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남자 걷는 여자 로망 컬렉션 Roman Collection 9
정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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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잊으려고 한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은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단 그 감정을 잊고, 그 사람의 이미지를 잊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잊었다고 생각한 옛사랑이 나타난다면 어떨까?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은 되살아나고, 그 당시의 아픔과 괴로움과 열정 등이 뒤섞이면서 살아난다. 이십 년이 넘었던 기간 동안 감정이 메말라 간 남자라면 이 상황이 불편하지만 오랜만 가슴 뛰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한 축은 바로 이런 남자가 담당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기 전 한 통의 메일로 출생의 비밀을 알려준다면 어떨까? 엄마로 알고 있던 사람이 친엄마가 아니고 자신이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안다면? 먼 미국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마린이 이런 경우다. 엄마의 누드 모델이었던 그녀가 자신의 친엄마였다니. 아빠의 죽음도 충격인데 이 사실은 더 심하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남자 친구를 떠나 한통의 엽서에 나온 주소로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엄마의 어릴 때 남동생 같았던 그 남자. 바로 은탁이다.

 

첫사랑이 너무 강렬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좋아하는 삶이 너무 바빠 다른 여자를 만나지 못한 것일까? 은탁을 몇 년 동안 좋아했던 여자 후배도 있었다. 하지만 삶은 어느 순간 변화를 맞이한다. 멀고 긴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하던 그가 짐을 정리한 채 고향 마을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나무물고기란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 큰 성공도 실패도 없는 공간이지만 꾸준히 사람들이 찾아온다. 만약 이 게스트하우스가 없었다면 마린이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인연은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이어진다.

 

소설은 현재보다 과거에 더 비중을 둔다. 이 과거가 은탁과 마린의 현재를 대변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의 첫 접점이 시작한 것도 과거다. 물론 그 인물은 은탁의 첫사랑이자 린의 엄마인 소정이다. 길지 않은 분량이다보니 간결하게 이야기를 펼친다. 군더더기가 없다. 세밀한 상황 묘사나 전개보다 그 당시 감정을 표현하는데 더 충실하다. 자신의 생모를 아는 남자를 만났다고 그 이야기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작가는 무겁게 이 상황을 그려내지 않고 린을 통해 경쾌하고 가볍게 풀어낸다. 어떤 순간은 농담 같다. 하지만 그 속에 진심이 담겨 있다. 조금 낯설게 다가온다.

 

출생의 비밀과 그 과거와 관련된 남자의 등장과 만남이 어떻게 보면 구식이다. 신파적이 될 수 있지만 작가는 과감한 생략과 게스트하우스의 현실을 통해 조용히 풀어낸다. 재미난 것은 부령제과의 인기다. 아니 그보다는 부령반점의 역할과 이야기들이다. 작은 마을의 경우 그 마을 사람들의 기억을 먹고 산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기억 속에나 존재한다. 그 중국집 딸이 빵가게를 열었는데 인기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은탁과 마린을 사랑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사랑은 짝사랑이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충격이 이 상황을 가속화시킨다.

 

첸의 린에 대한 사랑은 명확하다. 하지만 은탁에 대한 수연의 감정은 무얼까?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남자는 매일 달리고, 여자는 걸었다. 하루에 몇 번의 만남이 길 위에서 펼쳐졌지만 그냥 게스트하우스 사장과 손님이었다. 하지만 과거를 알고 인정하면서 이 감정은 변한다. 이 감정선을 잘 따라가지 못했다. 과거는 알지만 현재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결말이 조금은 낯설다. 다른 방식으로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비어있던 시간들이 채워지면서 숨어 있던 감정들이 튀어나왔는지 모른다. 다른 속도로 걷고 뛰던 두 남녀는 이제 완주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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