검사나 자기공명영상장치를 통해 확인한 결과, 우리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뇌의 운동피질이 활동하고 있고, 인간의 뇌가 우리가 무엇을 할지 이미 결정해 놓았음이 밝혀졌다. 실험에 의하면 우리의 행동 중 80% 정도를 이미 타인이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자유 의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만약 자유 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도덕적이나 법률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처벌할 근거가 사라지는 것일까? “우리의 의식적인 정신의 ‘무의식적인’ 기원을 놓고 볼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이 선택에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저자는 인간을 자연 현상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형법제도가 훼손될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유 의지의 존재를 억지로 인정해야 만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즉 자유 의지의 부정이 도덕을 약화시키거나, 사회 정치적 자유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죄를 저지를 이를 사회에 위험한 자로 여기기 위해 굳이 자유 의지라는 개념을 ‘반길’ 이유는 전혀 없다고 말한다.

 

얇은 분량의 책이 전해주는 무거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유 의지의 부정은 곧 인간의 주체성과 영혼, 나아가 이성에 대한 부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결국 저자의 주장에 상당한 타당성이 존재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내일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아니 당장 이렇게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거나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키보드를 통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있지만, 내가 키보드를 지금 당장 두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내 의지대로 ‘바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 외에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을 할 자유도 없다. 나는 나의 행동의 의도 자체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내가 무엇을 의도하는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을 할 자유가 있는지 묻는다. 당연히 우리는 그런 자유가 없다.

 

우리의 뇌 속에서 ‘생각’이란, 우리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그냥 발생하지만, 결국 우리 행동의 주인이 된다. 물론 의식적으로 우리가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긴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선택 이후의 다음 선택은 ‘선행 원인’이라는 암흑 속에서 출현하게 되고, 그 원인들은 우리 경험의 의식적 목격자로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즉 우리의 선택은 앞선 사건들의 산물이며, 그 사건들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아, 어렵도다~!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감히(!) 자유 의지 논쟁에 결론을 지어버린 저자. 물론 이에 이견을 제기하는 측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나 역시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책을 통해 느낀 점. 통계와 기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잡다한 것들로 한 인간의 행동이나 심리를 함부로 정의내리거나 판단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아직 우리 스스로도 모르는 그 무엇(!)이 너무도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달랑 이 한 가지만 느꼈어도, 나에겐 큰 수확이다. 관련된 도서나 글들을 더 찾아봐야겠다는 강렬한 ‘자유 의지(!)’를 느낀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나의 의지가 맞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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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라 물려줘서 정말 미안해 - 2013 생활민주주의 시대를 여는 F세대 자성론
함영훈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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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만든 책이다. 헤럴드 경제30~40대 언론인들이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작심하고 만든 기획이라는 것. 즉 현재 우리나라 40대 전후 인구, 이른 바 잊혀진(forgotten) 세대라 불리던 이들이 전체 유권자의 51%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들의 특징과 잠재력 등을 분석해 ‘2012년 표심을 전망했다.

 

과연 F세대는 누구인가? 먼저 웃음이 살짝 나오다가, 이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다. ‘왕년에 유명했던 X세대, IMF발 취업 재수생의 원조, 어느 새 마흔 전후, 직장에선 차장부장급인데 아직도 철들지 않는 중년, 맞벌이 대세가 낳은 수퍼초울트라우먼‘, 그런데도 저축보다 빚이 많은 하우스푸어 인생, 요즘 그렇게 무섭다는 중고딩 부모

 

이들 F세대를 맏형으로 한 2040세대들이 2012년 대선을 통해 정치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고, 이것이 사회 전반적인 개혁과 더불어 또 다른 발전으로 나아가기를 바랐던 것이 저자들의 바람이었다. 때문에 왜 지금 우리가 위기에 처했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를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F세대를 비롯한 2040세대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 이들의 특성과 자라온 환경, 이들이 원하는 세상 등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었다. 과거,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베이비부머 세대를 지나 이제 사회의 새로운 핵심 동력이 될 2040세대가 2012년 대선에서 분명 세상을 바꿔버릴 것이라는 믿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20138월 지금이다. 일단 저자들이 원하는 세상은 끝내 오지 않았다. 대선은 새로운 정치로의 도약을 가져오지 못했고, 다시 보수 정권이 집권함으로써 끝이 났다. 게다가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현 정부와 대통령은 권력의 정당성에 큰 흠집을 얻고 말았다.

 

하지만 2012년 대선에서 새로운 정치의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저자들의 노력이 아무 가치도 소용도 없는 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그들은 2040세대의 잠재력을 제대로 보았다. 2040세대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우리 사회의 의미 있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다만 그들이 이명박 정권의 어이없는 5년에 대해 어떤 평가를 했는지, 현 야당 그리고 진보진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대선의 결과가 확실히 보여주었을 뿐이다.

 

물론 정당성의 문제는 여러 가지 이견을 이끌어낸다. 2012년 대선결과를 원천무효로 선언하고 투쟁에 나서는 이들도 있고, 국정원의 개혁, 나아가 해체까지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대통령의 사과와 국정원의 올바른 재정립을 원하는 국민들이 적지 않다.

 

현 정부는 정당성의 상당한 흠집을 입으며 출범했다. 때문에 앞으로의 5년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현재까지 대통령과 정부는 국민들의 촛불을 애써 외면하고 있고, 거대언론들 역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과거 MB정권의 미국산 쇠고기 파동과 촛불집회와 차원이 다르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국민들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 책이 전해주는 것은, 과연 이 사회가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상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고민이다. 또한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살만 하고 더 따뜻하고 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에 대한 성찰이다. 때문에 박근혜 정권이 출범했더라도, 이 책의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절실히 다가온다.

 

창조경제라는 프레임으로 지금의 경제문제를 풀겠다는 정부는 그러나, 중산층을 비롯한 대다수 국민들에게 세금을 더 매기려 하다가, 일단 후퇴한 상황이다. 대중의 심리 상태를 비교적 잘 파악하고 있는 대통령은 관료들의 세수 인상 제안을 마치 몰랐다는 듯,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윽박질렀다. 이런 방식의 정치 행보는 사실 그의 특기라 할 수 있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 일정한 속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정부와 대통령을, 따로 바라보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정부는 무능하지만, 대통령의 지지도는 올라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말로만, 짐짓 멋져 보이는 행동으로만 정치를 할 수는 없다. 또한 국정을 운영할 수 없다(물론 내가 대통령의 언행을 멋있게 생각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이제 곧 국민들은 박근혜라는 정치인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할 것 같다. 그리고 촛불의 꺼지지 않는 대열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불을 보듯 빤하다.

 

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이들이 이번 대선에서는 문재인 대신 박근혜를 선택했을까.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고 또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딱 하나 당연한 사실이 있다. 야당이 무능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열망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박할 사람이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책의 저자들이, 그리고 나아가 우리 국민들이 패배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 우리는 지지 않았다. 당연히도! 박근혜 대통령(참 호칭 붙이기 거북하다)은 이명박 대통령이 겨우 겨우 5년을 버텨낸 것을 보고, 자신 역시 촛불의 뜻을, 국민의 열망을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럭저럭 5년을 버텨낼 수 있으리라 믿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럴지는 모르겠다. 무력하고 무능한 야권 정치인들과는 달리, 우리 국민들은 지난 5년을 허송세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더욱 더 단련되었다.

 

책은 상식을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MB정권 동안 내가 읽은 대부분의 책들은 바로 이 빌어먹을 상식을 이야기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지극히 부정하는 놀라운 세상. 그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은 몇몇 정치인도, 언론인도, 기업인도 아니다. 우리들의 힘으로 국정원을 개혁할 수 있고, 썩어빠진 정치인들을 벌할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발품과 땀이 느껴지는 책이기에 더욱 아쉽고 애착이 간다. 부디 5년 뒤에는 이들의 성과물이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그리고 2040세대의 더 나은 선택을 기대한다.

 

스테판 에셀의 말이 더욱 와 닿는 바로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저항이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우리 주위에 터무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에 강력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단정하고 체념하는 것,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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