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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 - 종교, 차별, 여성, 법으로 살펴본 혐오 이야기 ㅣ 철수와 영희를 위한 사회 읽기 시리즈 2
김진호 외 지음, 인권연대 기획 / 철수와영희 / 2019년 7월
평점 :
“특정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사회에서의 배제, 권리·자유의 제한, 명백한 증오나 차별의식, 폭력을 부추기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표현 활동”
일본 오사카시는 2016년 제정한 조례에서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특정 민족 등에 대한 혐오표현)’를 이렇게 정의했다. 오사카시는 조례에 따라 헤이트 스피치를 행한 인물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도록 했고, 실제 ‘조선인이 없는 일본을 지향하는 모임’ 등 극우 사이트 관련 인사들의 신상을 공개한 바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중국은 물론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당장 뚜렷한 백신이 없는 상황에서 전염에 대한 두려움이 급속도로 확산된다. 일단 최대한 야생동물과의 접촉을 자제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게다가 미국에서는 독감으로 1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고 있다. 2020년 벽두부터 예상치 못한 바이러스의 침공으로 모든 현안과 이슈가 묻히고 있다. 압도적이다.
인류는 탄생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질병에 맞서 싸우며 살아왔다. 콜레라, 결핵, 에볼라, 말라리아, 페스트, 이질, 장티푸스, 천연두, 사스, 메르스 등 무수히 많은 질병과 싸워온 시간 자체가 곧 인류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손 쓸 수도 없이 목숨을 빼앗아 갔던 전염병들이 과학의 발전에 따라 차츰 정복 가능한 것으로 바뀌기도 했다. 이제 또 우리는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나게 되었고, 길고 긴 전투가 다시 시작된 셈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전염병이 발생하고 확산됨에 따라 또 하나의 바이러스가 함께 창궐하고 있다. 어찌 보면 더 무섭고 치명적인 바이러스다. 이것이야말로 백신이나 치료법이 전무해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바이러스의 이름은 바로 혐오와 배제이다.
중국인들의 오랜 식문화로부터 전염병이 비롯되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예전 다른 국가에서 촬영했던 박쥐를 먹는 영상이 급속도로 퍼지며, 비위생적이고, 이른 바 무엇이든 다 먹는(!) 중국의 식문화가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인들의 식문화가 과거 수많은 기근(중국 공산당의 농업 정책 실패로 인한 엄청난 기근을 포함해)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은 간과한 채, 이른 바 ‘쇼킹 아시아’ 급으로, 유독 중국인들은 비위생적이고 야만하다는 인식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프랑스에서 새끼 원숭이의 골수를 산 채로 즐겨 먹었던 것이나, 그밖에 우리 시선으로 보면 기겁할 만한 식문화가 서구에도 엄연히 존재함에도, 또한 우리 역시 개고기를 즐겨먹었던 과거(물론 지금도 개고기를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음성화되었을 뿐)가 있음을 기억한다면, 중국에 대한 무차별 혐오는 적절치 않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일단 중국인들은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 언론도 여기에 한 몫 하고 있다. 어떤 언론은 재중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림동을 탐방하고 쓴 기사를 통해 마치 조선족 동포들을 위생 관념이라곤 하나도 없는 야만인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여기에 동감을 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서의 혐오 현상은 지금의 코로나처럼 ‘신종’은 결코 아니다. 2018년 우리 사회를 흔들었던 제주 예멘 난민 문제도 그랬고, 빈곤층, 여성, 장애인, 탈북민, 외국인 노동자, 성소수자 등 우리 사회의 혐오 현상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계층과 연령에 따른 차별과 혐오 문제도 가볍게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혐오의 측면에서 그들은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이 아니라 배척하고 박멸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참혹한 모습이 매일 매일 일어난다.
차별과 혐오는 구분 짓기에서 비롯되고, ‘우리’가 아닌 ‘적과 아군’을 만들게 된다. 서로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자연스럽게 증오를 낳게 되고, 결국 공동체를 무너뜨리게 된다. 대화와 협의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기 보다는 상대를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그런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지난 조국 사태를 겪으며 느낀 것은 우리 사회의 갈등 수준이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를 이미 넘어섰다는 것이었다. 광화문과 서초동에 모인 이들이 서로 다른 나라의 시민들이 아닐 텐데, 상대방을 용납할 수 없는 적이나 없애버려야 대상으로 낙인찍고 일방적으로 비난했다. 검찰개혁이라는 중요한 시대적 과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말하기엔 그 상처가 너무 컸다고 생각했다. 그 감정의 골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힘들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아쉽고 안타까웠다.
갈등과 혐오를 생산하는 이들은 당연히 목적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생각하기에 갈등을 생산한다. 책은 우리사회의 차별과 혐오가 1997년 IMF 사태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분석한다. 자살률은 항상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했고, 불특정 대상을 상대로 한 폭력과 살인도 증가하고 있다. 결국 사람들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갈수록 차별과 혐오 현상이 증가한다는 설명이다.
우리는 어느 새 일상적으로 무언가 분노할 대상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대상은 주로 사회적 약자들이다. 일부 정치세력이나 이익집단들은 이런 혐오를 부추겨 자신들의 이익을 챙긴다. 언론도 여기에 함께 춤춘다. 그들도 결국 이익집단에 불과하다.
누군가를, 특정 대상을 혐오하고 차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거나 두려움을 해소할 수는 없다. 우리는 나치를 혐오한다. 이는 정당하다. 나치가 가졌던 차별과 배제의 논리는 인류에 끔찍한 상처를 남겼다. 우리는 일본에서 살아가는 우리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과 억압에 늘 분노한다. 하지만 스스로 거울을 쳐다보지 않고 있다. 우리 스스로 그들과 닮아가는 것은 아닌지 큰 성찰이 필요하다.
혐오와 차별 속에 평화가 깃들 공간은 없다. 시간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사회의 혐북(북한을 혐오하는 현상)이 우려스러운 이유이다. 북한을 제거해야 하고 박멸해야 할 적으로만 본다면, 이 땅의 평화는 영원히 기대할 수 없다. 타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통합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공존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지금, 우리는 과연 북한과의 공존을 원하고 있는지, 그 준비는 하고 있는지 다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가난하다고 차별하고, 나와 생김새가 다르다고 배제하고, 나와 생각과 문화가 다르다고 배척하는 것은 공동체의 기반을 흔들게 되고, 결국 무너뜨린다. 다양한 생각과 주장이 받아들여지고, 그 다양성만큼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이 곧 미래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거대한 우주이다. 혐오는 타인의 우주를 파괴하는 행위다. 오사카 시민들만큼의 상식을 기대하는 게 그리 큰 욕심일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무리 무서워도 끝내 인류는 이를 극복해낼 것이다. 그 과정이 부디 너무 길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증오와 배제, 차별과 혐오는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성찰과 이해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무한경쟁의 늪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자존감을 느낄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자본을 설득할 수는 없지만, 자본을 통제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자본이 인간을 배제하고 차별을 생산하는 비정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 자신을 돌아본다. 나도 모르게 타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차별과 혐오에 대한 애써 눈감으며 외면했던 것은 아닌지, 모든 이들을 내 마음을 다해 섬겼는지, 무거운 반성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안의 차별, 혐오, 배제의 감정을 없애버리고, 다시 공동체를 꿈꾸는 데 책은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모든 것은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 우리는 영원할 수 없지만, 영원한 공동체를 매일 매일 꿈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