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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바도라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8
미켈라 무르지아 지음, 오희 옮김 / 들녘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눈꺼풀은 여전히 감겨 있고, 마리아가 잡고 있던 손도 움직임이 없었다. 마리아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죽음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 224p
워낙 커다란 사건들을 자주 겪으며 살아오다보니 조금은 덤덤해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독 올해 너무도 무참한, 황망한 죽음들이 많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이 그처럼 허망하게 가라앉았고, 그 상처는 여전히 ‘현재’를 맴돈다. 또 분단이 낳은 기형적인 병영문화가, 한창 자유를 누리고 꿈을 찾아 떠나야 할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뿐 일까. 안타까운 죽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온다. 도대체 왜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잘 산다고 거들먹거리고 있는데, 이렇게 억울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죽음들은 멈추질 않는 것일까.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잘 살고 잘 죽고 있는 것일까.
후배 하나가 명절을 맞아 외가를 찾았다가, 그만 얼굴을 붉히며 흥분하게 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다름 아닌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었다. 후배에게 일장 훈계를 하신 외가의 어르신은 이런 논리로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가족들에게 일인당 40억 원이 넘는 보상금이 지급된다고 들었다. 그게 좀 큰돈이냐. 이제 할 만큼 했으니 보상금을 받는 선에서 끝내야 한다. 사실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진실을 밝히라는 것이 이 사회에서 가능한 일인가. 누구하나 관련되지 않은 집단이 없는데, 정치권이나 정부나 모두 연관이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을 끝까지 추적해 진실을 밝힌다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더 이상 세월호 문제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다른 모든 국정을 멈추게 하지 말고, 보상금을 받는 선에서 끝내야 한다.”
여기에 후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내가 이야기를 듣고 느낀 첫 번째 감정은 분노가 아닌 슬픔이다. 40억 원이라는 ‘현실’로 못다 푼 과거를 묻어버리자는 논리, 그리고 무엇보다 죽은 아이들의 목숨 값으로 그 정도면 많은 것 아니냐는 생각.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순식간의 장사치, 흥정꾼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참함. 나는 슬펐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생명은 모두 똑같다. 똑같이 대우받아야 하고,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똑같이 아끼고 보호받아야 한다.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의 생명이 더 소중하고, 가난한 이들의 생명이 하찮을 수 없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한 이들의 죽음과 배를 타고 가다 죽은 이들의 생명이 다르지 않다. 그게 맞다.
하지만 정말 어이없게도 돈에 환장하며 살아온 우리들에게 이미 죽음은 계산되어질 수 있는 금액에 다름 아니다. 보험회사들은 버젓이 사망보험을 광고하며, 미리 보험에 가입해, 죽은 뒤 가족들에게 큰돈을 남기라고 협박한다. 상조회사들은 미리 돈을 내어, 나중에 폼 나게 죽으라고 강요한다. 돈이 없다면 죽지도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 모두가 천대받고, 돈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이게 제대로 된 세상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렇게 삶과 죽음 모두를 천대시하며 살아갈 것이라면, 도대체 경제발전은 왜 하는 것일까, 왜 우리 국민들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경제 살리기, 국가의 번영과 발전이라는 허명을 위해 개처럼 일해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누구에게나 삶이 존중받아야 하듯, 죽음 역시 소중히 다뤄져야 한다. 개죽음이라는 말이 더 이상 함부로 나오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그렇게 마지막을 맞아야 한다. 이것마저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국가, 정부는 없어져야 마땅하다. 망해야 한다. 철저히.
책은 안락사, 존엄사에 대한 이야기다. 이탈리아 사르데냐 방언으로 ‘끝을 내는 여인’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아카바도라. 그녀는 고통 속에 삶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병자가 편안히 마지막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선사하는 것은 죽음, 때문에 그녀는 필요악과 같은 존재다. 그녀의 역할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에 떠돈다.
넉넉지 못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마리아, 이미 딸이 셋이나 있는 안나 리스트루에게 마리아는 달갑지 않은 혹과 같은 존재다. 이런 마리아를 눈 여겨 보던 재봉사 보나리아는 안나의 동의하에 마리아를 양녀로 받아들인다. 사르데냐 풍습 중 하나인 ‘영혼의 딸’을 통해서.
마리아는 성스럽기도 하고 무언가 비밀스러운 집안의 분위기에 차츰 적응해가며,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보나리아의 비정기적인, 갑작스런 외출을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외출을 다녀온 후에는 반드시 마을의 죽음이 닥쳤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소꿉친구의 형이 사고를 당해 장애를 얻게 되고, 갑작스런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가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된 마리아, 그리고 보나리아. 마리아가 보나리아의 정체를 어렴 풋 알아가며,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갈등이 만들어지고, 불안하게 이어지던 집안의 평화 역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안락사(euthanasia)라는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eu(well)과 thanatos(death)라고 한다. 굳이 해석을 하면 ‘좋은 죽음’ 이나 ‘아름다운 죽음’ 정도가 될 것이다. 국내에서 안락사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2009년 이른 바 ‘김 할머니 사건’ 판결이었다. 식물인간 상태에 있던 할머니의 산소호흡기 제거를 허용한 당시의 판결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는데, 김 할머니는 산소호흡기를 제거한 뒤에도 201일을 더 살았다.
감히 누가 인간의 죽음에 관여할 수 있을까. 죽음은 늘 그래왔듯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저 너머의 이야기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동안 안락사, 존엄사 등을 인정하지 않았고,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다루는 것은 오직 신의 영역이라 믿었다. 하지만 고통을 겪고 있는 당사자 혹은 그 가족들에겐 전혀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생명은 소중하지만, 때로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연장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안락사, 존엄사 보다는 의문사, 돌연사, 과로사 그리고 무참한 죽음이 더 가까운 우리들에게, 이 책은 전혀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죽음에 관여할 수 있을까, 또한 감당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은 안락사 문제를, 저자는 신화와 현실을 넘나들며 묵직하고도 날카롭게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도저히 선악으로 구분이 불가능한 안락사 문제에 대해 스스로 고민할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
유일하게 자살할 수 있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 한다. 그 누가 비난하고 폄하한다 해도 자살은 결국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인간만의 권리이자 본능이다. 물론 자살은 슬픈 결정이다. 아픔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자살을 방조하거나 부추기고 있는 이 사회의 무책임한 무자비한 시스템에 있지 않을까.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이 사회의 썩어빠진 영혼이 정화되지 않는다면, 자살률 세계 1~2위라는 오명에서, 우리는 좀처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세월호 사건도 그렇게 봐야 한다. 생명이다. 그 무엇보다 생명에 관한 문제이다. 그 생명을 제대로 보호하고 아껴주지 못한 우리들의 책임이다. 정부의 문제이다. 이 땅의 정치인들의 이야기다. 그것 외에 다른 것들은 전부 다 개소리다.
많지 않은 분량에 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죽음이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뤄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월호를 떠올린다. 우리는 끝나지 않았다. 끝난 것은 단 하나도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