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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 - 1659년 5월 4일의 비밀
오세영 지음 / 시아출판사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어찌하다 보니, 2014년 독서를 꽤 무거운 주제로 시작했던 것 같다. 북벌이라니, 병자년의 치욕을 되갚기 위한 조선의 출병이라니, 소설이라 해도 그리 가벼운 주제는 분명 아니다.
한반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것. 바로 ‘지정학적’이란 수식어다. 참 애매하긴 하다. 하필 우리 주변에 세계 4대 강국이 모두 둘러싸여 있다. 물론 미국이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어쩜 나머지 세 국가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맞다.
때문에 외교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아울러 정확한 현실 인식도. 언제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질 수 있으니, 매사 신중하게 생각한 다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혹자들은 그것이 우리의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무지한 나는 솔직히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기엔 내 양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조상들이 ‘지정학적’ 위치라는 약점 때문에,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는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살벌해졌다고 할 수도 있다. 미국의 부활로 인해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있지만, 중국은 덩 샤오핑의 ‘도광양회’를 넘어선 지 오래다. 국내 학자나 언론인 중 일부는 러시아가 미국에 의해 큰 곤경에 빠진 것을 본 중국이 ‘신 도광양회’로 전략을 바꾸었다고 말하지만, 난 여전히 중국이 ‘주동작위’와 ‘돌돌핍인’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중국은 스스로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을 만큼 거대해 졌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나락으로 떨어졌던 미국도 다시 부활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이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미국은 세계 경제와 군사 부문을 장악하고 있고, 이러한 추세는 단 시일 내에 바뀔 것 같지 않다.
그럼 일본은? 러시아는? 각자 처한 상황이 만만치 않긴 하지만, 여전히 대국이고 세계 최고의 경제 강국이다. 미국에 대해 이를 갈고 있을 푸틴은 결코 더 이상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겠다는 심산이고, 아베 역시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더라도 다시금 일본을 세계가 두려워하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이 두 지도자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미국뿐이지만, 이 역시 만만치는 않다. 동북아는 지금도 요동치고 있다.
우린 여기에서 항상 실리와 명분이라는 두 과제를 적절히 섞어가며 외교력을 펼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경제적으로 이미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중국을 무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오랜 동맹인 미국과 소원해질 수도 없는 상황이다. 결국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영리하게 실리를 취하고, 또한 명분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아니, 현 정부의 생각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늘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 우리가 그렇게 계산을 하는 동안, 과연 다른 나라들은 놀고 있을까? 미국과 중국은 우리의 속셈을 전혀 모르고 있을까.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하는 대로 지켜보고만 있는 것일까.
절대 아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 두 나라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선택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실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실리외교, 균형외교. 이런 것들은 기실 허상일 뿐이라는 소리다. 게다가 우린 북한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상수(이자 변수)를 안고 있다. 답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정작 우리의 외교력이라는 것을 보자면, 더 암담하다. 아직까지 고려의 서희를 우리 외교의 상징으로 말할 만큼, 빈약하고 한심하다. 서희 이후의 외교다운 외교는 없었던 것일까. 명분에 얽매인 사대주의가 판치던 역사는 이후 조선의 멸망과 대한제국의 몰락, 일본의 식민지와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외교? 그 이후로도 대한민국의 외교라는 건 단지 미국과의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 것이 바뀐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미국 외의 외교를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외교부는 자신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임을 자부하며, 오만방자하다. 물론 강대국들에겐 한없이 약하지만 말이다. 최고의 엘리트라면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선의 외교정책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텐데, 그런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암튼 그렇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외교라는 게 말이다.
중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미국의 사드(THAAD) 사이에서 우리 외교부의 수장은 “행복한 상황”이라 말했다. 무엇이 행복인지 심히 궁금하지만, 암튼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그 자체에 행복감을 느낀 게 아닐까 싶긴 하다. 씁쓸하다. 자신도 말하고 나서 우울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친미파라 해도 말이다.
오직 명나라를 주인의 나라로 모시던 조선은 명을 멸하고 일어난 청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다. 피난 간 조선의 왕은 남한산성에서 청의 군사들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명나라를 위해 엎드려 절을 하고 춤을 추었다. 신하들은 끝까지 싸우자는 편과 항복하자는 편이 서로 싸웠다.
<북벌>은 효종의 청나라 출병 계획과 이를 막으려는 서인, 친청파들의 치열한 암투와 음모를 다룬다.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결국 북벌은 이뤄지지 못했다. 만약 효종이 죽기 전 출병을 명했다면, 조선이 청을 공격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조선이 청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까. 다시 명이 일어설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조선 백성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이미 그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는 효종의 북벌 시도라는 역사를 통해 3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과연 명분과 현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 무엇인지.
생존과 명분. 명나라와 청나라, 이 두 나라가 과연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차이로 다가왔을까. 그들은 그저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만을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명분이라면 누굴 위한 명분이고, 국익은 누굴 위한 국익일까.
AIIB이던 THAAD이던,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조선시대의 그들처럼 ‘백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나라의 주권을 가지고 있는 이 땅의 주인들이다. 그들을 고려하지 않은 국익이나 명분 따위는 필요치 않다. 그게 핵심이다.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와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들이 활약하는 <북벌>은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아울러 소설을 덮고 나서도, 강한 여운과 물음표를 남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이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