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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의 국경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15년 12월
평점 :
본격 연애 소설이란 말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유희가 보여주는 일탈과 방황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간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이 이성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 남자 다니엘이 한 달 후 나타나 결혼하자고 했을 때 그녀가 내세운 섹스 파트너는 현실적인 최상의 대안이다. 그녀의 청소년 시절 성적 판타지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였던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이런 장면들이 조금씩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그녀와 그녀를 둘러싼 시댁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때만 해도 그녀는 아직 유부녀였다.
유부녀지만 그녀는 이혼을 원한다. 시댁은 남편의 정계 진출을 위해 1년만 이혼을 미루자고 한다. 대신 노른자위 땅에 있는 건물을 위자료로 주겠다고 한다. 이 제안이 그녀를 뒤흔든다. 이것을 위해 시어머니가 각서까지 준다. 읽으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하나의 미끼임이 드러난다. 각서는 그녀의 아버지가 정치에 대해 한 말의 아주 좋은 표본이다. 가슴 한 곳에 자리잡고 있던 욕망과 현실이 그녀의 자유를 해치지만 아직 그것을 깨닫기에는 세상을 너무 모른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연하남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민중이다.
별거중이고 이혼을 앞둔 상태에서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재료다. 책 후반부에 가서 이것은 아주 큰 분노를 불러온다. 정치와 정치검사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이 연애 소설에서 피가 곤두서는 분노를 느낀 것은 작가의 치밀한 연출과 기소권 독점을 가진 검찰에 대산 불신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공권력이 국민을 위하지 않고 소수 권력자에게 봉사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주 잘 보여준다. 읽으면서 가장 감정이입이 많이 되었다.
이혼하려고 별거중인 그녀도 먹어야 살 수 있다. 그래서 프로그래머로 일한다. 한끼의 밥은 생존의 필수품이다. 이 일상은 그녀가 감정에 매몰되는 것을 그만두게 만든다. 물론 여기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인연을 맺는다. 이 또한 정치 술수에 능통한 시댁에게는 아주 좋은 재료일 뿐이다. 그리고 나의 솔직한 감정은 이 상황과 관계들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에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이 관계를 잘 풀어주지만. 삶이 곧 정치라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유희는 아직 자신의 감정도 정체성도 제대로 찾지 못한 것 같다.
아버지 현우는 소설가다. 문학상을 수상하고 일 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상금을 받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호쾌해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베스트셀러 한 편 없는 수많은 소설가 중 한 명이 된다. 다행이라면 인문학 붐으로 문화센터 강의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은 국경에 대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국경은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정치가들이 인위적으로 나눈 경계선인 국경은 후반부에 가면 하나의 미스터리처럼 다가온다. 읽으면서 현우의 모습에 작가의 이미지가 겹쳐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유희의 영문은 pleasure이다. 여기서 이중적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주인공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이다. 그녀가 다니엘을 통해 성욕을 깨닫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더 분명해진다. 국경은 그녀가 넘어가야 할 하나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녀가 성욕과 감정에 더 순응할수록 이 국경은 희미해진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연애 소설이란 생각은 현우가 풀어내는 학설과 이야기 때문에 조금씩 무거움을 더한다. 특히 가상의 나라에 대한 설정과 설명은 정말 탁월하다. ‘희망이 있다면 사랑뿐이다.’ 이 한 문장을 위해 참으로 암울한 한국의 현실과 진한 사랑 이야기를 길게 풀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