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계의 정치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남태현 지음 / 창비 / 2017년 10월
평점 :
과학의 진보, 문명의 진보는 우리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지겹도록 떠들어대는 4차 산업혁명시대를 앞두고, 조금은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문득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최첨단 과학의 시대, 인간의 평균 수명이 곧 100세를 넘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가득한 시대에, 정작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던 미세먼지로 고통받고, 온갖 기상이변으로 많은 이들이 죽어간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인류는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엔 참혹한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한반도는 냉전의 마지막 상징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과거에 비해 진보했다고,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다.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이나마 인류의 진보는 이뤄지고 있다는 믿음은 허망하다. 지금도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매일 발생하고, 인류는 뒷걸음질 친다. 물론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 희망은 자주 우릴 배신한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로힝야족을 향한 인종청소 앞에서 국제사회는 침묵한다. 아직도 세계엔 굶주림과, 충분히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많지만, 그들의 고통을 근원적으로 없애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왜 인류는 진보와 퇴보를 반복할까. 무엇이 인류를 변화시키고 움직이게 할까. 그 동력은 무엇일까. 돈일까, 무기일까, 종교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의 합일까. 생각하다보면 더더욱 회의감만 든다. 언뜻 세상은 나날이 나아져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세계를 움직이는 핵심 기제로 정치 이데올로기에 주목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문제 뿐 아니라 전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올바른 자리 찾아주기를 시도한다. 저자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거룩한 것이 아니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도구지만 이는 도구일 뿐 내 삶과 사회의 목표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복잡한 사회현상을 생각할 때 이용하는, 좋은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여 사고와 토론을 돕는 도구로서 적극 활용하면 된다. 그 뿐이다.’
그동안 우리는 정치 이데올로기 과잉 시대를 살아왔다. 지금도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조롱이나 억압의 기제가 되는 비정상적인 시간을 너무 오래 살아왔다. 미국에도, 일본에도 존재하는 공산당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금기이자 저주의 단어로 작동한다. 이제는 그것이 비정상인 것조차 희미하다.
이 책이 더 반가운 이유다. 저자는 도구로서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함께 대표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들을 소개한다. 우리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민족주의는 중국과 티베트의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아울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 등을 통해 시오니즘과 종교에 대한 조명도 시도한다.
아울러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스웨덴과 베네수엘라의 다른 실험 결과를 통해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회의 전체 합의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설명하고 있다. 우고 차베스라는 걸출한 지도자의 리더십으로 인해 베네수엘라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혁신과 변화를 이뤄냈지만, 사회 전체적 합의가 아닌 개인의 추진력으로 이뤄진 사회주의 실험은 결국 미완의 과제를 남겼다.
또한 저자는 한국과 미국의 보수주의가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미국의 보수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하지만 태생부터 기형적이었던 한국의 보수주의는 반북·경제성장·친미로 고착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진정한 보수주의라 부르기도 민망한 한국 보수층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실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진정한 보수정권이었다면 당시와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미국을 향한 굴종과 북한을 향한 증오와 적대감을 무한 확장시킨 정책은 남북관계의 파국과 북핵의 고도화만을 이끌어냈을 뿐이다. 더구나 박근혜 정권은 스스로 정부의 정당성을 상실한 채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불러왔다. 이것이 우리 시대 보수의 모습이다.
한편 저자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사회에 전파되고 유지되는 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먼저 대중매체를 들 수 있다. 소위 ‘기레기’라는 말이 흔하게 사용되는 지금, 우리는 언론이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 민중을 선동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목격한 바 있다. 양심 있는 언론인 소수가 진실을 밝혀도 이내 묻히고 심지어 탄압까지 받는다.
저자의 말처럼 1994년 르완다 대학살과 9·11테러 후 부시 정부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는 대중매체가 큰 역할을 했다. 르완다의 권력집단은 라디오를 이용해 학살을 독려했고, 부시 정부는 근거 없는 주장을 반복해 국민들이 이라크 침공의 부당성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었다. 즉 언론이 부당한 학살이나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에 복무한 셈이다.
또 조직화도 빠뜨릴 수 없는 요소다. 미국 내 친이스라엘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배경에는 막강한 이스라엘 로비가 숨어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 그리고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의 강력함은 조직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대중매체와 조직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이다. 재벌이 국가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우리 현실에서 자본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익히 알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저자는 교육제도와 선거제도 역시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비단 우리 뿐 아닐 것이다. 자본의 힘으로 평등의 원칙이 무너진 현실은 만국이 같아만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맥없이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일부 기득권이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도구를 이용해 대중을 선동하며 자신들의 원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움직이는 것에 대해 우리 역시 같은 방법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의 정비와 매일 매일의 각성이 필요하다.
저자는 선거제도의 개선을 주장한다. 단순다수제 선거제도는 우리 정치사에 양당체제가 수십 년 간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일부 정치 이데올로기가 독점적 지위를 누리게 만들었고, 국민들이 다양한 정치적 선택지를 갖지 못하게 했다. 정치 이데올로기 사이의 정당한 경쟁과 발전을 막아 결과적으로 우리 정치의 성장을 막아온 것이다.
저자는 때문에 비례대표제 정착을 주장한다. 비례대표 의석수가 대폭 늘어나야 유권자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소신껏 투표할 수 있고, 소수 정당이 국회에서 더 많은 의석을 차치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 내에서 지금보다 더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할 때 비로소 국민 위에 군림하던 거대 정당들이 제정신을 차릴 것이다.
책은 어렵게만 보이던 정치와 국제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정치의 맥락을 세계 각국의 사정을 통해 풀어내는 솜씨가 대단하다. 덕분에 여러 국가 사이의 존재하고 있는 갈등과 문제점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자의 노력으로 손쉽게 세계 정치를 살펴볼 수 있었다.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여러 가지 잡음이 이어지고 있다. 공정성의 문제, 정의의 문제가 평창을 흔든다. 누구의 주장이 틀렸다고 일방적으로 비판하기에도 애매한 문제다. 단일팀과 단일기를 둘러싼 논쟁은 국민의 합의나 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때 어떠한 일들이 발생하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남북단일팀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그것이 향후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이나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역할 등을 한 번만 더 생각한다면,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당장의 공정성을 문제 삼아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거부하는 듯한(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모습은 씁쓸하다.
정치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몇몇 수준 이하의 인간들은 연일 세대 갈등과 반북 정서를 조장하며 평창올림픽의 실패 나아가 현 정부의 실패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정부 역시 야당 눈치를 보느라,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북측이 올림픽에 참가하고 협조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내가 김정은 위원장이라면 과연 이런 상황에서 협조할 수 있을까. 물론 북측 역시 나름의 철저한 계산을 하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리 유쾌할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우리의 국군의 날 행사를 다른 나라에서 취소해라 마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 이데올로기로 남북이 경쟁하던 시기는 이미 끝났다. 이제는 평화와 공존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가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 과제를 풀어감에 있어 평창올림픽은 너무나 소중한 기회다. 이 기회를 통해 부디 한반도의 평화가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아울러 덜 떨어지고 수준 이하의 정치인들은 제발 이번 지자체 선거나 향후 총선 등을 통해 사라지길 기원한다. 구역질도 아까운 인간들이다.
오늘(2월 2일)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생일이다. 어제 광화문에서는 그의 지지자들 200여 명이 모여 박근혜의 생일파티를 하고 “사랑한다!”고 외쳤다. 그리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했다고 한다. 문득 전 주한 미 대사 리퍼트의 피습 사건 이후 한 기독교 단체가 벌였던 쾌유 기원 퍼포먼스가 떠오른다. 그들은 부채춤을 추며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간절히 바랐고, 어떤 이들은 쾌유를 비는 단식에 나서기도 했다.
자신이 노예임을 깨닫지 못하면,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의 행복이 애처롭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