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바다에 서다
오창두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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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진보정당의 기관지에서 짧은 북 리뷰를 통해 알게 된 책. 당시 김민웅 교수가 추천을 했던 것 같은데, 아닐 수도 있겠다. 어쩌면 김세균 교수님이었는지. 아무튼 첫 만남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책을 읽은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레그 테리오의 <노동계급을 없다>를 읽고 별안간 다시 떠오른 책이 오창두의 <내 청춘의 바다에 서다>였다. 끝없는 바다 위에서 청춘이라는 슬프도록 시퍼런 밑천 하나만으로, 생사를 넘나들며 희망을 건지려 했던 뱃사람들의 이야기가 찡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다시 집어든 책은 색이 바래있고, 온라인 서점으로 제목을 검색하니 이미 절판된 지 오래다. 이런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좋은 반응을 얻어 쇄를 거듭하며 많이 읽히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덜 솔직한, 적당히 그럴듯한, 더 폼이 나 보이는 이야기들이 팔리는 법. 가까운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중 하나이지만, 더 이상 선물할 방법이 없다.

 

이 땅 위에 노동자 아닌 이 없다. 극소수라 불릴 만큼의 인간들을 제외하고, 대다수 평범한 우리들은 노동자다. 육체 혹은 정신적 노동을 통해 그 대가로 돈을 받아 생계를 꾸려간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사회를 지탱한다. 우리의 노동으로 대한민국은 돌아간다. 우리가 피땀 흘려 버는 돈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헛짓거리도 숱하게 많이 하는 것이 바로 국가, 정부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값진 노동으로 존재한다.

 

저자 역시 노동자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꾸리게 된 가정,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 원양어선에 올라 멀리 알래스카 베링 해로 떠나는 그의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가진 것이라곤 시퍼런 청춘뿐이었던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바다의 시간 속에서 어느덧 풋내기가 아닌 진짜 노동자로 거듭나게 된다.

 

직접 체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는 살아있다. 원양어선 뱃사람들의 생활을 마치 곁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저자의 글 솜씨는, 글이 본디 어때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만 같다. 온갖 수사와 무의미한 치장으로 가득 찬 글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진한 땀 냄새가 느껴지는 글을 읽을 때면, 노동자 문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쉽게 얻을 수 없는 귀한 경험이다.

 

또한 책은 이른 바 밑바닥 인생이라 불리는 원양어선 뱃사람들의 애환과 삶이 생생히 담겨 있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겨가며 바다 위에서 피땀을 흘린 그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실재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그 지긋지긋한 바다를 다시 그리워하고, 다시 바다 위에서 희망을 건지려 발버둥 친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삶, 아무도 쳐다봐 주지 않은 인생살이, 결국 그들을 끝없는 바다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배운 것도 없는 데 그냥 배나 타라는 말은 과연 언제까지 뻔뻔히 존재할 것인가.

 

꾸밈없이 솔직하게 읊조리는 노동자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 진한 감동이고 환한 빛을 전해준다. 스스로 차가운 바다 속에 빨려 들어가 죽을 뻔 했던 경험, 그리고 그 보다 더 큰 슬픔과 고통을 겪으며 그는 이 땅의 당당한 노동자로 거듭난다. 뜨거운 노동의 가치를 전해주는, 그리고 인간은 땀 흘릴 때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전해준 소중하고도 고마운 책이다.

 

다시 책이 발간된다면 적당히 쟁여두고, 그리운 사람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오늘도 분투하는 이들에게 슬며시 챙겨주고 싶다. 이들이 나에게 가르쳐준 노동의 가치, 사람의 아름다움, 연대의 소중함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저자 오창두의 삶과 이야기는 어쩌면 그 무엇보다 큰 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국가는 노동자들의 땀을 빌어먹고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정부가 여전히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동조하기도 한다. 삶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고 준엄히 훈계하는 권력 앞에, 닥치라고, 삶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노동자들이 흘리는 땀방울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책이다.

 

부디 일독을 권한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 그렇다고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사랑하는 가족과 건강한 몸뿐이다. 마구로를 밑천 삼아 떨어져 살지 않는 가정을 이루리라 다짐한다.

 

아침 햇살에 멀리 오륙도가 빛난다. 오륙도 위에는 무지개가 곱게 걸쳐져 있다.

 

일곱 빛깔 무지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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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은 없다 - 부속인간의 삶을 그린 노동 르포르타주 실천과 사람들 5
레그 테리오 지음, 박광호 옮김 / 실천문학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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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 필수적인 이 노동을 지키려면, 노동이 하나의 권리로 간주되어야 하며, 노동권도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자기 역할을 찾아 사회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일자리를 얻어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일차적인 욕구가 있다. 숙련 노동이든 비숙련 노동이든 모든 노동은 보호되어야 하고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하며, 가능한 평등하게 나뉘어야 한다. 하지만 미국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직한 노동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불행하게도 현재 미국인에게 노동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생뚱맞게도 이 책을 내려놓을 때쯤 안대희 총리 후보의 사퇴의 변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이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려 한다

 

평범한 시민이라는 표현이 또 하나의 의문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평범한 시민은 과연 어떤 시민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과 같을까, 아님 전혀 차원이 다를까. 개인적으로는 그 표현이 참 역겨웠다.

 

다시, 육체적 노동을 제대로 했던 것이 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 역시 정직한 땀을 흘리는 육체 노동자로써 얼마나 당당했는지 돌아본다. 그 결과는 부끄러움과 미안함. 기자라는 이름으로, 글쟁이라는 이름으로 나름대로 땀 흘리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실히 착각임을, 느낀다.

 

내 손과 발을 움직여, 내 몸에서 나오는 힘을 소모하며, 나의 땀방울을 흘리며, 그 대가로 밥을 빌어먹고, 그 대가로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 나는 정직하게 땀흘려왔는가, 나는 정직한 노동자였는가, 나는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연대의 정신을 지켜왔는가. 여실히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여전히 이 땅의 노동자들이 대한민국을 움직인다. 노동자들이 멈춘다면 대한민국도 멈춘다. 노동자들이 사라진다면, 물론 대한민국은그런데 과연 어떻게 될까. 사계절 내내 천막농성과 고공농성, 죽음을 각오한 단식투쟁이 이어지는 대한민국. 이들이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릴 때마다, 역시 노동자인 우리들은 연대의 정신을 발휘했는가. 아니면 당장 나의 차례가 아님에 안도하며, 냉정하게 외면했는가. 그 답은 명확히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다. 나라도 살아야겠다는 논리는 평범한 시민을 꽤 하찮은 부속물로 전락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노동의 가치를 전하고, 노동계급의 삶과 문화를 이야기하며, 점점 사라지는 노동을 안타까워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미국과 대한민국을 초월한 공통분모를 전해준다. 우리 역시 노동의 문화, 가치, 정신이 사라지고 있음으로. 반세기를 정직한 육체노동자로 살아온 저자는 노동자의 연대가 사라지고, 당장의 이익에 급급해 자본가들에게 양보하고 물러선 대가가 결국, 노동의 상실, 노동계급의 무력화로 나타났음을 담담히 말한다. 노동자가 사라진 공장에는 잡초만 자랄 수밖에. 깨진 유리창은 깨진 연대를 말하는 것일까.

 

미국의 노동자가 전하는 노동의 이야기는 의외로 흥미롭다. 만만치 않은 저자의 글 솜씨는 그가 살아온 미국 노동계급의 역사와 함께 그들의 삶을 생생히 전달한다. 과실 품꾼에서 부둣가의 노동자로, 그렇게 정직한 땀을 사랑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책임에 충실했던 노동자는 이제 백발의 나이에 다시 미국의 노동을 말한다. 그 내용 중 한국의 노동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정리해고, 사측과 경찰이 용역깡패를 풀어 파업한 노조를 급습해 폭력을 조장하고, 파업을 벌인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무거운 벌금과 형을 부과한다. 한국의 참 많은 노동자들이 그로 인해 삶을 포기했고, 포기하고 있다. 언제나 노동자들에게 탐욕의 총구를 겨누는 자본가들. 그들에게 맞서는 노동자들에게 최선의, 최강의 무기는 언제나 연대뿐이었다.

 

계급의식을 상실하는 순간, 노동자는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자신의 노동을 그저 기계적으로 고용주에게 판매하는 소모적 노동자.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하지만 계급적 자각을 통해 자신의 노동이 어떠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뚜렷이 알고 있는 이들은 노동자의 자부심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국적과 인종을 초월하는, 그야말로 만국적인사실이다.

 

공정한 사회와 정당한 노동조건은 김대중, 노무현도, 이명박, 박근혜도 만들 수 없었고, 또한 없다. 노동이 떠난 자리엔 효율과 이윤이라는 비생물적요소만 남게 된다. 그리고 노동자가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순간, 이는 현실로 굳어진다. 단단하게.

 

미국 노동사를 흥미롭게 따라 내려가면서도, 생뚱맞게 그들의 낭만과 투쟁, 전통과 문화, 연대와 승리, 후퇴와 몰락 등이 지금 우리의 상황과 겹쳐진다. 우리도 승리했고, 패배했고, 좌절했고, 희망을 갖다가, 또 다시 무너지고 있다.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는 언제나 기적을 불러왔지만, 이미 무생물화 되어버린 자본계급의 치밀한 공격은 이를 빛바래게 만들곤 한다. 그럼에도, 투쟁은 이어지고 이어질 것이다.

 

노동자라면, 자신이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자각이나마 할 수 있는 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길 바란다. 재미있다. 그렇지만 묵직하다. 그립다. 그렇지만 현실이다. 책 속에 적지 않은 명 구절들이 숨어 있다. 그리고 꽤 멋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하나씩 찾아내다보면 문득 나는 어떤 노동자인지 궁금해질 것이다. 어떻긴, 이 땅의 자랑스러운 노동자이지. 고용주가, 자본이 밟기 전에 먼저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히 투쟁하고 연대하는 진짜 노동자이지. .

 

이 땅에서 노동이 사라지고 있다. 앞으로는 또 무엇이 사라질까? 아마도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라진 뒤에야 그것을 알게 되고, 그리워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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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마라 - 분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스테판 에셀 지음, 조민현 옮김 / 문학세계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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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기로 인한 고통에 대한 대답이 민주적 가치를 지키는 개혁적 민주주의의 힘을 결집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20세기 동안에 많은 유럽인들은 …… 이데올로기를 떠받들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전지전능한 안내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반공산주의자 역시 되지 않았다. …… 나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혁명적이거나 폭력적인 행위를 통해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기적으로 변화는, 행동․정치적 협의 - 민주적 참여를 통한 현명한 작업 속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민주주의는 목적이다. 그러나 또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인권과 인간 존엄성 그리고 시민의 연대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지난 해 우리 곁을 떠난 영원한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 책은 그가 인류에게 남긴 지극히 간절한 호소이자 유언이다. 그가 얇은 책자 한 권(<분노하라>)으로 세계의 시민들과 국제 시민사회운동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듯, 이 책 역시 두껍지 않은 분량이지만, 그의 진실함과 함께 역사의 진보와 인간의 용기에 대한 강력한 낙관주의가 빛을 발하고 있다.

 

스테판 에셀은 “오늘날 오만한 돈의 힘과 시장 독재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대해 봉기하고 싸울 것을 요구한다. 또한 분노와 항의에만 멈추지 말고, 행동할 것을 호소한다. 소수독점 지배세력을 거부한다는 의사와 함께 국가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경제와 정치에 대한 의욕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는 극단주의를 경계했다. 그리고 극단주의가 부른 혁명이 결국 전체주의로 귀결될 것이라 경고했다. 때문에 정치가 중요하다. 정치에 대한 우리의 정당한 욕구를 회복해야만 한다. 정치가 없이는 진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대통령의 진정성이 담긴 사과일까? 지방선거에서의 야당의 압승일까? 그것도 아니면 경제의 회복과 성장, 복지의 확대일까? 물론 모두 각자의 가치관과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먼저 시급히 필요한 것은 모든 사회 구성원의 ‘도덕적 재무장’이 아닐까.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아버린 우리의 양심, 도덕, 상식의 재무장이 아닐까.

 

스테판 에셀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도덕의 회복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방해하는 모든 세력들에게 굴복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고 호소했다. 분노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 우리는 현재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대한민국의 유권자 중 50세 이상의 연령층이 높아지고 있다. 이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연령층이 늘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두렵다면, 바람직한 변화, 우리가 꿈꾸는 변화 역시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도 정의와 상식에 목말라하는 수많은 스테판 에셀이 존재한다. 직접 말은 하지 않지만, 차마 앞으로 나서지는 못하지만, 묵묵하게 자신의 위치에서 성실히 살아가는 이들. 그들이 희망이자 변화의 원동력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단지 연령층으로 진보와 보수, 구태와 개혁을 나누는 것은 우습다.

 

보수가 악이고 진보가 선이라는 시각도 지극히 위험하다. 그 반대는 말할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긍정할 수 있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스테판 에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국내에 출간된 스테판 에셀의 책들을 모두 읽은 것 같다. 그만큼 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다시 한 번 인정한다. 내가 그에게 배운 것은 정당한 분노와 여기에 동반된 낙관주의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굳건한 믿음, 인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놓지 않는 법. 그럼으로 또 다시 저항하고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 그가 나에게 전해준 선물이다.

 

참혹하고 암담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이 상처에서 과연 언제쯤 회복될 것인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 담겨있듯, ‘현 상황이 암울하게 여겨지더라도, 아무리 노력해도 출구가 보이지 않더라도, 비폭력투쟁이 효과가 없어 보일지라도, 내가 지지했던 후보가 선거에서 패배했다 하더라도, 변화의 속도가 너무 더뎌 인내를 극도로 시험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결국 인간의 정신은 진보할 것이고, 인간 존엄성을 향한 인류의 대장정은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호소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하다해도, 세상을 바꾸는 데 0.00000001%의 기여만 할 수 있을지라도 행동하려 노력할 것이다. 영원한 노투사여, 안녕히.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죽음의 위험에 놓여있다. 사회적․경제적 부정으로 또는 환경 파괴로, 또는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소멸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세우기 위해 건설적인 비전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야망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용기에서 태어나는 야망. 세상 일이 저절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낙관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의 염세주의에 빠져서도 안 된다. 우리는 야망을 가져야만 한다. 포기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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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는 남자 진구 시리즈 2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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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를 통해 한국 추리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작가 도진기의 새로운 시리즈. 편법과 거짓에 능숙한 주인공 진구의 맹활약이 펼쳐진다. 진구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 때론 상대방을 가볍게 속이기도 하고, 감히(!) 공권력에 살짝 대항하거나 혹은 어지럽게 만들기도 한다.

 

도진기 작가는 그동안 작품들을 통해 인간의 추악한 본성, 또한 수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결국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다소 우울한 ‘진실’을 보여주곤 했다. 이 작품 역시 평범한 남편이자 직장인으로 알고 있었던 ‘민서’의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썩 유쾌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

 

뚜렷한 직업 없이 다니던 학교도 그만 둔 채 오직 자신의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일에만 관심을 보이는 주인공 진구. 여자 친구 해미의 “일을 하라!”는 강한 협박으로 증권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진구는 상사 민서의 뒷조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심부름센터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그지만, 평소 매너 좋고 자신에게도 잘 대해주는 상사 민서의 뒷조사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는 않는다. 게다가 민서의 아내 성희가 그의 불륜 증거를 찾아달라는 것이 그 이유였으니 더욱 찜찜할 따름.

 

하지만 해미의 반 협박조의 부탁에 할 수 없이 민서의 뒷조사를 하던 진구는 별거 중인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몰래 들어가 불륜의 증거를 찾아달라는 성희의 부탁에 한밤중 민서의 집에 잠입하게 된다. 하지만 발견한 것은 이미 싸늘히 식어버린 민서의 시체였다.

 

이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어 체포된 진구는 영장심문에서 특유의 기지를 발휘해 곧 풀려나게 된다. 하지만 진범을 잡지 못하면 결국 진구에게 다시 혐의가 돌아가게 될 상황. 진구는 이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민서라는 인물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는데.

 

진구는 민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점차 놀라운 사실들이 숨겨져 있었음을 알게 된다. 과연 진구는 진범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민서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범인 과연 누구인가.

 

도진기 작가의 주특기인 정교하고 독창적인 트릭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자신의 생존이나 이익을 위해서는 사소한 위법이나 사기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는 파격적인 주인공의 모습에 색다른 신선함도 느낄 수 있다.

 

등장인물 간의 갈등이나 이들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심리적 갈등을 겪으며 사건이 전개되는 모습도 흥미롭다.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보이던 ‘쿨’한 민서의 본 모습이 드러날 때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우리는 대부분 저 마다의 가면으로 본 얼굴을 가린 채 살아간다. 어떤 커다란 비밀이나 악행을 숨긴다는 차원은 물론 아니다. 각각 생존을 위한 정글 속에서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참 얼굴을 숨길 때가 있다는 이야기다. 서글프지만 진실이기도 하다.

 

최근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면 지극히 슬픈 일이지만, 우리들의 가면이 일제히 송두리째 벗겨진 느낌을 받는다. 추악한 맨 얼굴이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대신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력과 썩어빠진 관료 사회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 어떤 수준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절실히 보여준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구태를 고치지 못한 후진적인 사회였던 것이다.

 

인간은 본디 선하고 본디 악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충분히 악마가 될 수 있고, 또한 충분히 천사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다. 때문에 지나친 낙관이나 희망을 경계하고, 언제나 스스로를 지극히 돌아봐야 한다. 우리 안의 악마를 항상 살펴보는 자세. 그것이 또 다른 세월호 참극을 막는 지름길이 아닐까. 재난처 따위 만들고, 관료 몇 몇 자르는 것보다 말이다.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도진기 작가의 작품들은 때문에 쏠쏠한 재미 못지않게 적지 않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고마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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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해주고 싶은 것들
변혜정 지음 / 영진미디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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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TV를 시청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온전히 모두 안 보는 것은 아니겠지만, 뉴스를 보기 꺼려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다른 프로그램도 애써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뉴스를 비롯한 여러 프로그램에게서 심히 불쾌한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이른 바 최루성 프로그램들을 겁낸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유달리 눈물이 많은 편이라, 억지로 눈물을 쥐어 짜내려는 의도가 다분한 프로그램임을 알면서도, 결국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 한심하기도 했다.

 

때문에 책의 저자인 변혜정 씨가 TV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지독한 고통을 참아가며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노래를 불러준 장면을 ‘본방사수’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저자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중증 천식과 중증 근무력증, 악성뇌종양. 사랑하는 남자와, 그 사랑의 결실로 얻은 소중한 두 아이와 함께, 지극히 평범하지만 사소한 행복에 감사하며 살아왔던 저자.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병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하루하루 설명할 수조차 없는 고통과 싸워가며 그녀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이들, 재원이 승원이를 지켜내고자 분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운 사실, 자신이 알 수도 없는 어느 순간 갑작스레 아이들의 곁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는 공포와 눈물겨운 사투를 벌인다.

 

책은 때문에 유언이자 편지이자 간절한 사랑의 눈물이다. 자신이 눈을 감은 후 언젠가 아이들이, 엄마가 그리워서, 엄마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눈물겹게 그리울 때가 온다면, 이 글들을 읽어주길 바랐다. 아이들의 성장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어미’의 마지막 선물이자, 또한 소원인 것이다. 그녀는 글을 통해 아이들이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또 받기를 바랐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랑, 그것마저 모성, 부성이라는 이름으로 규정짓고, 또 이를 교묘히 자본의 시스템에 접목시킨, 그런 우울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주절거리고 싶지 않다. 모성이든, 그 어떤 이름으로 정의하든 어미의 사랑은 그 자체로 자식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이다.

 

억지 희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식을 위한 어미의 희생을 강요하고 미화하는 자본주의의 어두움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 따위로도 감히 설명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사랑, 끝없는 사랑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받았던, 그리고 이젠 다시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변혜정 씨는 위대한, 특별한 혹은 아주 희한한 어머니가 아니다. 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모두의 어머니일 뿐이다. 그녀가 극심한 고통을 참아가며, 한 자 한 자 글을 남겨온 것도, 휠체어에 앉아 부축을 받으면서도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것도, 그녀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그저 어머니, 부모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 다시 이 책을 꺼내들며, 먹먹함을 떠나 서러움에 힘겹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했던 아이들을 하염없이 보내야만 했던 수많은 어머니들의 피울음이 여전히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저 무정한 바다를 바라보며 아이들이 신었던 운동화를 가슴에 안고, 그저 미안함에 서러움에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어머니들. 그들이 여전히 서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해줄 수 없었던 그들의 미안함이 대한민국을 갈 곳 모르게 서성이게 하고 있다. 수많은 노란 리본들의 물결 속에, 차디찬 바다 아래 잠든 아이들의 간절한 외침이 떠다닌다. 그리고 남은 어머니, 아버지들은 떠날 줄 모른다.

 

살려달라는 간절함보다, 그저 어머니로 조금만 더 머물고 싶다고 바랐던 변혜정 씨. 그리고 이젠 어머니라는 이름 앞에 오열하는 수많은 어머니들. 누군가는 유가족이라는 상황이 특권이 아니라며,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누구는 이것도 결국 잊혀질 것이라 가볍게 말한다.

 

하지만, 어찌 이 설움과 막막함이 쉽게 잊혀지고, 쉽게 더럽혀질 수 있으랴. 더 이상 어머니들에게 상처만을 주어선 안 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어머니를 만나 이 삶을 얻었지 않나.

 

뒤늦게 그녀가 출연했던 프로그램을 보며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처럼 힘을 내어주길 바랐다. 재원이와 승원이 곁에 오래오래 머물러주길 바랐다. 지금까지 간절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행복했듯, 앞으로 한없이 행복하기 바랐다.

 

더 이상 자식을 잃은 어미들의 슬픔을 모욕하지 말았으면 한다. 더 이상 한없는 가벼움으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저 손을 잡아주고, 함께 울어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자식이고, 부모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여전히 간절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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