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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평점 :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분명 아니라고 버럭 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요즘 한반도는 참 재미없다. 북한의 높아져만 가는 핵과 미사일 능력 앞에 트럼프는 내심 안절부절 못하며 입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고, 김정은 역시 ‘당신만 드립칠 줄 아느뇨!’ 하며 ‘미국 늙다리’를 조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전쟁’ ‘비상식량’ ‘전술핵 재배치’ 등 마치 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 당시를 떠오르게 하는 오래된 단어들만 만지작거리며 역시나 안절부절.
그렇담 재미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라고 말하실 분도 있겠다. 물론 옆에서 한반도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은 재미있겠지. 하지만 당사자들은 재미있을 리 없잖아! 우리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무력감은, 전혀 재미있지도 유쾌하지도 않다.
여기에 더 재미없게 만드는 이들이 정치인들이다. 자유당(줄임말이지 조롱조는 아닙니다. 흥!)은 전술핵 재배치를 당론으로 정해 미친 듯이 떠들고, 자신들이 폭망 시킨 안보 상황을, 언제나 그랬듯 죄다 문재인 정부 탓으로 돌린다. 기억력이 금붕어만큼도 안 되는 이들이다. 언어구사력과 염치만 없는 줄 알았더만, 애초에 지능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정부와 여당 역시 무력하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나름 노력을 하고 있겠지만, 청와대와 여당 내에 여전히 펄펄 살아 숨 쉬는 친미사대 세력들은 우리의 안보를 미국에게 아웃 소싱할 수 있다는, 실로 대단하고 담대한 착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어 미국의 무기를 사준다면 우리의 안보가 굳건해질 것이란 믿음은, 물론 개소리일 뿐이다.
일부 확인되지 않은 북한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평범한 북한 주민들은 어차피 미국과의 전쟁이 터지면 모두 죽을 것임을 잘 알고 있고, 거의 자포자기한 상황이라고 한다. 지방급 간부들이나 금을 모아두고, 비상사태시 어디로 도망갈까 궁리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남이나 북이나 결국 일반 시민들만 전쟁의 1차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 재미없다. 있는 것들이나 비상식량이나, 금붙이 따위를 모아두고 삽질하는 것이다.
이러니 재미없다. 긴 명절 연휴, 많은 국민들이 오랜만에 쉴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연휴 기간 중 언제 북한이 또 다시 도발을 해올까 불안해하는 마음도 함께 장착하고 지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린 인질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나 역시 용빼는 재주가 없으니, 이 재미없는 상황을 재미없게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나를 구원해주신 분이 바로 사노 요코 할머니였다. 이 기기묘묘한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아, 나의 이 우울함은 절정에 이르렀을 것! <사는 게 뭐라고>를 시작으로, <죽는 게 뭐라고>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는 안 되지> <이것 좋아 저것 싫어>까지 내리 요코 할머니의 글에 빠져 지냈다.
얼핏 읽으면 그녀의 글은 조금 까칠하고, 뻔뻔하고, 예의 없고, 무뚝뚝하다. 뭔 불만이 그리 많으신지, 세상 맘에 드는 게 한 개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수도국 직원과의 전화 대혈투 장면은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들 정도다. ‘으, 우연이라도 만날까 두려운 할머니셔!’ 라는 엄청난 박력.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거기에다 탁월하다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할 만큼 멋진 글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내공이 아니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문장. 에세이스트, 동화작가로서 사노 요코는 거대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매력은 하찮아 보일 수도 있는 것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지극한 관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과, 그것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또 한 명의 일본 에세이스트 요네하라 마리 역시 사소함을 사소함으로 만들지 않는 매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데, 요코 여사 역시 그렇다. 그리고 때론 낄낄댈 수 있는 웃음과 묵직한 감동을 전해준다. 이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날 그 길로 재규어 자동차를 사버린 담대함. 암 치료를 받다가 집에 돌아와 줄담배를 피우며, ‘내가 포기할 줄 알았지?!’ 외치는 패기, 자신이 병원의 진단보다 더 오래 살자 “흠. 생활비를 다 써버렸는데, 큰일이군”하며 난처해하는 귀여움의 소유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가 바로 요코 할머니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도 그야말로 시크했다. 누구나 암에 걸릴 수 있으니, 크게 낙심할 것도, 위로를 받으려 할 것도 없다는 투다. 그리고 남겨진 삶을 당당히 씩씩하게 살아낸다. 죽음 앞에서 그야말로 태연자약할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사람과 이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 때문이라고. 그녀가 아무리 시크하고 까칠하고 때로 뻔뻔해보여도,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런 바탕이 있었기에 그녀는 치열하게 삶을 즐길 수 있었고, 죽음마저 그녀를 흔들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사랑하는 형제들이 가난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 본 그녀는 때문에 자신의 죽음에도 초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는 쉽게 눈물을 쏟아내던 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세상은 아름다워”를 노래한 이는 아니었다.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일본의 잘못된 과거와 현재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미국 등 초강대국의 어이 상실 퍼포먼스에도 냉소를 날렸다. 과거 한반도를 유린했던 일본의 잘못을 반성하며, 만날 때마다 일본을 비난하는 한국인 지인에게 ‘네, 아무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를 연발하던 이였다. 세상이란, 삶이란, 상상처럼, 바람처럼 휘황찬란하거나 황홀한 것이 아님을, 멋진 세상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녀는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직설적인 문체로 보여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사소한 것들이 자칫 무시되고 천대받는 시대다. 온갖 거대 담론들이 판치고, 정작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소한 것으로 분류되기 일쑤다. 북미 간 말 폭탄이 오가는 그 어디에서도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북한의 미사일 사정거리나 핵무기의 위력은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로 인해 종말을 맞을 우리들의 모습은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다. 실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함에도 말이다.
때문에 나는 사노 요코 여사의 소소한 위로가 더욱 고맙다. 그리고 소중하다. 그 어떤 정치인도, 그 어떤 전문가도 그녀와 같은 위로를 전해주지는 못한다. 어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담론이나 정의, 당위가 아니라, 사소한 위로일지 모른다. 그 사소한 위로로 우리는 비로소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따뜻한 사람의 독설은 때로 힘이 된다.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의 분노는 공감을 얻는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믿는 이들은 영원히 아름답다.
매일 매일 살벌하고 우울한 소식만 전해지는 지금, 까칠한 요코 할머니의 이유 있고, 뼈대 있고, 재미와 감동까지 더해지는 독설로 위안을 얻어 보는 것도 쾌히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삶의 작은 기쁨이 될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피곤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다. 나 역시 그 피곤에 절어, 게으름에 무너져, 내적 방황과 모순에 부딪쳐(뭐?), 이 땅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 다시 한 번 절망하여(웃기고 있네), 어쩔 수 없는 존재의 회의감에(죄송합니다. 그만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한 것 같다. 뭐 눈치를 채신 분들이 얼마나 계실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다시 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해봐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보다 더 성실하고 근면하게(영 믿음이…) 해봐야겠다. 넵, 그렇습니다.
부디 많은 분들이 평안하게 시절을 보내셨으면 좋겠다. 진심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