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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 용서해야 하네. 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일이 이러저러하게 되지 않았다고 탓할 수만은 없지.”
- 213p
12년 전 읽었던 책을 굳이 다시 꺼내든 것은, 무언가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그 무엇이 정확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뒤에야 알았다. 용서였다.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한 확인이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행동을 하며 살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었던 지금의 내가, 본디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왜 후회라는 그리 훌륭하지 못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고자 했다.
온통 핑계만 만들어대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약한 것이 아니라, 타인이, 이 세상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어느새 중얼거리고 있었다. 또한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존재가 문득 내 앞에 나타나, 어리석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 가르침을 주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분노조차 타성에 젖고, 누군가에 대해 애정을 갖기 보다는 반감과 증오를 품는, 어색해진 내 자신을 애써 외면해오고 있었다. 추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못난 성정조차 내 탓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모리 교수는 미치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훈계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잘 했다고 느낀 부분, 아쉬운 부분, 다시 시간이 주어진다면 되돌리고 싶은 부분까지.
죽음을 앞둔 노 교수는 그렇게 사랑하는 제자에게 온전히 ‘사랑’만을 남기고 떠났다. 그 사랑을, 제자는 온 몸으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은 기록으로 남겨져 많은 이들을 감동케 만들었다.
내가 기다린 초인은 누구였을까. 어떤 존재였을까. 나에게 무엇을 해주길 바란 것일까. 내 어리석음을 크게 꾸짖고, 내 편협함과 오만함과 게으름을 한 번에 바꿔줄 수 있는 그런 존재를 기다린 것일까, 아니면 다만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이길 바랐을까.
가장 위험한 것은 포기와 무관심이다. 때문에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쳐다보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점점 희망은 멀어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과 고통이 점점 내 자신을 작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져만 갈 때, 더 이상 눈을 뜰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모든 것에 눈을 감자고, 모든 것에 귀를 닫자고, 이 더러운 세상에 침 한 번 뱉어주고, 그렇게 죽은 듯, 살자고.
하지만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책을 덮은 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 따위가 눈을 감는다고, 귀를 막는다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나만 더 아프고 상처받을 뿐이었다. 모리 교수의 따스한 말 한마디가, 미치의 눈빛 하나하나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는 것만 같았다. 12년 전 내 마음 속에 들어있던 그 무언가가 다시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 그리고 죽어간다는 것과 화해한다면 살아가는 것과도 화해할 수 있다는 모리 교수의 말은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 이후에도 오랫동안 나에게 남아, 힘이 될 듯하다.
날이면 날마다 철이 들지 않는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때론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온 듯하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무어 있을까.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화한다면 과연 누가 나와 화합을 이룰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자신과의 불화를 이어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책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유명하다. 아마도 수많은 이들이 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언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읽었느냐에 따라 각자의 느낌이 다르리라. 때로는 잊었던 옛 은사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느꼈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인생의 멘토를 얻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가졌을지 모르겠다.
12년 전에 읽었던 나와, 지금의 내가 느낀 감정은 사뭇 사르다. 당시엔 막연히 옛 중고교 시절 은사님들이 떠올랐고, 당시 철없던 나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의 소중함과 더불어,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이제는 나와의 화해, 내 자신과의 화합을 생각한다. 그리고 변함없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그것이 바탕이 된 행동을 이어나가야 함을 느낀다. 진정 나다운 것은 누가 표현해주는 것이 아니라, 누가 판단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느껴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정말 소중한 사실 한 가지.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점. 그것이 아니면, 우리는 그야말로 맥없이 스러질 존재라는 것.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 번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