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꿈치 사회 -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강수돌 지음 / 갈라파고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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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주 가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추하지 않게, 개나 돼지와 다르게 사는 것일까, 생각해 보곤 한다. 물론 그렇다고 개와 돼지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우리가 개, 돼지와 같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표현상의 문제로 항상 개와 돼지에겐 미안하게 생각한다.

 

저자는 내가 무척 존경하는 분이다. 아주 예전,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적도 있다. 당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멍청한 머리로 인해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적어도 그때의 느낌은 남아있다. 여느 그렇고 그런, 한심한 교수와는 다른 분이라는 점. 강수돌 교수는 삶으로, 행동으로, 자신의 글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매우 힘이 센 분이다.

 

그가 책을 펴낼 때마다 가능하면 챙겨두고 읽으려 노력한다. 그렇다고 전부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의 글은 간결하고, 거짓이 없으며, 무엇보다 이해하기 쉽기에, 나에겐 고마운 글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책, 그런 글, 사실 찾기 그리 쉽지 않다.

 

팔꿈치 사회는 독일에서 맨 처음 사용된 표현이라 한다. 팔꿈치로 옆 사람을 누르고 앞으로 나가야만 생존할 수 있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경쟁사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당연히 지금 우리의 모습은 자타가 공인하는 팔꿈치 사회다. 아예 그 팔꿈치에 날카로운 창이나 칼을 덧붙인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니까.

 

우리는 경쟁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태어나자마자, 사물을 인식하고 아주 초보적이나마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치열한 레이스에 돌입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아이들은 무한경쟁의 도가니에 빨려 들어가 제일 행복하고 아름다워야 할 젊음의 시절을 고통과 좌절, 분노의 시간으로 보낸다. 도대체 언제 주어질지도 모르는, 그리고 사실 그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져가고 있는, ‘개인의 안정을 위해, 젊음을 빼앗긴다.

 

나이가 들어서도 달라질 것은 없다. 또 다시 경쟁, 또 경쟁. 그러다 낙오되면, 철저히 밑바닥으로 떨어져, 다시 일어서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게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연대와 공감보다는, 이기주의와 온갖 속임수가 우대 받고 칭송 받는 시대. 사기꾼의 시대, 협잡의 시대, 불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밑바탕에는 경쟁이라는 룰이 자리 잡고 있다.

 

강수돌 교수는 사실, 경쟁이라는 단어조차 협동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경쟁(Competition)이란 말의 어원을 보면, 라틴어로 함께 추구하는 것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함께 추구하는 것, 그것은 결코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직접 행동하고 있는 경쟁과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잔인하고 무의미하고 결국 아무도 승자가 될 수 없는 경쟁에 인생 전체를 갖다 바치며, 기계의 부속처럼 살아가고 있을까. 그것에 대한 정답은 명확하다. 자신의 몸집을 끝없이 불리기 위해 자본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자의반 타의반 끌려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쟁에서 승자와 패자는 별 의미가 없다.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고, 버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경쟁의 과정이나 결과는 결국 궁극적으로 인간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고 경고한다. 인간이 없는 사회, 즉 우리 모두가 사라진 사회에서, 과연 승자는 누구인가. 극소수의 기득권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모품으로 버려지는 모습.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의 경쟁이다.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연대의 본능, 협동의 본능을 느낄 수 있다. 원래 우리 인간은 서로 도우며 연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경쟁이라는 비정상적 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살아온 것은 인류 역사 속에서 고작 몇 백 년이 채 되지 않는다. 때문에 경쟁은 결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어느 사이엔가, 이미 우리에게 내면화 되어 있는 경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과연 이것이 불멸의 존재인지, 아니면 우리들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본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연대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미미한 존재는 물론, 전 세계 모든 국가들에서 이미 경제적 성장의 한계는 뚜렷하다. 애초 무한성장이란 것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경제적 이익을 얻으면, 당연히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손해를 보는 대상이, 피해를 입는 대상이 저개발 국가인지, 아니면 자연 그 자체,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인지, 그것만 다를 뿐이다. 잘난 경제학자들이 떠드는 것 중 그나마 유효한 것 하나는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 그것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어마어마한 전염병으로 이미 수 십 년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그 대신 이익을 얻은 것은 그들에 비해 극소수에 불과한 몇몇 이익집단, 기업가 그리고 자본의 주인들일 뿐이다. IMF 이후 대한민국 사회가 송두리째 바뀌고, 공동체가 무너지고, 세월호와 같은 끔찍한 범죄가 여전히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 바로 그 이유에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치명적인 병균이 자리 잡고 있다.

 

무책임이 당연한 사회, 몰상식, 몰염치한 사회에서 애초 세월호의 진상을 밝히라는 호소는 허무한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세월호 비극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권력을 누리며, 오히려 유가족들을 탄압하고 모욕하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참혹한 현실 속에는 무한경쟁, 경쟁사회라는 비정상적 시스템이 근원적으로 깔려 있다. 이를 깨부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세월호를 바다 속에서 꺼내지 못할 지도 모른다. 저자는 말한다. 더 이상 피라미드형의 사다리 질서가 아닌, 모두가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며 밥을 먹는 원탁형 질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서북청년단 재건을 외치는, 전혀 청년으로 보이지 않는 집단들의 광기와 무지를 보며, 이러한 기형적 뒤틀림의 근원 속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심과, 그것이 변태적으로 진화하여 지금의 경쟁 논리가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거기에 자본이라는 악마가 다시 붙고, 추악한 욕망이 붙고, 권력이 사적으로 이용하고

 

체념하고 싶은 세상이다. 배우 김부선 씨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 행사와 투쟁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어이없는 행태를 보며, ‘대한민국, 졌다 졌어라고 한탄했다. 나도 GG를 누르고 싶다. 이미 나라임을, 공동체임을 포기한 모습이니까. 하지만 아직은 누를 수 없다. 이 지긋지긋하고 애틋한 희망을 놓을 수는 없다. 여전히 난 모두가 둘러앉아 함께 밥을 나눠 먹는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에서 밥 한 번 먹고 싶기 때문이다.

 

좋은 책, 함께 나눠야 할 책이다. 세상도 어서 그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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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밥 먹여준다 - 딴지일보 정치부장의 천만 정치 덕후 양성 프로젝트
박성호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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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심각한 정치사회적 문제들이 첩첩산중처럼 쌓여 있고 완전히 꼬여버린 역사를 가진 나라가 백 년도 안 돼서 모든 게 멀쩡하게 잘 돌아가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 과한 일이겠지. 그냥 오늘의 현실만 보자면, 보수와 진보로 분열되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단순해 보이겠지만, 결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거든. 보수도 제대로 된 보수가 아니고, 진보도 아직 제대로 된 진보가 아니야.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느라 가치를 논하기 전에 당장 더 급한 생존을 위해 악다구니 치면서 먹을 거 가지고 싸우던 수준에서 얼마 오지 못한 상태라니까.”

- 278p

 

절대로 정치가 주는 고통 앞에 무릎을 꿇으면 안 되는 거야. 고통을 넘어서야 한다고. 고통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해서도 안 되는 거야. 정면으로 직시하고, 절대 물러서지 말라고. 그리고 그 고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방법, 고통을 나눔으로써 희망을 찾고 감동을 만들어내는 길을 발견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벅찬 감동이 주는 느낌을 온몸으로 느껴보라고. 이게 진정하게 정치를 즐기는 방법이야. 비겁하게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치는 거야.” - 290p

 

이 책이 나왔을 때가, 20123.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었어. , 꿈 많던 시절이었지. 이번에는 무언가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감으로, 자다가 가끔 벌떡 일어나, 맛이 간 놈 마냥, ‘으하하하!’ 웃기도 했던,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네.

 

용산 참사, 4대강 사업을 비롯한 모든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죄다 진상이 밝혀져 혼날 이들은 혼나고, 학교에 들어갈 이들은 여지없이 들어가는, 그런 날이 곧 돌아오리라 믿었던, 순진무구 희망 찬란했던 그런 나날이었어. 어흑.

 

하지만, 지금은 20149월이야. 그 사이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다들 뼈가 시리도록 절감하고 있겠지. 두 번 연속 자폭을 해버린 국민들 앞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나라의 녹을 먹는 국정원 직원이 불법 선거개입을 시도하며, 키보드를 두들기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경찰에게, 오히려 감금당했다고 설레발쳐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 진심(!)이 인정되는 세상, 그리고 그런 코미디를 총 연출한 국정원장은 결국 또 다시 코미디 같은 법의 판결을 받았어. 지금도 그 국정원 여직원이 얼굴을 가리고, 앞에 무려 커다란 병풍을 치고, 증언하던 모습이 떠올라.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자신을 피해자라 여기고 있었을까.

 

정치, 참 짜증나는 이야기야. 정치인 중 욕을 안 드시는 분이 거의 없고, 잘난 언론들은 매일매일 정치판의 아수라장을 전하느라 바쁘지. 정치하는 것들은 죄다 도둑놈 같고, 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 상식처럼 통해.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저자는 책의 첫 장부터, 정치란 것이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것이라 말해. 월드컵보다 박진감 넘치고, 스펙터클한 한 편의 대서사시라는 거지. 월드컵이나 프로야구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는 신선한 평가야. 그동안 정치에 환멸 혹은 무관심했던 이들에겐, ‘뭔 소리여 당최?’의 반응을 불러오기 십상인 도발인 셈이야.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정치라는 놈이 저자의 주장처럼 꽤 재미있는 게임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 게다가, 그 정치라는 게임이 내 삶과 다이렉트로 팍 연결되어있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과시한다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되지. 더 더 게다가, 그 게임의 판돈을 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 국민이잖아. 그럼 좀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나. 지금 대통령이 대통령이 아니고, 지금 야당의 한 의원이 그냥 의원이 아닌 대통령이었다면, 혹은 바이러스 살벌히 잘 잡던 어느 분이 대통령이었다면, 어땠을까? 잘 하든 못 하든 분명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대한민국이 되었겠지? 물론 천지개벽할 변화는 아니겠지만, 지금과 100% 같지도 않았을 것이란 소리야.

 

그렇게 대단+중요한 선택을 우리가 제대로 현명히 하려면, 귀찮더라도 분명 정치란 놈의 스펙을 어느 정도는 파악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정치 따위 개나 줘버려! 가 되거나, 아무한테나, 기분 내키는 대로, 그날 날씨나 바이오리듬에 따라 투표용지를 투척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하는 거잖아. 그리고 자신은 분명 자신의 의지대로 투표한다고 생각을 해도, 송편도 아닌 종편처럼 냄새나는 언론의 영향 속에 무의식 적으로 엉뚱한 투표를 하는 경우도 생겨. 좀 짜증나지.

 

솔직히 따지고 보면, 또 우리 국민들만큼 정치에 관심이 많은 이들도 드물어요. 인정하자고. 택시를 타면, 국가대표급 정치평론가들이 운전을 하시며,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정치평론을 하시고, 술자리 어디에나 슬쩍 끼어들어도, 여지없이 정치 이야기가 나오지. 물론 지나치게 몰입하다보면 싸우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 자제하는 편이지만, 결국 정치이야기가 주된 안주거리가 되는 것이 대한민국 음주계의 모습이야. 부정하기 힘들지?

 

그런데 왜 이런 정치 마니아들에게 정치를 어떻게 보십니까?’하고 물으면, 대부분 매우 부정적인 답변이 나오는 것일까. 저자는 그게 바로 기존 정치인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현 권력에 복무하는 언론이 부러 조장하는 꼼수라고 지적해. 즉 기존에 해 드시던 분들의 입장에서는, 국민들이 이것저것 시시콜콜 간섭하고 훈수두는 게 싫은 거야. 최대한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야,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해드실 수 있으니까. 여기에 기생하다 못해 일체화가 되어버린 언론들이 매일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를 그야말로 쏟아내며, 국민들에게 정치에 대한 반감을 조성하고 있고 말야. 환상의 호흡이지만, 지저분하기도 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서라도 우리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또 이것을 충분히 즐겨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거룩한 메시지야. 그래야 이 빌어먹을 세상이 단 한 발이라도 발전할 수 있고, 또 우리의 삶이 단 1센티라도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지. ,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극히 지당하신 말씀이야. 당근이지. 그걸 누가 모르나.

 

그렇다면, 이제는 이들 환상의 콤비의 꼼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할까. 저자의 설명은 꽤 그럴 듯해. 아니, 맞다고 봐야지. 바로 너무 아프기 때문이야. 정치를 알면 알수록, 우리 주변에서 매우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고, 상처받는 이들이 많음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야. 타인의 고통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사이코패스라면 모를까,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 중, 이웃의 고통, 이웃의 눈물에 흔들리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될까. 지금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국민들의 호응과 응원을 봐도 알잖아. 물론 단식하는 이들 앞에서 초코바 쭉쭉 빨고 자장면 쳐드시던 라이또 집단은 빼고 말야.

 

정치를 알수록 이 세상의 민낯을 더 많이 느끼게 되지. 그리고, 엿 같지만 더 많이 울게 돼. 나 같이 정치에 자와도 친분관계가 없는 사람도 그걸 느껴. 정말 너무 화가 나고, 억울하고, 아파서 눈물이 나오더라니까. 젠장. 엉엉 운적도 있어요!

 

하지만 당장 세상이 아름답게 변하지는 않더라도, 앞서 인용한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끝까지 유쾌하게 나아가야 할 거야. 끝까지 가는 놈이 이기는 거니까! 그리고 나의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타인의 눈물을 걱정해주는, 그런 쿨한 인간이 되어야 해. 그게 이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금씩이나마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거야! 믿어보라니까!

 

책은 딴지일보 김 총수의 추천사처럼 매우 근면한 정치게임 입문서라 할 수 있어.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정치 따윈 개나 줘버려! 라고 한다면. , , . 슬픈 일이지 뭐. 암튼 난 강추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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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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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 용서해야 하네. 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일이 이러저러하게 되지 않았다고 탓할 수만은 없지.”

- 213p

 

12년 전 읽었던 책을 굳이 다시 꺼내든 것은, 무언가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그 무엇이 정확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뒤에야 알았다. 용서였다.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한 확인이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행동을 하며 살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었던 지금의 내가, 본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왜 후회라는 그리 훌륭하지 못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고자 했다.

 

온통 핑계만 만들어대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약한 것이 아니라, 타인이, 이 세상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어느새 중얼거리고 있었다. 또한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존재가 문득 내 앞에 나타나, 어리석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 가르침을 주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분노조차 타성에 젖고, 누군가에 대해 애정을 갖기 보다는 반감과 증오를 품는, 어색해진 내 자신을 애써 외면해오고 있었다. 추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못난 성정조차 내 탓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모리 교수는 미치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훈계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잘 했다고 느낀 부분, 아쉬운 부분, 다시 시간이 주어진다면 되돌리고 싶은 부분까지.

 

죽음을 앞둔 노 교수는 그렇게 사랑하는 제자에게 온전히 사랑만을 남기고 떠났다. 그 사랑을, 제자는 온 몸으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은 기록으로 남겨져 많은 이들을 감동케 만들었다.

 

내가 기다린 초인은 누구였을까. 어떤 존재였을까. 나에게 무엇을 해주길 바란 것일까. 내 어리석음을 크게 꾸짖고, 내 편협함과 오만함과 게으름을 한 번에 바꿔줄 수 있는 그런 존재를 기다린 것일까, 아니면 다만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이길 바랐을까.

 

가장 위험한 것은 포기와 무관심이다. 때문에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쳐다보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점점 희망은 멀어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과 고통이 점점 내 자신을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만 갈 때, 더 이상 눈을 뜰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모든 것에 눈을 감자고, 모든 것에 귀를 닫자고, 이 더러운 세상에 침 한 번 뱉어주고, 그렇게 죽은 듯, 살자고.

 

하지만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책을 덮은 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 따위가 눈을 감는다고, 귀를 막는다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나만 더 아프고 상처받을 뿐이었다. 모리 교수의 따스한 말 한마디가, 미치의 눈빛 하나하나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는 것만 같았다. 12년 전 내 마음 속에 들어있던 그 무언가가 다시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 그리고 죽어간다는 것과 화해한다면 살아가는 것과도 화해할 수 있다는 모리 교수의 말은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 이후에도 오랫동안 나에게 남아, 힘이 될 듯하다.

 

날이면 날마다 철이 들지 않는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때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온 듯하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무어 있을까.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화한다면 과연 누가 나와 화합을 이룰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자신과의 불화를 이어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책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유명하다. 아마도 수많은 이들이 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언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읽었느냐에 따라 각자의 느낌이 다르리라. 때로는 잊었던 옛 은사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느꼈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인생의 멘토를 얻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가졌을지 모르겠다.

 

12년 전에 읽었던 나와, 지금의 내가 느낀 감정은 사뭇 사르다. 당시엔 막연히 옛 중고교 시절 은사님들이 떠올랐고, 당시 철없던 나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의 소중함과 더불어,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이제는 나와의 화해, 내 자신과의 화합을 생각한다. 그리고 변함없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그것이 바탕이 된 행동을 이어나가야 함을 느낀다. 진정 나다운 것은 누가 표현해주는 것이 아니라, 누가 판단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느껴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정말 소중한 사실 한 가지.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점. 그것이 아니면, 우리는 그야말로 맥없이 스러질 존재라는 것.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 번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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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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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록 인생이란 재미없고,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고 실망하면서 행복이 멀어짐을 절감한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강한 자를 우러르며 우습기 짝이 없는 영웅을 은근히 기다리면서 출퇴근 전철 안에서 죽은 사람 얼굴을 하고 있다. 인생의 절정기는 학교 축제 때뿐이었음을 절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자유를 스스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108p

 

인생이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에, 어떤 이들은 그럼 막 나가자는 겁니까?’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 자체가 이미 막장이 아닌가. 이렇게 형편없는 세상에서, 마찬가지로 형편없이 길들여져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이미 막 나간 것 아닌가.

 

처음,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은, 곧 그 내용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극도로 무기력한 현대인들의 삶에 정면으로 강렬한 돌직구를 던지는 저자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죽을 몸인데, 도대체 뭐가 그리 무서워 겁을 내고 위축되고 주저하느냐고 묻는다. 이미 오래 전부터 스스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저자이기에, 당당함이 묻어난다. 우씨, 열라 부러웠다.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자신이 살아가는데, 그 무슨 거리낌이 있는가.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무기로, 애당초 도리에 맞지 않고 모순투성이인 이 세상을 마음껏 사는 참맛을 충분히 만끽하라는 저자. 산송장이 아닌 산 자로 살아가라는 일침은 그야말로 매섭게 몰아치는 죽비에 다름 아니다.

 

그는 자유와 자립의 정신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증거라고 말한다. 또한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라 외친다. 저자는 단언한다. 살아 있으면서 절대적 안녕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살아 있되 삶을 스스로 내던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것이야말로 산송장의 삶이라고.

 

철저히 독고다이의 인생을 살아온 저자에게 부모의 속박, 국가의 통제, 학교의 폐쇄성, 회사의 무의미한 부품 생활은 자유를 억압하는 쓰레기 같은 요소들이다. 종교 또한 저자에겐 무가치한 것이다. 너무나도 연약하고 허망한 존재인 인간이, 고뇌하고 무릎 꿇고 울며불며 매달릴 때까지 뒷짐을 지고 있는 걸로만 봐도 신은 없노라 단호하게 말한다.

 

어줍지 않은 위로, 힐링이 판치는 지금, 도대체 우리가 누구에게 상처받았고 누구에게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채 다만, 잘 될 거라고, 너를 응원한다는 헛소리나 날리는 지금, 비록 꼬장꼬장한 노장의 성정이 드러나긴 하지만, 전혀 위선적이지 않은 그의 메시지는 내 썩어빠진 육체와 정신을 서늘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마루야마 상에게 송구하다. 이따위로 살아가고 있음이.

 

저자가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간결하다. 홀로 가라, 홀로 자신 만의 길을 가라는 것.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라는 것이다.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세상이 더럽다고 혹은 어쩔 수 없다고 외면하거나 여기에 작은 부속품 중 하나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다. ‘노예의 처지에 깊이 길들어진 가축 인간으로 살 것이 아니라, 허튼 내일의 안녕 따위를 기대하지 말고,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내일을 향해 내 발로 한걸음씩 내딛는 것이다. 온전히 나의 의지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 안에서만 빛나도록 생겨 먹었다는 말이 가슴을 때린다. 어느 새 우리는 모두 거대한 시스템의 하찮은 부속물이 되어 하루하루 의미를 잃어가는 삶을 살아간다. 연봉이 얼마든,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든, 빌어먹을 차의 배기량이 얼마나 되던, 집이 얼마나 넓든, 그 따위는 사실 한 개도 중요치 않다. 내가 죽었을 때, ‘, 그 인간은 몇 평 짜리 집에서 무슨 차를 몰며 연봉 얼마를 받으며, 얼마나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뒈졌다고 기억해 줄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모르지, 유산을 계산하기 위해 내 자식들은 기억을 해야 할지도. 계산할 것이나 남을까 싶다만.

 

정말, 의미 없는 노예와 같은 삶이 아닌가. 이 빌어먹을 엿 같은 세상에 온전히 정당방위로 같이 엿을 날리며, 나의 의지대로, 내가 원하는 정의와 상식을 위해 때론 멋들어지게 싸우고, 때론 눈물로 호소하고, 때론 방랑자처럼 이 곳 저 곳을 떠돌며 자유라는 놈과 고독이라는 놈과 만나며 살아가는 것. 언제 주어질지 모르는 안정과 안녕을 위해 오직 지금뿐인 현재를 저당 잡히지 않고, 오히려 철저히 현재를 즐길 수 있는 호연지기! 나에겐 바로 그러한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책에서 저자가 국가와 정치인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전율마저 일었다. 지금 우리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차단하는 국가, 개인의 안녕과 부귀를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이름으로 둔갑시키며 그렇게 연맹해가는 쓰레기 같은 정치인들. 그리고 그런 쓰레기를 대통령, 국회의원 등으로 만드는 무뇌아 같은 국민들. 저자는 강조한다. 쓰레기 같은 정치인, 대통령을 선출한 바로 그 국민이 쓰레기라고. 누굴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뇌의 부재를 탓하라고.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똑바로 지라고. 병신 같은 정치인과 대통령을 뽑아놓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엄연한 범죄라고. 으아, 난 이미 범죄를 방조하거나 협력한 크리미널이 된 것인가.

 

돈에 철저히 구속당한 우리는, 마치 우리의 의지인양 믿으며, 돈의 논리대로 살아간다. 아니, 스스로를 착취해가며 변태적 자본주의 시스템의 지속에 복무하고 있다. ‘악랄하고 뻔뻔한 사회와 국가, 종교, 학교에 육체와 영혼을 저당 잡힌 채, 그렇게 병신 같이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병신 같은 삶을 그대로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한다. 뻔뻔하게도!

 

당당한 저자의 이야기에 한껏 주눅이 들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때로는 강한 공감과 때로는, ‘이건 좀 심하신 듯놀라며, 마루야마 겐지라는 노 작가의 강력한 인생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포기가 취미이고 체념이 특기인 시대에 살고 있다. 어지간하면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젠장, 그게 말이 되나! 얼마나 뒤틀린 시대에 살고 있기에, 전부 우리 힘으로 될 수 없는 것인가. 그럼 도대체 왜 이 따위 나라에 사는가, 다들 이민 가시든가 하셔야지. 그리고 이젠 담배마저 사치품으로 만들려는 정부에게 도대체 왜 꼬박꼬박 세금을 갖다 바치시는가. 억울하지도 않는가.

 

책을 덮으며, 잠시 잊고 지냈던 강렬함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몰상식, 불의, 위선 앞에 당당했던 내가 떠오른다. 아닌 건 죽어도 아니라고 외쳤던 내가 떠오른다. 엿 같으면 엿 같은 것이고,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만큼 불의한 것이면, “, 이 씨발놈아!”가 자연스럽게 분출되던 내가 떠오른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 난 도대체 무엇인가. 살포시 대가리를 땅에 박을 수밖에, 무지하게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내가 당장 마루야마 상의 말씀을 받들어 딱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적어도 내 머릿속은, 내 의지는, 내 하나밖에 없는 마음은 다시 다잡아야 할 것이다. 야성을 잃으면 애완이 되고, 곧 하찮은 죽음을 맞이한다. 죽는 게 겁나는 것이 아니라, 쪽팔린 게 더 무서웠던, 그 시절의 마음을 되찾아야겠다. 욕 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욕해야 할 때 못하는 비겁함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그게 사람이다. 그게 원래의 나다. !

 

나에게 매서운 회초리를 날려주신 마루야마 상에게 다시 한 번 감사. 부디 만수무강하시고, 앞으로도 더 멋진 작품들을 보여주시길.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소로우 형님의 말씀대로 그래, 누가 이길 지는 두고 볼 일이다이 마음으로 살자!

 

붙어봐!

 

남의 손에 급소를 내준 인생은 인생이라 할 수 없다.” - 1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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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바도라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8
미켈라 무르지아 지음, 오희 옮김 / 들녘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눈꺼풀은 여전히 감겨 있고, 마리아가 잡고 있던 손도 움직임이 없었다. 마리아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죽음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 224p

 

워낙 커다란 사건들을 자주 겪으며 살아오다보니 조금은 덤덤해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독 올해 너무도 무참한, 황망한 죽음들이 많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이 그처럼 허망하게 가라앉았고, 그 상처는 여전히 현재를 맴돈다. 또 분단이 낳은 기형적인 병영문화가, 한창 자유를 누리고 꿈을 찾아 떠나야 할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뿐 일까. 안타까운 죽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온다. 도대체 왜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잘 산다고 거들먹거리고 있는데, 이렇게 억울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죽음들은 멈추질 않는 것일까.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잘 살고 잘 죽고 있는 것일까.

 

후배 하나가 명절을 맞아 외가를 찾았다가, 그만 얼굴을 붉히며 흥분하게 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다름 아닌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었다. 후배에게 일장 훈계를 하신 외가의 어르신은 이런 논리로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가족들에게 일인당 40억 원이 넘는 보상금이 지급된다고 들었다. 그게 좀 큰돈이냐. 이제 할 만큼 했으니 보상금을 받는 선에서 끝내야 한다. 사실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진실을 밝히라는 것이 이 사회에서 가능한 일인가. 누구하나 관련되지 않은 집단이 없는데, 정치권이나 정부나 모두 연관이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을 끝까지 추적해 진실을 밝힌다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더 이상 세월호 문제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다른 모든 국정을 멈추게 하지 말고, 보상금을 받는 선에서 끝내야 한다.”

 

여기에 후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내가 이야기를 듣고 느낀 첫 번째 감정은 분노가 아닌 슬픔이다. 40억 원이라는 현실로 못다 푼 과거를 묻어버리자는 논리, 그리고 무엇보다 죽은 아이들의 목숨 값으로 그 정도면 많은 것 아니냐는 생각.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순식간의 장사치, 흥정꾼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참함. 나는 슬펐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생명은 모두 똑같다. 똑같이 대우받아야 하고,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똑같이 아끼고 보호받아야 한다.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의 생명이 더 소중하고, 가난한 이들의 생명이 하찮을 수 없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한 이들의 죽음과 배를 타고 가다 죽은 이들의 생명이 다르지 않다. 그게 맞다.

 

하지만 정말 어이없게도 돈에 환장하며 살아온 우리들에게 이미 죽음은 계산되어질 수 있는 금액에 다름 아니다. 보험회사들은 버젓이 사망보험을 광고하며, 미리 보험에 가입해, 죽은 뒤 가족들에게 큰돈을 남기라고 협박한다. 상조회사들은 미리 돈을 내어, 나중에 폼 나게 죽으라고 강요한다. 돈이 없다면 죽지도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 모두가 천대받고, 돈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이게 제대로 된 세상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렇게 삶과 죽음 모두를 천대시하며 살아갈 것이라면, 도대체 경제발전은 왜 하는 것일까, 왜 우리 국민들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경제 살리기, 국가의 번영과 발전이라는 허명을 위해 개처럼 일해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누구에게나 삶이 존중받아야 하듯, 죽음 역시 소중히 다뤄져야 한다. 개죽음이라는 말이 더 이상 함부로 나오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그렇게 마지막을 맞아야 한다. 이것마저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국가, 정부는 없어져야 마땅하다. 망해야 한다. 철저히.

 

책은 안락사, 존엄사에 대한 이야기다. 이탈리아 사르데냐 방언으로 끝을 내는 여인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아카바도라. 그녀는 고통 속에 삶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병자가 편안히 마지막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선사하는 것은 죽음, 때문에 그녀는 필요악과 같은 존재다. 그녀의 역할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에 떠돈다.

 

넉넉지 못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마리아, 이미 딸이 셋이나 있는 안나 리스트루에게 마리아는 달갑지 않은 혹과 같은 존재다. 이런 마리아를 눈 여겨 보던 재봉사 보나리아는 안나의 동의하에 마리아를 양녀로 받아들인다. 사르데냐 풍습 중 하나인 영혼의 딸을 통해서.

 

마리아는 성스럽기도 하고 무언가 비밀스러운 집안의 분위기에 차츰 적응해가며,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보나리아의 비정기적인, 갑작스런 외출을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외출을 다녀온 후에는 반드시 마을의 죽음이 닥쳤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소꿉친구의 형이 사고를 당해 장애를 얻게 되고, 갑작스런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가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된 마리아, 그리고 보나리아. 마리아가 보나리아의 정체를 어렴 풋 알아가며,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갈등이 만들어지고, 불안하게 이어지던 집안의 평화 역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안락사(euthanasia)라는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eu(well)thanatos(death)라고 한다. 굳이 해석을 하면 좋은 죽음이나 아름다운 죽음정도가 될 것이다. 국내에서 안락사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2009년 이른 바 김 할머니 사건판결이었다. 식물인간 상태에 있던 할머니의 산소호흡기 제거를 허용한 당시의 판결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는데, 김 할머니는 산소호흡기를 제거한 뒤에도 201일을 더 살았다.

 

감히 누가 인간의 죽음에 관여할 수 있을까. 죽음은 늘 그래왔듯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저 너머의 이야기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동안 안락사, 존엄사 등을 인정하지 않았고,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다루는 것은 오직 신의 영역이라 믿었다. 하지만 고통을 겪고 있는 당사자 혹은 그 가족들에겐 전혀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생명은 소중하지만, 때로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연장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안락사, 존엄사 보다는 의문사, 돌연사, 과로사 그리고 무참한 죽음이 더 가까운 우리들에게, 이 책은 전혀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죽음에 관여할 수 있을까, 또한 감당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은 안락사 문제를, 저자는 신화와 현실을 넘나들며 묵직하고도 날카롭게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도저히 선악으로 구분이 불가능한 안락사 문제에 대해 스스로 고민할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

 

유일하게 자살할 수 있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 한다. 그 누가 비난하고 폄하한다 해도 자살은 결국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인간만의 권리이자 본능이다. 물론 자살은 슬픈 결정이다. 아픔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자살을 방조하거나 부추기고 있는 이 사회의 무책임한 무자비한 시스템에 있지 않을까.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이 사회의 썩어빠진 영혼이 정화되지 않는다면, 자살률 세계 1~2위라는 오명에서, 우리는 좀처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세월호 사건도 그렇게 봐야 한다. 생명이다. 그 무엇보다 생명에 관한 문제이다. 그 생명을 제대로 보호하고 아껴주지 못한 우리들의 책임이다. 정부의 문제이다. 이 땅의 정치인들의 이야기다. 그것 외에 다른 것들은 전부 다 개소리다.

 

많지 않은 분량에 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죽음이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뤄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월호를 떠올린다. 우리는 끝나지 않았다. 끝난 것은 단 하나도 없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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