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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은 없다 - 부속인간의 삶을 그린 노동 르포르타주 ㅣ 실천과 사람들 5
레그 테리오 지음, 박광호 옮김 / 실천문학사 / 2013년 8월
평점 :
“우리 삶에 필수적인 이 노동을 지키려면, 노동이 하나의 권리로 간주되어야 하며, 노동권도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자기 역할을 찾아 사회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일자리를 얻어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일차적인 욕구가 있다. 숙련 노동이든 비숙련 노동이든 모든 노동은 보호되어야 하고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하며, 가능한 평등하게 나뉘어야 한다. 하지만 미국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직한 노동의 세계에 들어가는 일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불행하게도 현재 미국인에게 노동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생뚱맞게도 이 책을 내려놓을 때쯤 안대희 총리 후보의 사퇴의 변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이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려 한다”
‘평범한 시민’이라는 표현이 또 하나의 의문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평범한 시민은 과연 어떤 시민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과 같을까, 아님 전혀 차원이 다를까. 개인적으로는 그 표현이 참 역겨웠다.
다시, 육체적 노동을 제대로 했던 것이 언제였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 역시 정직한 땀을 흘리는 ‘육체 노동자’로써 얼마나 당당했는지 돌아본다. 그 결과는 부끄러움과 미안함. 기자라는 이름으로, 글쟁이라는 이름으로 나름대로 땀 흘리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실히 착각임을, 느낀다.
내 손과 발을 움직여, 내 몸에서 나오는 힘을 소모하며, 나의 땀방울을 흘리며, 그 대가로 밥을 빌어먹고, 그 대가로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 나는 정직하게 땀흘려왔는가, 나는 정직한 노동자였는가, 나는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연대의 정신을 지켜왔는가. 여실히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여전히 이 땅의 노동자들이 대한민국을 움직인다. 노동자들이 멈춘다면 대한민국도 멈춘다. 노동자들이 사라진다면, 물론 대한민국은… 그런데 과연 어떻게 될까. 사계절 내내 천막농성과 고공농성, 죽음을 각오한 단식투쟁이 이어지는 대한민국. 이들이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릴 때마다, 역시 노동자인 우리들은 연대의 정신을 발휘했는가. 아니면 당장 나의 차례가 아님에 안도하며, 냉정하게 외면했는가. 그 답은 명확히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다. 나라도 살아야겠다는 논리는 ‘평범한 시민’을 꽤 하찮은 부속물로 전락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노동의 가치를 전하고, 노동계급의 삶과 문화를 이야기하며, 점점 사라지는 노동을 안타까워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미국과 대한민국을 초월한 공통분모를 전해준다. 우리 역시 노동의 문화, 가치, 정신이 사라지고 있음으로. 반세기를 정직한 육체노동자로 살아온 저자는 노동자의 연대가 사라지고, 당장의 이익에 급급해 자본가들에게 양보하고 물러선 대가가 결국, 노동의 상실, 노동계급의 무력화로 나타났음을 담담히 말한다. 노동자가 사라진 공장에는 잡초만 자랄 수밖에. 깨진 유리창은 깨진 연대를 말하는 것일까.
미국의 노동자가 전하는 ‘노동의 이야기’는 의외로 흥미롭다. 만만치 않은 저자의 글 솜씨는 그가 살아온 미국 노동계급의 역사와 함께 그들의 삶을 생생히 전달한다. 과실 품꾼에서 부둣가의 노동자로, 그렇게 정직한 땀을 사랑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책임에 충실했던 노동자는 이제 백발의 나이에 다시 ‘미국의 노동’을 말한다. 그 내용 중 ‘한국의 노동’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정리해고, 사측과 경찰이 용역깡패를 풀어 파업한 노조를 급습해 폭력을 조장하고, 파업을 벌인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무거운 벌금과 형을 부과한다. 한국의 참 많은 노동자들이 그로 인해 삶을 포기했고, 포기하고 있다. 언제나 노동자들에게 탐욕의 총구를 겨누는 자본가들. 그들에게 맞서는 노동자들에게 최선의, 최강의 무기는 언제나 연대뿐이었다.
계급의식을 상실하는 순간, 노동자는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자신의 노동을 그저 기계적으로 고용주에게 판매하는 소모적 노동자.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하지만 계급적 자각을 통해 자신의 노동이 어떠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뚜렷이 알고 있는 이들은 ‘노동자’의 자부심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국적과 인종을 초월하는, 그야말로 ‘만국적인’ 사실이다.
공정한 사회와 정당한 노동조건은 김대중, 노무현도, 이명박, 박근혜도 만들 수 없었고, 또한 없다. 노동이 떠난 자리엔 효율과 이윤이라는 ‘비생물적’ 요소만 남게 된다. 그리고 노동자가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는 순간, 이는 현실로 굳어진다. 단단하게.
미국 노동사를 흥미롭게 따라 내려가면서도, 생뚱맞게 그들의 낭만과 투쟁, 전통과 문화, 연대와 승리, 후퇴와 몰락 등이 지금 우리의 상황과 겹쳐진다. 우리도 승리했고, 패배했고, 좌절했고, 희망을 갖다가, 또 다시 무너지고 있다.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는 언제나 기적을 불러왔지만, 이미 무생물화 되어버린 자본계급의 치밀한 공격은 이를 빛바래게 만들곤 한다. 그럼에도, 투쟁은 이어지고 이어질 것이다.
노동자라면, 자신이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자각이나마 할 수 있는 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길 바란다. 재미있다. 그렇지만 묵직하다. 그립다. 그렇지만 현실이다. 책 속에 적지 않은 명 구절들이 숨어 있다. 그리고 꽤 멋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하나씩 찾아내다보면 문득 나는 어떤 노동자인지 궁금해질 것이다. 어떻긴, 이 땅의 자랑스러운 노동자이지. 고용주가, 자본이 밟기 전에 먼저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히 투쟁하고 연대하는 진짜 노동자이지. 암.
“이 땅에서 노동이 사라지고 있다. 앞으로는 또 무엇이 사라질까? 아마도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라진 뒤에야 그것을 알게 되고, 그리워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 3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