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가공선 창비세계문학 8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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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주기가 다가온다. 새삼 맨 정신을 가지고 앞을 바라보기 힘겨워진다. 뉘에게 꼴뚜기질을 해야 하는지도, 뉘에게 비나리 해야 하는지도 도통 알 수 없다. 도대체 누굴 붙잡고 달구쳐야 상명(喪明)을 겪은 아비와 어미를 달랠 수 있을까.

 

혼돈, 제강의 세상에서 이미 염량을 잃어버린 지, 잊어버린 지 오래이다. 하긴 나에게 애초 그런 염량 따위가 가당키나 했었나.

 

그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남은 이들의 부은 눈가와 서럽게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지금껏 그 얼마나 보듬어 주었기에, 잊어버리자, 흘려보내자는 무참한 이야기가 나올까. “세월호를 시간의 흐름 속에 침몰시켜버리면, 결국 우리는 우리 사회의 야만성에 굴복하고 말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은 차라리 애원에 가깝다. 여전히 차가운 물속에 가라앉아 있는 슬픔을 그 누가 억지로 잊으라 할 수 있을까.

 

그동안 권력을 틀어쥔 자들은 자식을, 가족을 잃어버린 이들의 슬픔과 한을 달래고 어루만져, 진실과 해원의 너머로 모시는 월천꾼이 되기보다는 무참한 소리장도, 망종의 모습만 보여주었다.

 

또 이러한 아둔패기, 옹춘마니들에게 호된 꾸짖음을 주어야 할 지식인, 언론인 중 일부는 단지 책상물림이 되어 오히려 권력의 따리꾼이 되었다. 유가족들에게 몽니마저 부렸다. 무참한 세월이었다.

 

거기에 지도자의 메꿎은 행동은 유가족들의, 수많은 우리들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부친처럼 오래 장기집권을 했던 외국 지도자의 장례식에는 참석하면서도, 제주의 피맺힌 4월은 외면했고, 이제 아이들이 떠난 지 한 해가 되어가는 지금, 그 어떤 중대한업무를 이유로 나라를 떠난다고 통보한다. 그의 매정한 모습이 이 땅의 수많은 부모, 형제들에게는 범강장달이보다 더한 무서움과 분노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이 잔인하다 못해 무참하고 무심한 세월 속에서 그 세월을 감당치 못해 어리둥절하다가, 어리석게도 코바야시 타끼지의 오랜 소설을 집어 들었다. 아둔한 놈이다. 하지만 나름의 이유도 분명 있었다.

 

1920년대 제국주의의 피바람 속에, 자본이라는 강력한 괴물 앞에, 짐승보다 못한 노동과 착취에 내몰려 죽어나가야 했던 일본 노동자들의 삶, 그리고 그들의 정당한, 비장한 분노가, 비단 과거의 일이, 일본만이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포스러운 자본의 논리 앞에 다름 아닌 세월호가 있기 때문이었다.

 

죽은 자식이, 도대체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알려달라는 부모 앞에, 그리고 아이들의 소박한 밥그릇을 빼앗지 말라는 부모 앞에, 서슬 퍼런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이 끔찍한 세상에서, <게 가공선>은 지극히 당연하게도 불순함이 가득한 작품으로 비칠지 모른다. 물론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게 가공선>에 사회주의의, 공산주의의 냄새가 풍기는 것도 당연할 테다.

 

하지만 1920년대와 2015년을 아우르는 괴물과도 같은 자본의 논리 앞에 우리는 더 이상 주눅들 수는 없다. 250명의 아이들을 포함해 304명의 생명이 가라앉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똑똑하게 되물어야 한다. 과연 무엇이었는지, 도대체 괴물스런 자본 앞에 무기력했던 국가가, 권력이 반드시 해야만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세월호 침몰 후 한 달 뒤, 정부는 사고의 원인을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증축, 화물의 과적, 컨테이너 고박 상태의 불량 등. 이것들은 껍데기만 다 다를 뿐 오직 하나의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돈이다. 그 돈 때문에, 아이들은 생명을 잃어야 했다.

 

일본에서 수입된 세월호는, 일본에서라면 벌써 오래 전 폐기되었어야 했다. 이런 노후한 배가 한국에서 버젓이 운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이명박 정부가 연안 여객선의 연령을 30년까지 연장하는 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돈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배는 그 후 증개축이 이루어진다. 화물과 승객을 더 많이 싣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CEO사진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까지 따로 만들었다. 이 역시 돈이었다. 정부는 이런 배에 영업 승인을 내주었다.

 

컨테이너에 화물들이 단단히 묶여 있는지 점검했어야 했다. 하지만 과적과 잘못된 고박에도 불구하고 출항 허가는 떨어졌다. 현장 점검 없이 서류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컨테이너 현장 안전 점검의 축소는 현 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창조 경제를 이루기 위함이었을까.

 

물론 이러한 것들은 정부가 설명한 사고의 원인이다. 사고 이후 구조 과정의 참혹함, 정부의 무능력, 무기력, 무책임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렇지만 전부 차치하고, 정부가 말한 사고의 원인만 놓고 보아도, 세월호는 오랜 시간 오직 이라는 논리로 누적된 비상식과 비정(非情)으로 인해 가라앉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본과 그 자본을 제어하지 못한 정부가 만들어낸 사고. 감히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는 세상은, 아마도 영영 오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 자본은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되어 국경을 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게 가공선을 만들어냈고, 수많은 세월호를 만들어냈다. 대부분 국가 권력은 무력했고, 심지어 협조했다. 이미 세상은 거대한 게 가공선, 거대한 세월호가 아닌가.

 

<게 가공선>1926년 북양어업을 떠난 게 가공선 하꾸아이마루에서 노동자가 배의 윈치에 매달린 채 사망한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 졌다. 게를 잡아 배 안에서 통조림으로 바로 만들어내는 가공선. 항해법도, 공장법도 적용되지 않는 무법지대. 자본에겐 천국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노동자들에겐 지옥에 다름 아니었을 배.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라는 소설의 첫 문장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예나 다름없는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 막일꾼, 가난한 농민과 어부, 학생 등 국가적 산업이라는 허울로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노동에 내몰린 이들은, 결국 죽지 않기 위해단결하게 되고, 파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구축함, 즉 군대라는 이름의 국가는 이들을 구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또 다른 탄압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노동자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그들은 일어선다.

 

먼지가 쌓여있던, 철지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다시금 일본에서 커다란 반향을 얻고, 많은 젊은이들이 <게 가공선>을 탐독했다. 어쩜 그들이 처한 바로 지금의 상황이 또 다른 게 가공선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짐작해본다.

 

그렇담 우리 역시 다르지 않다. 거대한 세월호에 갇혀, 거대한 게 가공선에 갇혀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떠나간 아이들에게 떳떳한 부모가 되어, 어른이 되어 맞이할 용기도 능력도 여전히 크게 부족하다.

 

일 년이란 시간이 다가온다. 두려운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이 땅에 만들어진 지옥, 이 아비규환의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어떻게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야 할지 멈춤 없이 되묻고, 또 다시 행동해야 함은 변하지 않았다. 누가 지옥을 만들어냈는지, 누가 이 지옥을 끝장낼 수 있는지, 그 답은 오직 우리 자신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건방진 위로조차 닿지 않음을 잘 알지만, 아이들을 먼저 떠나 보낸 어미와 아비들에게, 가족들을 여전히 기다리는 남겨진 이들에게, 부끄러운 목소리로, 치 떨리는 목소리로 죄송하다 전한다. 그리고 위로 드린다.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응원의 몸짓도 함께. 그리고 다시.

 

떠난 이들이여, 부디 영면하시라. 잊지 않음을.

 

이 글은 이충진의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유승진의 <포천>에 많은 빚을 지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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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 - 1659년 5월 4일의 비밀
오세영 지음 / 시아출판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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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다 보니, 2014년 독서를 꽤 무거운 주제로 시작했던 것 같다. 북벌이라니, 병자년의 치욕을 되갚기 위한 조선의 출병이라니, 소설이라 해도 그리 가벼운 주제는 분명 아니다.

 

한반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것. 바로 지정학적이란 수식어다. 참 애매하긴 하다. 하필 우리 주변에 세계 4대 강국이 모두 둘러싸여 있다. 물론 미국이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어쩜 나머지 세 국가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맞다.

 

때문에 외교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아울러 정확한 현실 인식도. 언제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질 수 있으니, 매사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혹자들은 그것이 우리의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무지한 나는 솔직히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기엔 내 양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조상들이 지정학적위치라는 약점 때문에,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는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살벌해졌다고 할 수도 있다. 미국의 부활로 인해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있지만, 중국은 덩 샤오핑의 도광양회를 넘어선 지 오래다. 국내 학자나 언론인 중 일부는 러시아가 미국에 의해 큰 곤경에 빠진 것을 본 중국이 신 도광양회로 전략을 바꾸었다고 말하지만, 난 여전히 중국이 주동작위돌돌핍인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중국은 스스로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을 만큼 거대해 졌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나락으로 떨어졌던 미국도 다시 부활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이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미국은 세계 경제와 군사 부문을 장악하고 있고, 이러한 추세는 단 시일 내에 바뀔 것 같지 않다.

 

그럼 일본은? 러시아는? 각자 처한 상황이 만만치 않긴 하지만, 여전히 대국이고 세계 최고의 경제 강국이다. 미국에 대해 이를 갈고 있을 푸틴은 결코 더 이상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겠다는 심산이고, 아베 역시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더라도 다시금 일본을 세계가 두려워하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이 두 지도자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미국뿐이지만, 이 역시 만만치는 않다. 동북아는 지금도 요동치고 있다.

 

우린 여기에서 항상 실리와 명분이라는 두 과제를 적절히 섞어가며 외교력을 펼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경제적으로 이미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중국을 무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오랜 동맹인 미국과 소원해질 수도 없는 상황이다. 결국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영리하게 실리를 취하고, 또한 명분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아니, 현 정부의 생각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늘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 우리가 그렇게 계산을 하는 동안, 과연 다른 나라들은 놀고 있을까? 미국과 중국은 우리의 속셈을 전혀 모르고 있을까.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하는 대로 지켜보고만 있는 것일까.

 

절대 아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 두 나라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선택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실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실리외교, 균형외교. 이런 것들은 기실 허상일 뿐이라는 소리다. 게다가 우린 북한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상수(이자 변수)를 안고 있다. 답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정작 우리의 외교력이라는 것을 보자면, 더 암담하다. 아직까지 고려의 서희를 우리 외교의 상징으로 말할 만큼, 빈약하고 한심하다. 서희 이후의 외교다운 외교는 없었던 것일까. 명분에 얽매인 사대주의가 판치던 역사는 이후 조선의 멸망과 대한제국의 몰락, 일본의 식민지와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외교? 그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외교라는 건 단지 미국과의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 것이 바뀐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미국 외의 외교를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외교부는 자신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임을 자부하며, 오만방자하다. 물론 강대국들에겐 한없이 약하지만 말이다. 최고의 엘리트라면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선의 외교정책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텐데, 그런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암튼 그렇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외교라는 게 말이다.

 

중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미국의 사드(THAAD) 사이에서 우리 외교부의 수장은 행복한 상황이라 말했다. 무엇이 행복인지 심히 궁금하지만, 암튼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그 자체에 행복감을 느낀 게 아닐까 싶긴 하다. 씁쓸하다. 자신도 말하고 나서 우울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친미파라 해도 말이다.

 

오직 명나라를 주인의 나라로 모시던 조선은 명을 멸하고 일어난 청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다. 피난 간 조선의 왕은 남한산성에서 청의 군사들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명나라를 위해 엎드려 절을 하고 춤을 추었다. 신하들은 끝까지 싸우자는 편과 항복하자는 편이 서로 싸웠다.

 

<북벌>은 효종의 청나라 출병 계획과 이를 막으려는 서인, 친청파들의 치열한 암투와 음모를 다룬다.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결국 북벌은 이뤄지지 못했다. 만약 효종이 죽기 전 출병을 명했다면, 조선이 청을 공격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조선이 청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다시 명이 일어설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조선 백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이미 그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는 효종의 북벌 시도라는 역사를 통해 3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과연 명분과 현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 무엇인지.

 

생존과 명분. 명나라와 청나라, 이 두 나라가 과연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차이로 다가왔을까. 그들은 그저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만을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명분이라면 누굴 위한 명분이고, 국익은 누굴 위한 국익일까.

 

AIIB이던 THAAD이던,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조선시대의 그들처럼 백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나라의 주권을 가지고 있는 이 땅의 주인들이다. 그들을 고려하지 않은 국익이나 명분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게 핵심이다.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와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이 활약하는 <북벌>은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아울러 소설을 덮고 나서도, 강한 여운과 물음표를 남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이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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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생태계 1 - 정글 한국
윤성학 지음 / 푸른영토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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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과학자이자 인문과학 저널리스트인 울리히 슈나벨(Ulrich Schnabel)은 저서 휴식-행복의 중심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속도와 성과만을 강조하는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속병을 앓고 있다고. 휴식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라고.

 

취업을 못해도, 그리고 취업을 한다 해도 늘 불안한, ‘요람에서 무덤까지결코 편안할 수 없는 우리 사회에서, 어쩜 휴식은 팔자 좋은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휴식이란, 저자의 지적처럼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나 자유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과 만나는 시간”, 이것이 저자가 정의하는 휴식의 본래 의미다. 그렇담 우리는 평생 제대로 된 휴식을 얼마나 하며 살아갈까.

 

저자는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제대로 휴식할 시간 없이 과도하게 일하다 보면 창의성, 효율성 등은 점점 우리 곁을 떠나게 된다고. 피곤에 절어 미쳐버리겠는데, 창의성이 강림하실 리 없다. 때문에 정부가 말하는 창조경제역시 지금과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단순 구호로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 이미 그러고 있나? 다가오는 미래는 상상력의 시대라는데, 우리는 상상력 멸종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살기 위해 미치도록 바쁜 대한민국은 때문에 상상력이 절대 빈곤하다.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에 대한 상상력도 빈곤하고, 아이들의 밥 한 끼를 보는 눈빛도 무참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엔 저자가 모르는 단 하나의 예외, 열외가 존재한다.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이다. 북한에 대한 무궁무진한, 아니 어마무시한(!) 상상력은 그야말로 육갑자 이상의 내공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평범한 탈북자들이 탄성과 탄식을 동시에 내지르겠는가!

 

종편을 보면 거의 24시간 북한과 관련된 다채로운 소설을 즐길 수 있다. 도대체 이해불가한 이들이 당최 이해불가한 이야기들을, 정말 소설처럼 늘어놓는다. 그리고 끝도 없다! 기가 막힌 네버엔딩 북한 스토리는, (전문가라는) 비전문가의 입을 통해 시작되고, (방송이라는) 차마 방송이라 부르기 민망스러운 도구를 통해 전파된다. 그리고 그것을 시청하는 선량한 시민들은 그 소설을 이내 현실로 인식한다.

 

예를 들어 자강도, 양강도 등 지방 출신의 탈북자가 평양의 사정을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 이야기하고, 심지어 권력층 내부의 은밀한(!) 속사정까지 소개한다. 한두 번 평양에 다녀왔으면 평양출신전문가가 된다. 핵심으로 남쪽으로 오신지 꽤 되었다! 이쯤 되면 매직이다. ‘상상력의 극한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방송들. 그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두둥! 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이런 북한에 대한 상상력은 적대감, 증오를 밑절미에 둔 그것이다. 북한을 비정상적인 집단으로 규정하고, 그 틀 위에서 증오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끝내 무찔러야 하는, 끝내 굴복시켜야 하는 대상인 북한에 대한 상상력은 때문에 서글프고 무참하다.

 

솔직히 말하자. 우리는 지금까지 북한에 대해 단편적인, 일방적인 상상력만을 허용해온 것 아닌가. 남북교류협력법과 국가보안법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북한에 대한 증오의 상상력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감히 상상치 못해온 것이 아닌가. 이런 상상력의 빈곤 또한 울리히 슈나벨이 말한 휴식의 부족 때문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남북관계에서만큼은 오히려 진정한 휴식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내면과의 대화 말이다.

 

이제 책을 말하자. 윤성학의 <돈의 생태계>는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상상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른 바 야매가 아닌 출처(!)가 분명한 진정한 의미의 상상력이 무엇인지 느끼게 된다. 오호라, 어지러운 강호에 비로소 절대고수가 등장한 것인가!

 

모두 세 권으로 이뤄진 소설은 그 만만치 않은 양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협소설을 읽는 듯 착각에 빠질 정도로 쉽게 읽힌다. 한 마디로 재미지다! 남한에서 주식시장을 어지럽히며(!) 능수능란하게 작전을 펼쳐온 애널리스트 김종근이 우여곡절 끝에 북한에 들어가게 되고, 무려 장성택의 경제정책 자문 역할을 맡게 된다. 그는 북한의 인민들을 잘 살게 하고픈 장성택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고, ‘돈과 인심으로 체제를 바꾸겠다는 야망을 품게 된다. , 스케일부터 장난 아니다.

 

소설 전체를 통해 저자의 내공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국내 주식시장 이면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북한 정치와 사회 변화 모습 또한 극히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사회주의 체제전환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저자이기에 가능한 놀라움이다. 아울러 기성 소설가 못지않은 필력은 북한 관련 책들은 재미없다는 통념을 그대로 무너뜨린다. 통쾌한 액션과 가슴 아픈 러브 스토리 그리고 김종근과 김정은 간의 치밀한 두뇌 플레이 등 소설이 갖추어야 할 재미를 100% 이상 챙기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북한 관련 소설은 지금껏 목격하지 못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책을 통해 느낀 가장 큰 감동은 다름 아닌 주인공 김종근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저자의 북한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이다. , 말조심해야지. 북한 인민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이다! 그는 증오의 상상력 대신, 공존과 평화, 화해와 통일을 꿈꾸며 상상력을 발휘했다. 때문에 그의 글에는 서슬 퍼런 칼날보다는 사람들 간의 끈끈한 정과 사랑이 더 돋보인다.

 

혹자는 김정은 위원장을 부정적으로 표현했다거나, 반대로 장성택을 너무 미화했다는 점 등을 들어 작품을 비판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제발 안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상력을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 우리까지 할 필요는 없다. 소설은 소설이고, 현실은 현실 아닌가. 현실과 소설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얼마나 피곤한가.

 

누군가 줄기차게 외치는 잃어버린 10을 제외하고 오랫동안 남북은 상대에 대한 증오의 상상력만을 허용해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존을 이야기하고, 평화와 화해, 통일을 말한다는 것은, 정치적 선전 외에 그 어떠한 진실성도 찾아보기 힘들다. 상대가 나를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불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대화와 타협의 장으로 나오기는 쉽지 않다. 남북 모두 마찬가지다.

 

때문에 당장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통일 대박을 공허하게 외치기보다는, 자유롭게 북한 상상하기 연습을 먼저 할 필요가 있겠다. 이는 북한으로 인해 먹고 사는 보수 언론과 전문가들이 먼저 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상상력으로 그대들의 영역을 확장하라!’ 정도? 물론 문화예술인들도 마찬가지다. 소재의 빈곤을 당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제 증오와 불신보다는 공존과 이해를 위한 상상하기를 함께 하자고 살짝 권장한다. 누구를 미워하는 것만큼 피로한 일도 드물다. 줄기차게 미워하기란 그야말로 초인적인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하다. 이제 좀 잠깐 쉬자!

 

예전엔 남북관계가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지금은? 전부 얼어 죽었다. 그런 와중에 615공동선언 15주년과 광복 70주년을 남북이 함께 기념하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포기하진 말자. 우리 모두 뜨거운! 상상력으로 다시 한 번 함께 모여 제대로 기념 한 번 해보자.

 

올해는 얼어 죽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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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놈들 전성시대 - 우석훈의 대한민국 정치유산 답사기
우석훈 지음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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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시 자고로, 책은 제목이 반이다. 최근 읽은 책 중 이렇게 제목이 와 닿아, 가슴을 때린 것이 있었더냐.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찌질하게 울 수도 없게 만드는, 정말 절묘하고도 가슴 아픈 제목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우리는 그야말로 가짜들이 판치고 설치고 나대는 잡놈들의 세상에 살고 있다.

 

경제학과는 베를린 장벽 정도의 담을 쌓고 사는 녀석이라, 경제학자들의 심오한 이야기들이 솔직히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석훈은 정말 좋아라 하는 경제학자이자 저자이자 운동가이자, , 이제는 부원장이다.

 

저자는 스스로 C급 경제학자라 말한다. 이른 바 A급 경제학자라 자타가 공인하는 이들의 행태나 주장 등을 지금껏 살펴보았을 때, 과연 저자가 C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꾸준히, 근면하게 시민들을 위한 경제학 강의를 해왔다는 점에서 그는 아주 괜찮은 C급 학자이다. 활발한 저술활동과 기타 등등의 대외적 활동(!)으로 이미 우석훈이란 이름은, 이른 바 있는 이들이 아닌 넉넉지 못한 이들에게 더 많이 알려졌다. 일단 그것으로 그는 싸가지충만한 학자, 활동가가 되시겠다.

 

책은 정치 에세이다. 박근혜 시대의 정치 에세이. 당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포스트모더니즘 어쩌구 하던 시대를 단숨에 고대, 봉건시대로 돌려버린 이 살벌한 파격 앞에서, 정치라는 것을 근원적으로 어떻게 봐야 하는지부터 당최 감이 안 오는데, 저자는 발랄하게, 또한 비장하게 우리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재미가 없으면 의무감으로 책을 읽게 되고, 급기야는 저자가 야속해지는 경우가 있다. 나의 선택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석훈의 책을 읽으며, 그가 미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키득거리며, ‘이 냥반 아주 아주 재미지네!’를 연발하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적어도 싸가지는 있는 이들을 애타게 그리워하곤 했는데, 그런 면에서는 충분히 A급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미 우리는 분노가 기본 옵션인 시대에 살고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나로 하여금 분노 게이지를 높이게 만든다. 왜 아니겠나. 속절없이 아이들을 차가운 바다 속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 아버지들이 아직도 차가운 땅바닥에 뒹굴며 진실을 요구하고 있는 현실. 이를 무참히 짓밟는 공권력이 진돗개만도 못한 이들에게 통제를 받고 있는 코미디 속에서 어찌 분노가 평준화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분노의 힘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진시킨다. 한 마디로 화내는 당사자도 지치고 진이 빠지기 때문이다. 복수의 정치학을 펼치고 있는 현 정부에 우리도 분노의 힘으로 맞받아친다는 것은, 결국 도찐개찐 하자는 건데, 그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우리, 아무리 그래도 잡놈들보다야 우월한 존재 아닌가.

 

그래서 공감했다. ‘결대로, 흐름대로, 즐겁게라는 저자의 철학에, 거창하게 철학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뒤틀린 이 시대를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하는 우리들의 처절한 생존법이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초등학생들도 아는데, 치사량에 육박하는 스트레스 유발정권 앞에서, 우리도 살아야 하지 않겠나.

 

저자는 평생 상상하지도 않았던 일에 뺑이를 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책연구원 부원장이라는 아무 권력도 없는 자리에 앉아, 다음 전쟁의 승리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이긴다면, 그 담에는 전리품을 서로 먹겠다고 난리 난리칠 다음 이들에게, 모든 걸 맡기고 다시 애보기 투쟁에 나설 생각이란다. 난 저자가 미친 척 정치판에 뛰어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암튼 그의 지금 생각에도 존중을 표하고 싶다. 나에게 그는 앞으로도 재미진 책들을 많이 펴냈으면 하는 즐겨찾기저자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하면 보이지 않는다. 이제 다 끝났다고 하면 끝난 것이고, 아직 반전의 기회가 충분하다고 느끼면? 그럼 충분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리 복잡한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물론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고, 더럽게 복잡한 메커니즘에 따라 정의가 땅바닥에 쳐 박히기도 한다. 그 정도는 무지하게 무지한 나도 안다.

 

저자에게 공감한다. 잡놈들이 전성시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그것을 제 때에 막지 못한 잡놈이 아닌 사람들의 책임도 크다. 대한민국 구성원들을 힘겹게 만든 책임 역시 이 잡놈들과 함께 우리도 크게 느껴야 한다. 그렇기에 패배 앞에 주눅 들고 싶지만, 다시 총반격에 나서야 한다. 이겨봐야 한다. 그래야 많은 이들이 행복까진 아니더라도, 불행에서 빠져나올 조금의 가능성이 생기니까.

 

새정치민주연합, 여전히 답이 안 나오는 정당이다. 맞다. 지들끼리 치고 박고, 지들끼리 동아리 만들어 편싸움한다. 정권 탈환을 위한 공부도 더럽게 안 한다. 민생을 모르고 민심에 둔감한 것은 새누리당과 도찐개찐이다. 그러면서 국민들에게 달라는 것은 또 더럽게 많다. 선거에 패하면 국민들이 우매한 것이고, 이기면 지들이 잘난 것이다. 싸가지 없기도 도찐개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육아의 숭고한 임무와 즐거움을 포기한 채, 여의도로 출근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정말 단순하다. 지금은 힘들지만, 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조금이라도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무엇보다 위대한 명분이다. 이런 명분 앞에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는가. 아니, 내 새끼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데!

 

인사가 만사다. 사람 하나 잘못 뽑으면 세상이 어떻게 막장 드라마로 전락하는지, 지금 도대체 몇 년째 보고 있는가. 삶이 팍팍해지는 것이 오감이 아닌 육감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굳이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아직 3년이 남았다. 절망스럽지만, 반대로 그 만큼 준비할 시간도 있다는 소리다. 충분히 준비하고 공부하고 절치부심에 와신상담하여! 잡놈들의 전성시대를 마감해야 한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다. 상식과 기본과 정의가 짱 박아 둔 컨테이너 속에, 차가운 바다 속에서 더 이상 방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때문에 난 저자의 생각과 행동에 동의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나의 정치적 입장이나 이념적 지향점과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온전히 제1야당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저자의 마지막 제안처럼 정당에 가입하진 못하겠다. 미안하지만, 나는 존재감 미미한 다른 당의 당원이다. 그렇지만 응원은 하겠다.

 

얼마 전 딸아이의 두 번째 생일을 맞았다. 우리 나이로는 세 살이다. 케이크에 꽂힌 초를 꺼보겠다고 바둥거리는 녀석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안고 태어난 나는, 상식 중흥의 개인적 취향을 안고 살아가겠다고. 그게 더 재미있고 중요하니까.

 

이달 말에 보궐선거가 있다. 재미있게 후회 없이 다들 정의롭게 싸우고 승리하길 바란다. 잡놈들 말고. 파이팅이다!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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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안녕 - 도시의 힘없는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위로!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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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름답다. 요샛말로 하면 하다. 예전 일하던 잡지사에서 그녀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난 함께 하지 못했고, 후배 기자가 그녀를 만났다. 인터뷰의 내용은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동료 사진기자가 찍었던 그녀의 인터뷰 메인 컷만은 기억난다. 당시 역대 인터뷰 기사 메인 컷 중 가장 섹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긴, 그러니 내가 기억하겠지.

 

하지만 그녀가 만약 단지 아름답기만 했다면, 그걸로 상황 종료였다면 나는 그녀를 지금까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며, 2013년의, 그야말로 우울함의 극치를 달리던 그 때, 그녀의 책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에겐 다른 이들에겐 쉽사리 얻을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분명 똬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마냥 좋은 것인지, 아니면 이건 좀 뭔가 이상타 하며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주변엔 섹시한 여성들이 차고 넘친다. 당장 인터넷만 켜 봐도 확인 가능하다. 온갖 연예인, 일반인 등이 자신의 섹시함을 보여주지 못해 그야말로 안달이 나있다. 물론 자의적 행동인지, 그게 아닌지는 각자 사정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오직 육체적, 성적 매력을 기준으로 따진다면 그녀도 평범할지 모르겠다.

 

가난했다. 그리고 가난하다. 그녀의 삶을 어쩔 수 없이 규정하고 있는 하나의 명제이다. 참 많다. 이 시대의 가난한 청춘들은.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기 전에,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이 역시 또한 차고 넘친다. 모순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들이 이렇게 가난함에 눌려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굳이 잘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굳이 저렇게 잘난 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이들은, 정말 세속적 차원에서 잘 살고 있는데, 아름답고 착하고 순한 영혼들은 오늘 하루도 힘겹게 삶을 이어간다. 빌어먹게 잘못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살아온 가난한 이웃들의 그 질긴 삶을 기록하려 했다. 머지않아, 빌어먹게 잘못된 이 세상이 그들을 더는 볼 수 없도록 밀어버릴 것임을 운명적으로 느꼈기 때문일까. 그녀가 살아온 비루하지만 한 없이 아름다웠던 풍경들이 결국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녀의 노력은 눈물겹다. 그리고 바로 그녀의 삶이었기에, 잔인하리만치 생생하다.

 

후미진 거리와 골목의 사이사이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그녀가 뜨겁게 기억하고 뜨겁게 작별을 고한 용산 남일당 건물, 이주 노동자들, 노숙인들, 담배 피우는 청소년들, 윤락 여성들, 황학동 벼룩시장, 신당동 떡볶이 골목, 길고양이, 곱창집 이모에게도 얼마나 많은 눈물과 따뜻함이 담겨있었을까.

 

가장 좋은 글은 가장 솔직한 글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때론 너무 솔직하기에, 한 치의 꾸밈도 없기에 잔인한 글도 존재한다. 나에게 어쩜 그녀의 글은 그렇기에 불편했고, 아팠다.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것 역시 비굴한 비겁함의 소치였다.

 

이 시대의 명확한 모순은 고통의 원인을 찾는 과정이 고통의 본질만큼 너무나 힘겹다는 사실일지 모르겠다. 도대체 누가 잘못을 한 것이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서성거린다는 것은 분명, 불의다. 우린 얼마나 많은 불의를 참고 당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 뜻과는 다르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서로에게 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의 미래가 분명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그 하찮고도 위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럼 지금의 현실은 우리를 수만 번 무너뜨릴 기세다. 하지만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그러니 잘 살아가자고, 어떻게든, 기필코 살아내자고. 매일 매일 뜨겁게 작별을 고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만나자고.

 

2013년 겨울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물론 그 해 봄 나는 천사 같은 딸아이를 얻는 과분한 기쁨을 안았다. 하지만 이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상상하는 것 역시 기쁠 수는 없었다. 두려웠고, 미안했고, 몸 둘 바를 찾을 수 없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이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한없이 두렵다.

 

아마 더 어려울 것이다. 더 상처받을 것이다. 종국엔 그것이 상처인지, 불의인지, 모욕인지 체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가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지극한 슬픔을 예감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고문이 반복되는 것과 같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까. 어떤 세상이 너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까. 여전히 모르겠다. 여전히 어렵고 어리석다. 다만, 한 가지는 느끼고 있다. 그 언젠가 아이가 지금 그녀의 나이가 되어갈 무렵, 이 책을 권해볼 생각이다. 재미없다고 내던진다 해도 한 번은 권하고픈 생각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간사한 헛소리 대신, 아프더라도, 함께 아플 수 있는 마음의 넓이를 갖도록 해주고 싶다. 그것이 아이에게 그 어떤 자기계발서를 권하는 것보다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믿고 싶다.

 

책을 읽었던 2013년 끄트머리, 어쩜 그녀의 책이 불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날 것 그대로 드러난 슬픔을 확인한다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여전히 불편하고, 여전히 아프지만, 더 이상 짐짓 모른 척 어설프게 외면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2015년 봄이 온다. 미세먼지와 황사가 소란스럽지만, 기쁘게 맞고 싶다. 그녀에게 안부를 전한다. 여전히 그렇게 아름답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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