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청소부
니이츠 하루코 지음, 황세정 옮김 / 성림원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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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울 것 없이, 올해도 지나간다. 아무리 올해 별일이 많았다 해도,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어쩐지 시간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시간만이 딴 짓하지 않고 성실히 제 할 일을 한 것은 아닌가 싶어서다. 아, 물론 선생님도 고생하셨지요. 아무렴요.

 

아무리 엄청난 일이 벌어져도, 마치 당장 미쳐버리거나 죽어버릴 것만 같아도, 결국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든 대충이라도 수습이 되고 끝내는 잊히는 게, 예전에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그게 오히려 조금은 다행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내가 미처 수습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온전히 내 힘으로는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열정과 비관, 뭐 이런 것으로 표현하기는 좀 그렇다. 24시간 1년 내내 분노와 정의감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 전에 내가 자연발화로 사라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장렬히.

 

보름 남짓 올해를 남겨둔 지금도 역시 대한민국은 역동적으로 시끄럽다. 우병우가 ‘숙명’처럼 구속되었고, 이명박은 올해를 무사히 넘기는 분위기다. 최순실은 “옥사하라는 말입니까!” 울부짖었고, 덩달아 류여해도 페이스북 라이브로 울부짖었다.

 

그나마 축구가 일본에 오랜만에 승리해서 덜 우울했다. 뭐, 이젠 적어도 일본에겐 질 수 없다는 오기도 결기도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님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로 올 해를 맞았다. 2016년엔 마이클 코넬리의 <클로저>였다. 2018년은 어떤 책으로 시작될지 아직 모르겠다. 올 초, “올해는 많은 책을 읽기 보다는 깊게 읽자”고 다짐한 바 있다. 그 약속은 결국 지키지 못했다. 깊게 읽지도 못했고, 많이 읽지도 못했다. 부끄럽진 않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깨지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정성스럽게 글을 많이 짓지 못했다는 것은 영 아쉽다. 능력의 부족이다.

 

아, 참고로 지금은 하드보일드의 거장 로스 맥도널드의 분신 루 아처가 활약하는 <블랙 머니>를 읽고 있다. 무척 재미있는 작품이기에 2018년까지 붙잡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속절없이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겁이 더 많아지고,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에 약해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무지한 녀석이니 무슨 말을 해도, 또 그 무슨 말 때문에 설사 비난을 받는다 해도 전혀 겁날 것이 없었는데, 이젠 말 하나 글 하나에도 두려움이 앞선다. 그 사이 더 신중해졌다거나 지혜와 지성이 충만해졌을 리는 만무하고 단지 겁만 늘어난 것이다. 비겁함만 늘어난 것이다.

 

특히 어떤 상황이나 특정 개인을 내 가치관과 기준에 맞춰 평가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비난이 두려운 것은 아닌데, 완전히 잘못된 평가나 판단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커진 것 같다. 이래저래 어째 인간이 가면 갈수록 덜 되어 먹어가고 있다. 벤자민 버튼도 아닌데.

 

촛불의 함성으로 맞이했던 올 연초, 미셸 푸코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진정한 해방은 권력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 놓은 당신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때 가능하다.”

 

지금 난 과연 나의 그 ‘생각’에서 얼마나 벗어났을까, 여전히 꽁꽁 묶인 채 부질없이 남들 탓만 하거나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두남두고 버텨온 것은 아닐까. 세상 모든 윤똑똑이들을 비웃으며, 정작 내 얼굴에 묻은 똥은 애써 외면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는 어느 새 울뚝밸이 치밀 때마다 ‘그럼 넌 얼마나 치열하기에?’ 되묻는 나를 느끼게 된다. 분명히 철이 들었다거나, 성숙했다거나 이따위 차원은 아닐 것이다. 전혀 대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애면글면하고 있을 뿐이다.

 

결코 열심히 훌륭하게 만족스럽게 올해를 살지 못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지 못했고 내일은 꿈도 꾸지 않았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오늘도 대충 수습하며’ 살아냈다. 때문에 그 무슨 거창한 송년회 따위 할 생각이 없다. 그저 보기 싫은 얼굴들을 뒤로 한 채 술 한잔 시원하게 하고 푹 잠들면 바랄 게 없다.

 

새해에는 이 책의 저자처럼 무엇이든 새로운 마음으로 도전하고, 무언가 배우는 그 과정 자체에 무한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일일지라도, 책임감과 프로의식을 가지고 그 분야의 마스터로 우뚝 설 수 있을까. 난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죽거나 좌절할 생각은 전혀 없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공감이, 결국 눈물이 되어 흘러내릴지 아니면 더 큰 힘이 되어 누군가에게 전해질지 모르지만, 스스로 톺아볼 수 있는 힘이라도 놓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 정도면 되었다.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청결하다는 일본 하네다 공항의 청소 실기 지도자다. 환경 마이스터라는 명칭을 얻은 청소의 장인이다. 남들이 꺼려하는 청소부라는 직업을 장인의 경지로 끌어올린 이다. 그녀는 마음을 담아 일을 한다는, 진심으로 일을 할 때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와 같은 범인이 범접하기엔 까마득한 경지다. 일본인 전쟁고아 2세 출신인 그녀의 도전과 성공은 분명 많은 울림을 준다. 요리의 장인이나 청소의 장인이나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당장 주위를 돌아보면 명예를 위해, 권력을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를 이용하고 누군가를 디딤돌 삼아 하찮은 권력과 명예를 얻고자 한다. 그를 위해 누군가 망가져도, 누군가 상처를 입어도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추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 이들의, 패거리의 마지막은 대부분 아름답지 못하다. 그것이 대의라고, 정의라고 아무리 믿는다 해도, 포장한다 해도, 세상엔 윤똑똑이들만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때문에 그런 이들에게 듣그럽겠지만 명토 박아 말해주고 싶다. 당장 앞에 있는 쓰레기부터 치우고 먼지부터 닦으라고, 거울을 보고 얼굴에 묻은 똥을 닦으라고 말이다.

 

어쩌면 저자 같은 이들이 가득한 세상은 조금은 재미없을지 모르겠다. 내 주변에 온통 근면성실에다가 자신의 일에 진심을 담아내고, 장인의 경지에 오른 마이스터들만 산다면, 숨이 막히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는 괜한 걱정이다. 거울이 없거나 부러 외면하는 이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자신이 정작 적폐임을 모른 채 다른 이들을 향해 살천스레 적폐라 부르댄다. 똥 냄새가 여전히 사방에서 진동한다.

 

머라이어 캐리도 이제 나이를 많이 드셨다. 오랜만에 <Music Box> 앨범을 꺼냈더니, 1993년이라는 연도가 보인다. 그마나 최근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던 나카시마 미카의 베스트 앨범도 2005년이다. 순간의 빛을 발하고 스러지는 아름다움도 잊을 수 없지만, 있는 듯 없는 듯 나와 오래 지내온 것들도, 못지않게 아름답고 소중하다. 시간은 부질없기에 아름답다.

 

참 더러운 세상에서 적당히 같이 뒹굴며 때 묻히며 껄껄거리며 잘 살아냈다. 주제넘게 설쳐대는 설치류가 있다면 침 한 번 퉤 뱉어주고 내 갈 길을 가는 그런 녀석으로 남아주길 바란다.

 

올 한 해 다들 잘 살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떠나간 이들이여, 아무 걱정 말고 쉬소서. 여기 일일랑 다 잊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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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코다 이발소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로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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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이 상당히 허약하다. 지성도, 근면함도 빈약하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아마 일제 강점기 시대에 살았더라면 십중팔구 조금의 고통도 견디지 못하고 친일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기엔 독재정권의 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 이명박, 박근혜 시대엔 개가 아닌 사람으로 살기 위해 버텼다. 인정할 건 인정하는 편이다.

 

내 치명적 약점 중 하나는 쉽게 비관주의로 흘러버린다는 것이다. 쉽게 절망하고, 쉽게 포기한다. 이런 멘탈은 비관이 허무로 빠지는 데 취약하기도 하다. 우주라는 끝을 알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속, 그야말로 하찮은 존재인 인간 따위가, 마치 우주의 지배자인양, 줄이고 줄여 생각해도, 지구의 정복자인양 오만하게 구는 것은 참기 힘들다.

 

네 까짓 게 뭔데. 이런 생각에 빠지다 보면 세상 모든 일들이 그저 부질없어 보인다. 기껏 백년 후에도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왜 그리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고, 사소한 것에 핏대를 세우면서 생명을 걸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갈까.

 

때문에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결론지을 때가 많다. 어떤 면에선 이것도 몹쓸 자기합리화가 아닐까 싶은데, ‘어차피 그런 거지’ ‘너무 큰 바람이었지’ 등으로 나의 실망이나 당혹감을 애써 별 것 아닌 양 소멸시키는 것이다. 꽤 비참한 행동이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 이후, 촛불의 열망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에게 ‘천지개벽’의 그 무엇을 기대한 이들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와 같은 극심한 허무주의나, 비관주의에 빠졌을지 모르겠다. 꽤 많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을 때의 비통함. 그것은 꽤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처럼(이게 옳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예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그냥 살짝 덤덤하게 살아간다면(물론 그 사이 기대와 희망과 절망과 비관과 허무가 극렬히 통과했지만) 그마나 덜 피곤하고 덜 상처받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당최 뭔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넌.)

 

워낙 정열적인 민족이라서 그럴까, 때로 우리는 너무 거창한 담론이나 명분에 사로 잡혀 정작 사소하지만 중요한 그 무엇을 놓치곤 한다. 솔직히 나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적폐 청산을 부르짖고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주절거리면서 정작 내 아이와 가정에는 소홀해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적폐는 따로 있는 게 아님을 느낀다. 내가 바로 적폐이고 없어져야 할 존재였다.

 

페이스북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기도 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귀를 올리는 친구들도 있지만, 대부분 너무 무겁고 거창하고 나 따위는 도무지 어찌 해 볼 수 없는 담론과 주장으로 점철된다. 어떤 이들은 일관되게 자신이 반대하는 정당의 대표를 모독하고 조롱하는 것으로 자신의 페이지를 가득 채운다. 분노와 저주가 넘친다. 뭐 각자의 자유이고 권리겠다. 하지만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슬그머니 그런 분들의 글은 보지 않으려 한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본다. 나도 그러지 않았는지, 술에 취해 헛소리를 배설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어리석고 우둔함을 스스로 자랑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괜한 비난으로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별별 생각이 다 들고, 결과적으로 참 민폐만 끼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자괴감이다, 이런 게 바로.

 

오쿠다 히데오는 그런 면에서 나에게 소중한 따뜻함을 전해주는 작가다. 물론 『남쪽으로 튀어』처럼 유쾌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 그의 작품은 평범한 이들의 평범한 이야기다. 그리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신기방기한 재주도 지니고 있다.

 

결국 사람이다.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고, 거창하게 보자면 이 지구를 날려버릴 수 있는 것도 사람이다. 동시에 다시 사람이다.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고, 역시 크게 보자면 이 지구를 살려낼 수 있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고 기댈 수밖에 없다.

 

『무코다 이발소』는 한때 번성했지만, 이제는 쇠락한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다. 우리도 이미 겪고 있는 고령화 문제, 지방의 인구감소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때문에 더 와 닿고 더 큰 울림을 준다.

 

굳이 거창한 이념이나 사상 따위가 강조되지 않아도, 책을 통해 충분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민과 희망이 느껴진다. 이런 게 바로 이야기의 힘이고 문학의 역할이다. 거대담론만 주절거린다고 다 명작이나 고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남북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비핵화, 국제제재, 평창동계올림픽, 평화협정, 한미군사훈련, ICBM 등 거대한 이야기들에 둘러싸여 있다. 벗어날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 사이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다.

 

북한은 김정은 개인만이 살아가는 곳도 아니고, 조선인민군만이, 조선노동당 만이 존재하는 곳이 아님에도, 대다수는 마치 그들만이 존재하는 곳이 북한인양 말한다. 그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민들은 유령처럼 배제된다. 아니면 로봇처럼 표현된다.

 

우리는 미국을 워싱턴의 정치인들만이, 민주당과 공화당만이 전부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국엔 미국 국민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트럼프의 당선으로 확인했다. 그들의 분노가 결국 매우 독특한 개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때문에 미국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그 끝이 재앙일지 축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반도 상황은 어떤가. 여전히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공감의 마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 이야기가 나오면 대번에 국제제재에 위반된다는 참혹한 답변이 들려온다. 그들을 돕는 게 불법이라는 이야기, 전 세계가 북한을 압박하고 있는데 우리만 다른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무참한 이야기들이 바로 우리들의 입에서 튀어 나온다. 무섭다. 그 논리와 감정이.

 

이는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남북문제와 통일에 있어 그 당사자인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사거리와 대기권 진입 여부보다 중요한 건 북한의 임산부들이, 5세 미만의 아이들이, 영유아들이 어떻게 이 겨울을 지낼 것인가이다. 우리의 독자적 대북제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빌어먹을 한미동맹이나 공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가족을 만나기만을 기다리는 이산가족들에게 남은 시간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과연 무엇인지 말해 달라.

 

무언지도 제대로 모르는 4차 산업혁명을 떠들고, 로봇이 인간의 일을 대신 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시대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뜨거운 피가 흐르고,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 내일도 우리 학생들은 불법 노동에 스러져갈 것이고, 크레인은 주저앉을 것이다. 사람을 사람이 아닌 도구로 생각해버리는 그 악마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이대로 지옥으로 달려가는 기차에서 내릴 수 없다.

 

그깟 평창올림픽 따위 성공하지 못해도 좋다. 그깟 일자리 창출 수치판 필요 없다. 수치와 금액으로 환산되는 그 모든 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과연 사람이 행복한가이다. 사람이 없는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이나, 사람의 행복이 보이지 않는 일자리 수치판은 필요 없다는 소리다. 올해 안에 국민소득 3만 불이 넘을 것이라는 개소리도 집어치워라. 여전히 마인드는 박정희 시대에 살면서 박정희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행복했으면 좋겠다. 사소하게 즐거웠으면 좋겠고, 사소하게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소하게 기쁜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람들이 더 이상 비참하게 살거나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어떤 명분도 집어치우고 오직 사람만을 생각해야 하리라. 생명에 대한 존중을 먼저 생각해야 하리라. 생명을 우습게 알면 사람이 우습고, 자연이 우습고, 결국 스스로를 우습게 여기게 된다.

 

2017년 12월, 쉽게 만날 수 없는 이들을 만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그들도 삶의 사소한 평화와 행복을 바라는 사람임을 느꼈다. 만남에 기뻐하고 헤어짐에 슬퍼하는 평범한 이들임을 느꼈다. 그들과의 작별 후 돌아온 이 곳은, 또 다시 독자제재를 부르대고 있다.

 

그야말로 하찮은 인간이기에, 사소한 인연에 감사하고 사소함에 행복해할 수 있는 사소한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애써 화내지 않고, 애써 비난하지 않고, 애써 흔들리지 않는, 로봇이나 쓰레기가 아닌 사람으로 살아야겠다. 여전히 난 드론보다는 방패연이 더 정겹고, SNS보다 손 편지가 그립다.

 

『무코다 이발소』는 이 추운 겨울, 따뜻한 군고구마 같은 작품이다. 가슴에 쏘옥 품고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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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자본주의공화국 - 맥주 덕후 기자와 북한 전문 특파원, 스키니 진을 입은 북한을 가다!
다니엘 튜더.제임스 피어슨 지음, 전병근 옮김 / 비아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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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마치 지구의 주인인양, 우주의 유일무이한 존재인양 자부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한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참화가 끊이지 않는 것만 보더라도 자명해진다. 인간은 극도로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며, 생각보다 매우 배타성이 강한 동물이다.

 

불완전한 인간을 더욱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이다. 이를 갖추고 있는 이들은 변화가 극히 어렵고, 자신의 생각을 신념화, 절대화 나아가 신앙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기 때문에, 대부분 큰 재앙이나 비극을 초래한다. 히틀러나 스탈린, 폴 포트, 무솔리니 등 수많은 독재자들이 그러했고, 가깝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 예다.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독선과 착각은 대부분 잘못된 선입견과 편견, 고정관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아주 크게 달라졌다고는 하기 어렵지만, 과거 서구문명이 비(非)서구문명을 바라보던 눈 역시, 어처구니없는 소명의식과 더불어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개하기에 문명화 시켜야 하는 종족, 지배하고 억압해야 하는 인종으로 비쳤을 뿐이다. 때문에 억압이나 학살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학살해도 무방한 존재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은 후 헤이즐 스미스의 <장마당과 선군정치>를 읽고 있다. “‘미지의 나라 북한’이라는 신화에 도전한다”는 부제가 말하듯, 지금까지 북한을 규정했던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과 함께, 북한의 탄생과 현재까지의 과정을 통해 국가차원의 체제 유지와 국민 각자의 생존이라는 두 가지 목표가 각각 어느 주체로부터 어떻게 추진되었는지, 그로 인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트럼프의 이번 국회연설에서 드러나듯, 한반도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 북한은 다만 지옥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억압받는 이들이며, 개인적 행복이나 실리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다. 개인의 생각이나 신념 없이, 로봇처럼 김정은과 당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2,500만의 사람들이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오직 김정은과 당의 명령에만 따르며 살고 있을까? 정말 북한 주민들은 자신과 가족의 행복이나 미래를 위한 꿈 따위는 없이, 오로지 당과 김정은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 <조선자본주의공화국>의 서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북한에 대해 틀에 박힌 설명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 나라에서 오랫동안 고통 받고 있는 주민들에게 기특한 동정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그런 설명들은 북한 주민에게서 주체성을 박탈하고 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북한 사람들은 인격이라고는 없는 만화 주인공처럼 축소되고 맙니다.…그렇지만 보통 북한 사람의 주된 관심사는 보다 일상적입니다. 북한 주민도 여느 곳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벌고 자식을 잘 기르고 이따금씩 삶의 재미를 누리는 데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점점 이런 욕구들을 국가가 둘러친 우산 밖에서 만족시켜 가고 있습니다.”

 

헤이즐 스미스의 <장마당과 선군정치>와 이 책의 공통점은 북한에서 일어난 사회 변화의 주요 원인을 1990년대 고난의 행군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 “국가와 주민 간 유대를 크게 약화시키면서 북한 주민들이 각자 살 길을 찾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정부는 예전처럼 경제활동의 유일한 조정자로 군림하기보다, 이제 유사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변한 북한 사회에서 그저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저자들의 말처럼 북한 정부가 현재 북한 사회에서 “그저 한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전통적 의미의 사회주의 경제시스템이 이미 오래 전 붕괴된 북한 체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은, 북한 주민들의 또 다른 ‘자력갱생’의 결과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국가가 보장해주지 못하는 생존 문제를 자력으로 이뤄온 것이다.

 

저자들은 장마당을 비롯한 회색경제지대, 주민들의 여가 생활, 달라진 패션과 유행, 휴대전화의 대량보급과 라디오 청취로 일어난 변화상 등을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소개한다. 더불어 북한의 권력구조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나름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저자들은 이를테면 김정은 위원장처럼, “현재 북한이 실질적으로 어떤 한 사람에 의해 운영되는 건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 “북한에도 뚜렷한 국가수반이 있지만 그 뒤에는 늘 일치되는 것은 아닌 이해관계와 성향을 가진 권력자로 이뤄진 층이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오늘날 북한은 김정은과 그의 친척, 황병서와 김경옥 같은 조직지도부 고위 인사, 그리고 이들의 신임을 받는 군 고위 인사와 당 관료로 구성된, 형식적으로는 통일돼 있지 않은 연합체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때문에 저자들은 “설사 북한에서 강경 정책에 이어 개혁 정책이 나오거나, 떠오르는 유망주가 어느 날 갑자기 축출된다고 해서. 그게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절대 독재자 김정은이 나라를 좌우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김정은도, 다른 어느 개인도 북한을 완전히 혼자서 좌지우지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뜻할 뿐이다.”

 

이러한 주장에 얼마나 많은 북한 전문가들이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군부, 조직지도부, 개인비서국, 국가보위성(전 국가안전보위부) 등 주요 권력기관이 때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며 충돌하고, 그 사이 김정은이 있다는 이야기다. 김정은을 절대권력자로 인식하는 보통의 시선과는 사뭇 다르다. 이 주장은 아마 앞으로 북한의 모습을 지켜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에 담긴 이야기 중 특히 관심이 갔던 것은 북한의 마약 제조, 그리고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설명이었다. 마약 제조에 대한 이야기는 사뭇 생경했다. 북한이 국가 수입을 위해 마약을 대량으로 생산해 국제적으로 판매해 왔다는 주장은 조금 더 사실관계가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북한 사회 내부에서도 마약이 널리 유통되고 있다는 주장 역시 미심쩍다. 과연 북한은 마약으로 찌든 나라가 된 것일까.

 

정치범수용소 역시 우리가 구체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자료나 증거는 없다. 그곳에서 생활하다 석방 혹은 탈출한 이들의 증언에 대부분 의지할 수밖에 없다. 물론 수용소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만, 그 내부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사실은, 북한 정부의 정보 제공(물론 기대할 수 없다)이나 우리가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것이 제일 확실하다(물론 이것도 현실적으로 극히 가능성이 희박하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북한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긴 하지만, 내부의 수많은 역동성이 존재하며, 주민들이 각자 삶과 생존을 위해 나름의 방식을 체득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들은 새겨들을 만 하다. 특히나 북한에 대한 선입견, 편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말이다.

 

물론 저자들이 책을 쓰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수많은 자료를 참고했지만, 그것으로 이 책이 북한 내부의 실상을 정확하게 담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들 스스로 밝혔듯, 이 책이 북한의 전부를 말해주진 않는다. 다만 북한 내부의 역동성을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트럼프가 국회연설을 통해 강조했던 것은, 지난 70여 년 간 우리가 지겹게 들어왔던 반공교육에 다름 아니었다. 무려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그리고 우리 내부에서도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뀌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에서 오직 북한만은 변하지 않았다는, 혹은 변하면 안 된다는 이 믿음과 신화는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답은 물론 자명하다. 대화와 교류를 통해 우리가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가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겠지만, 그것을 끝까지 애써 외면하는 이들에겐, 결국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트럼프가 부디 트윗만 날리지 말고, 직적 북한과 대화하고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럴 용기와 혜안이 있다면 말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처럼 대화와 협상, 제재와 압박이라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 이야기만 되풀이할 것인가. 끝까지 압박하면 결국 북한이 두 손 들고 나와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또 하나의 신화에서 언제쯤 벗어날 것인가. 외교적 수단으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원칙은 분명 지당하지만, 과연 군사적 압박 위주의 접근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게다가 한미정상회담에서 보여준 민망할 정도의 미국 의존적, 추종적 모습에서 과연 북한이 우리와 외교적 수단으로 대화할 생각을 가질지, 평화적으로 핵문제를 해결해 나감에 있어 우리를 당사자의 하나로 인정할 것인지 알 수 없다. 내가 김정은이라면 굳이 남한과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 노예랑 대화할 이유는 없다. 그 주인과 하면 되니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장마당과 선군정치>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북한은 분명 특별한 국가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 역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욕망과 개인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 그리고 북한 정부 역시 국민의 생존과 번영을 국가 존립의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핵무기가 단순히 김정은을 비롯한 권력집단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면, 어쩜 북한은 이미 내부적으로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사실로부터 북한 바라보기를 시작해야 한다.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분석해야 한다. 북한을 가치판단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사실 확인을 통해 평가해야 한다. 아직도 북한 정부가 자국의 주민들을 고의적으로 굶겨 죽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누구보다 먼저 이 책을 일독하길 권한다.

 

북한은 괴물이 아니다. 좀비가 아니다. 그렇게 규정하고 왜곡시켜버린 이들이 오히려 기형적 존재일 것이다. 북한이 괴물이라면 우리는 북한과 공존할 수도, 통일을 이룰 수도, 반대로 북한을 무너뜨릴 수도 없다.

 

그리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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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트럼프 왕국 - 어째서 트럼프인가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18
가나리 류이치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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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가정은 없지만, 상상해본다. 만약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이 트럼프가 아닌 힐러리였다면, 현재 한반도 상황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럼에도 같은 모습이었을까. 지금 북미 간 첨예하고도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이 달라졌을까. 우리는 전쟁의 위협을 덜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보다는 덜 부끄럽게 미국에 매달리고 있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이다. 현실은 냉정하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2018년이 아직 오지 않았듯, 2016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를 주절거리고 있다.

 

곧 트럼프가 한국 땅을 밟는다. 그의 1박 2일 일정에 우리 정부는 5억 원 정도의 비용을 들여가며 극진히 대접할 계획인 것 같다. 국빈방문이란다. 상황이 엄중하니 트럼프의 비위를 상하게 하면 안 되리라. 알면서도 배알이 꼴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반도의 운명이 하찮게 여겨지는 지금, 대한민국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 역시 현실이다.

 

미 대선 전 국내외 언론들은 트럼프를 반쯤 정신이 나간 속물, 허접, 천박한 재벌정도로 보았다. 이른 바 트럼프 돌풍도 찻잔 속에서 맴돌다 끝나리라 예상한 이들이 많았고, 그의 어마무시한 공약들도 한낱 코미디 정도로만 비쳐졌다. 대부분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되리라 예상치 못했다. 될 수 없는 인물이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그가 당선되니 한 순간에 평가를 바꿔버리는 언론도 있었다. 도대체 어떤 점을 들어 그를 높게 평가하는가 보았더니, 예전 이명박 대통령을 예찬했던 것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그는 사업가로 성공했고, 백만장자라는 것이다. 그것과 대통령이라는 직책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어찌되었든 현재 백악관의 주인은 트럼프다.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 앞에서 대한민국은 사면초가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말 폭탄이 오가는 사이 불안에 떨어야 했던 건 우리였다. 일본의 호들갑이 말 그대로 호들갑이었다면, 우리가 느낀 위협과 공포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때문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트럼프가 대부분의 예상을 뒤엎고 미국 국민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 그 원인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미국인들은 ‘또라이’ 사업가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을까.

 

책의 저자는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미국 대선 1년 전부터 트럼프에 대한 조사와 취재를 시작했다. 그를 지지하는 미국의 평범한 노동자들을 수없이 만나, 왜 트럼프를 지지하는 지 그 이유를 들어보았다.

 

2012년 대선에서는 공화당 후보가 패배했던 지역, 하지만 2016년 대선에서는 트럼프가 승리를 거둔 6개의 주. 이 중 5개 주에 저자는 주목했다. 그곳들은 바로 러스트 벨트, 즉 쇠락한 공업지대에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포함되는 지역이었다. 저자는 이 지역들을 포함해 14주를 돌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문득 이명박 대통령의 후보시절 유세장면이 떠오른다. 아마 부산이었나. 그는 무대 건너편 빌딩에 붙어 있는 임대 광고를 가리키며, “내가 대통령이 되면 빈 상가가 없어질 것, 임대 광고를 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정말 그가 대통령이 되면 빈 상가나 건물이 모조리 사라지고, 경제가 불붙듯 좋아지리라 믿었을까.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예전에 대한 향수와 현실에 대한 분노, 체념이 쌓여 폭발 직전이었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임금을 받고, 가족들을 보살필 수 있었던, 지극히 당연하게만 여겼던 과거가, 더 이상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그 과거를 트럼프가 다시 재현해 주리라 믿었다.

 

오랫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던 이들도, 결국 그들의 삶이 바뀌자 트럼프에게 희망을 걸었다. 힐러리는 누가 봐도 워싱턴과 뉴욕 등 대도시와 어울리는 특권층으로 비쳐졌다. 반면 트럼프는 달랐다. 그는 백만장자였기에, 대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지 않고, 자신의 돈으로 선거를 치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의 로비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만이 노동자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외쳤다. 쇠락한 시골 마을까지 찾아와 유세했다. 노동자들은 열광했다.

 

트럼프를 지지한 미 국민들은 현재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국가가 자신들을 먹고 살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을 보살필 수 있을 정도의 삶이면 되었다. 자녀들이 열심히 공부한 만큼 취업이 이뤄져 또 다른 가정을 꾸리기를 바란다. 노후에 자식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느 새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하나의 소망이 되어버린 지금이다.

 

이명박은 자신의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 지금은 그것이 더 궁금하지만. 트럼프 역시 큰 소리로 미 국민들에게 고용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과연 그가 어떻게 체념과 분노에 빠진 미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미국의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오지만, 정작 미국인들은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의 임기 4년 미국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4년은 그 전과 분명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것이다.

 

미국의 재채기가 한국에겐 독감으로 돌아오는 지금이다. 그의 집권 이후 북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덩달아 남북관계도 긴장의 연속이다. 이명박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졌던 참담한 남북관계는 여전하다. 오히려 전쟁이라는 막연한 공포가 보다 실질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결국 미 국민들의 분노가 결과적으로 우리에겐 위기로 돌아온 셈이다.

 

트럼프의 방한을 앞두고,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결국 그는 방한할 것이고, 이 땅에서 무슨 소리를 떠들지 모른다. 우리는 힘이 없다. 약소국이자 분단국이다. 제 아무리 떠들어도 현재로서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때문에 전혀 내키지 않더라도 미국이라는 국가를 알아야 하고, 그 미국을 이끌고 있는 트럼프라는 인물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북한을 잘 알아야 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정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들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연일 쏘아올린다고, 단지 거부하거나 비난만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찌되었든 북한은 통일의 대상이자, 우리 민족이다. 식구다. 때문에 알아야 한다.

 

고로 나는 트럼프라는 인물에 대해 더 알아볼 생각이다. <힐빌리의 노래>도 읽어볼 생각이다. 쇠락한 미국의 공업지대에서 자라난 백인 노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생각하는 강력하고 위대한 미국은 무엇인지 한 번 들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시진핑이나 아베, 푸틴과 같은 스트롱맨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도 고민해볼 생각이다.

 

부지런한 저자 덕분에 미국 한 번 가본 적 없는 나 같은 촌놈도 평범한 미국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독서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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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틀키드 2018-02-08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럼프 방한 전 쓴 서평입니다.
 
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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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분명 아니라고 버럭 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요즘 한반도는 참 재미없다. 북한의 높아져만 가는 핵과 미사일 능력 앞에 트럼프는 내심 안절부절 못하며 입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고, 김정은 역시 당신만 드립칠 줄 아느뇨!’ 하며 미국 늙다리를 조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전쟁’ ‘비상식량’ ‘전술핵 재배치등 마치 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 당시를 떠오르게 하는 오래된 단어들만 만지작거리며 역시나 안절부절.

 

그렇담 재미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라고 말하실 분도 있겠다. 물론 옆에서 한반도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은 재미있겠지. 하지만 당사자들은 재미있을 리 없잖아! 우리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전혀 재미있지도 유쾌하지도 않다.

 

여기에 더 재미없게 만드는 이들이 정치인들이다. 자유당(줄임말이지 조롱조는 아닙니다. !)은 전술핵 재배치를 당론으로 정해 미친 듯이 떠들고, 자신들이 폭망 시킨 안보 상황을, 언제나 그랬듯 죄다 문재인 정부 탓으로 돌린다. 기억력이 금붕어만큼도 안 되는 이들이다. 언어구사력과 염치만 없는 줄 알았더만, 애초에 지능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정부와 여당 역시 무력하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나름 노력을 하고 있겠지만, 청와대와 여당 내에 여전히 펄펄 살아 숨 쉬는 친미사대 세력들은 우리의 안보를 미국에게 아웃 소싱할 수 있다는, 실로 대단하고 담대한 착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어 미국의 무기를 사준다면 우리의 안보가 굳건해질 것이란 믿음은, 물론 개소리일 뿐이다.

 

일부 확인되지 않은 북한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평범한 북한 주민들은 어차피 미국과의 전쟁이 터지면 모두 죽을 것임을 잘 알고 있고, 거의 자포자기한 상황이라고 한다. 지방급 간부들이나 금을 모아두고, 비상사태시 어디로 도망갈까 궁리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남이나 북이나 결국 일반 시민들만 전쟁의 1차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 재미없다. 있는 것들이나 비상식량이나, 금붙이 따위를 모아두고 삽질하는 것이다.

 

이러니 재미없다. 긴 명절 연휴, 많은 국민들이 오랜만에 쉴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연휴 기간 중 언제 북한이 또 다시 도발을 해올까 불안해하는 마음도 함께 장착하고 지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린 인질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나 역시 용빼는 재주가 없으니, 이 재미없는 상황을 재미없게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나를 구원해주신 분이 바로 사노 요코 할머니였다. 이 기기묘묘한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 나의 이 우울함은 절정에 이르렀을 것! <사는 게 뭐라고>를 시작으로, <죽는 게 뭐라고>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이것 좋아 저것 싫어>까지 내리 요코 할머니의 글에 빠져 지냈다.

 

얼핏 읽으면 그녀의 글은 조금 까칠하고, 뻔뻔하고, 예의 없고, 무뚝뚝하다. 뭔 불만이 그리 많으신지, 세상 맘에 드는 게 한 개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수도국 직원과의 전화 대혈투 장면은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들 정도다. ‘, 우연이라도 만날까 두려운 할머니셔!’ 라는 엄청난 박력.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거기에다 탁월하다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할 만큼 멋진 글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내공이 아니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문장. 에세이스트, 동화작가로서 사노 요코는 거대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매력은 하찮아 보일 수도 있는 것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지극한 관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과, 그것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또 한 명의 일본 에세이스트 요네하라 마리 역시 사소함을 사소함으로 만들지 않는 매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데, 요코 여사 역시 그렇다. 그리고 때론 낄낄댈 수 있는 웃음과 묵직한 감동을 전해준다. 이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날 그 길로 재규어 자동차를 사버린 담대함. 암 치료를 받다가 집에 돌아와 줄담배를 피우며, ‘내가 포기할 줄 알았지?!’ 외치는 패기, 자신이 병원의 진단보다 더 오래 살자 . 생활비를 다 써버렸는데, 큰일이군하며 난처해하는 귀여움의 소유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가 바로 요코 할머니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그야말로 시크했다. 누구나 암에 걸릴 수 있으니, 크게 낙심할 것도, 위로를 받으려 할 것도 없다는 투다. 그리고 남겨진 삶을 당당히 씩씩하게 살아낸다. 죽음 앞에서 그야말로 태연자약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사람과 이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 때문이라고. 그녀가 아무리 시크하고 까칠하고 때로 뻔뻔해보여도,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런 바탕이 있었기에 그녀는 치열하게 삶을 즐길 수 있었고, 죽음마저 그녀를 흔들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사랑하는 형제들이 가난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 본 그녀는 때문에 자신의 죽음에도 초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는 쉽게 눈물을 쏟아내던 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세상은 아름다워를 노래한 이는 아니었다.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일본의 잘못된 과거와 현재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미국 등 초강대국의 어이 상실 퍼포먼스에도 냉소를 날렸다. 과거 한반도를 유린했던 일본의 잘못을 반성하며, 만날 때마다 일본을 비난하는 한국인 지인에게 , 아무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를 연발하던 이였다. 세상이란, 삶이란, 상상처럼, 바람처럼 휘황찬란하거나 황홀한 것이 아님을, 멋진 세상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녀는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직설적인 문체로 보여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사소한 것들이 자칫 무시되고 천대받는 시대다. 온갖 거대 담론들이 판치고, 정작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소한 것으로 분류되기 일쑤다. 북미 간 말 폭탄이 오가는 그 어디에서도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북한의 미사일 사정거리나 핵무기의 위력은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로 인해 종말을 맞을 우리들의 모습은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다. 실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함에도 말이다.

 

때문에 나는 사노 요코 여사의 소소한 위로가 더욱 고맙다. 그리고 소중하다. 그 어떤 정치인도, 그 어떤 전문가도 그녀와 같은 위로를 전해주지는 못한다. 어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담론이나 정의, 당위가 아니라, 사소한 위로일지 모른다. 그 사소한 위로로 우리는 비로소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따뜻한 사람의 독설은 때로 힘이 된다.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의 분노는 공감을 얻는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믿는 이들은 영원히 아름답다.

 

매일 매일 살벌하고 우울한 소식만 전해지는 지금, 까칠한 요코 할머니의 이유 있고, 뼈대 있고, 재미와 감동까지 더해지는 독설로 위안을 얻어 보는 것도 쾌히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삶의 작은 기쁨이 될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피곤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다. 나 역시 그 피곤에 절어, 게으름에 무너져, 내적 방황과 모순에 부딪쳐(?), 이 땅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다시 한 번 절망하여(웃기고 있네), 어쩔 수 없는 존재의 회의감에(죄송합니다. 그만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한 것 같다. 뭐 눈치를 채신 분들이 얼마나 계실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다시 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해봐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보다 더 성실하고 근면하게(영 믿음이) 해봐야겠다. , 그렇습니다.

 

부디 많은 분들이 평안하게 시절을 보내셨으면 좋겠다. 진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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