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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불일암 사계
법정 지음, 맑고 향기롭게 엮음, 최순희 사진 / 책읽는섬 / 2017년 5월
평점 :
이제 고인이 된 법정 스님은 자신의 글을 모두 절판하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글들은 새롭게 묶여 나오고 있다. 스님의 유언을 생각하면 이런 책이 나오고, 이 책을 읽는 것이 기분 나쁜 일이지만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잘 나왔다는 생각을 한다. 이 모순된 감정이 계속해서 법정 스님의 책들이 나오게 만든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책은 조금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故 최순희 할머니 때문이다. 그녀가 15년 동안 불일암을 오르내리면서 찍은 사진집 <불일암의 사계> 때문이다. 이 책은 비매품이고 소량만 찍은 후 주변의 아는 사람들에게만 주었다고 한다. 이 책의 기본 구성은 바로 이 <불일암의 사계>에서 시작한다.
최순희 할머니의 이력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빨치산 경력이다. 이태의 <남부군> 속 최문희의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워낙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최순희 할머니에 대한 글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각 장 서두에 소설가 정지아가 적어 놓은 것이 전부다. 기껏해야 겨우 네 장 정도인데 이 속에 담긴 내용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아주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 최순희라는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빨치산이 되었으며 체포 후에 어떤 활동을 했는지와 그 후의 삶까지. 이 글을 읽다 보면 그녀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불일암에 올라와 암자의 잔일을 묵묵히 하고 사라진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불일암의 사계> 속 불일암은 보통의 산속 암자다. 계절의 변화가 있고, 손으로 투박하게 만든 의자 등이 보인다. 작은 암자다 보니 솔직히 볼거리도 별로 없다. 법정 스님이 계신 곳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잠시 스쳐지나가는 암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법정 스님이 그곳에 머물면서 그곳을 그의 가르침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이 되었다. 최순희 할머니는 직접적으로 다가가서 말을 걸고 배움을 얻기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과거를 조금씩 씻고 있은 것 같다. 그리고 카메라로 불임임과 주변의 풍경 등을 담기 시작했다. 이것이 무려 15년 동안이니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책 속에서 그 시간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내가 아쉬울 뿐이다.
최순희 할머니의 사진 속에 사람이 들어 있는 장면은 딱 한 장이다. 감자를 캐는 법정 스님(?)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사진집 속에는 여러 권의 책 속에서 뽑아져 나온 스님의 글들이 심어져 있다. 어딘가에서 읽은 것도 있고, 조금 낯선 글도 있다. 어릴 때 이런 종류의 책을 좋아하지 않아 거의 읽지 않았는데 중늙은이가 다 되어 그 글에 감탄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점점 쌓여가는 책들에 둘러싸여 스님의 글을 읽다 보면 나의 강한 수집욕이 부끄러워진다. 정리해야지 하면서 더 많이 모으는 이 못된 버릇 혹은 욕망이 이때만은 잠시 사그라진다. 이런 일이 조금씩 많아져서인지 이전보다 조금 더 생각하면서 책을 산다. 아주 비루한 변명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꽃과 나무에 대한 나의 무지다. 최순희 할머니의 사진 속에 담긴 꽃의 이름을 모르니 ‘뭐지?’하는 의문이 먼저 생긴다. 감상이 조금 뒤로 밀린 것 같다. 엮은이들이 선택한 글들이 모두 사진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 들지 않지만 충분히 책 속으로 녹아들었다고 생각한다. 15년의 세월 때문인지 불일암의 모습에 변화가 꽤 있는 것 같다. 전문가가 찍은 사진이 아니라 화려하지도 깊이도 부족하지만 몇몇 사진은 바람에 나를 태워 그 곳을 노릴게 만든다. 시원한 바람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불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으면 절대 찍을 수 없는 사진들도 보인다. 사진들에 찍은 날짜를 넣어서 세월의 변화도 같이 보여주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바람도 생긴다. 채워져 있지 않아서, 정밀하게 세련되지 않아서 더 정감 가는 사물들은 잠시 마음에 여유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