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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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56분에 시작해서 다음 날 새벽 6시 52분까지 일어난 이야기다. 패밀리 레스토랑 데니스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아사이 마리에게 남자가 다녀오면서 시작한다. 물론 그 이전에 ‘우리’라는 존재가 보는 밤의 도시 풍경을 아주 멋지게 그려내고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역시 하루키라는 생각을 잠시 한다. 마리에게 다가온 남자는 아는 척 한다. 그런데 이름을 잘못 부른다. 유리라고. 그녀의 언니 에리와 함께 2년 전 호텔 수영장에 간 적이 있다. 이 우연한 만남이 결코 짧지 않은 밤 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발점이 된다. 하루키 특유의 문장과 분위기로 나를 강하게 빨아들인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은 ‘우리’라는 존재다. 작가는 친절하게 ‘우리’에 대해 설명해준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름 없는 침입자다. 우리는 본다. 귀 기울여 듣는다. 냄새를 맡는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그곳에 존재하지 않고, 흔적을 남기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는 정통적인 시간 여행자와 동일한 규칙을 지키는 셈이다. 관찰하지만 개입은 하지 않는다.” 이 글은 ‘우리’가 마리의 언니 에리의 방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서술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에리의 방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을 그냥 보고 있는 장면들을 읽을 때면 “우리는 한낱 시점에 불과하다. 어떤 형태로든 상황에 관여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은 마리가 머물고 있는 한밤의 도심이다. 그렇다고 에리의 방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원이 연결되지 않았는데도 텔레비전이 켜지고, 얼굴을 알 수 없는 남자가 그 방을 쳐다본다. 나중에는 화면 속으로 에리와 침대가 들어가는 일까지 벌어진다. 뭐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비슷한 장면들이 곳곳에 나온다. 바로 거울이다. 마리나 다른 사람도 거울을 본 후 그 이미지가 홀로 남아 있는데 이 이상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 않는다. 판타지 같은 설정이 늦은 밤 아주 조용히 펼쳐진다. 솔직히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조금 지루했다.

 

마리에게 아는 척 남자, 다카하시가 사라진 후 한 여자가 그녀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그녀가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다카하시에게 들은 것이다. 중국 매춘녀를 한 손님이 폭력을 가한 후 옷을 가지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풀기 위해 중국어 가능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간단한 대화를 나눈 후 중국인 조직에 연락을 한다. 어떻게 이 상황을 넘기지만 일본에 자리 잡은 중국 조폭은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 열아홉의 어여쁜 중국 여자는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다. 현실의 어두운 단면을 잠시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를 찾아온 러브호텔 알파빌의 매니저 가오루와 시간을 보낸다. 간단한 이야기가 둘 사이에 오고 간다.

 

‘우리’는 하나의 시점으로 여기저기를 오가면서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마리와 에리만 보여줄 것 같았는데 가오루나 다카하시나 중국 매춘녀에게 폭력을 가한 남자까지 등장시켜 이 한밤중의 사건들을 조용히 관찰한다. 감정은 대화를 통해 나오고, 밤이 깊어지고 새벽이 가까워지면서 가슴 한 곳에 조용히 묻어두었던 이야기가 밤의 어둠을 뚫고 흘러나온다. 여기서도 감정의 폭발은 없다. 절제된 감정은 차분하게 대화를 통해 표현된다. 격렬한 행동도, 터져나오는 감정의 폭발도 없다. 마리와 다카하시의 대화를 듣다 보면 이들이 겪은 일들이 화면 속 한 장면처럼 현실과 동떨어져 보인다. 하지만 이 속에 한밤의 진실이 담겨 있다.

 

중간중간 낯선 느낌이 많이 든다. 화려한 하루키가 보인다고 생각할 즈음 기묘한 일이 벌어져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짧은 시간을 다루다 보니 뭔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그냥 흘러갈 뿐이다. 중국 매춘녀에게 폭행을 가한 남자가 그 여자의 휴대전화를 편의점에 놓아둔 후 벌어진 두 개의 에피소드는 오해와 착각이 불러온 무시무시한 협박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전화를 받은 사람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리가 에리의 문제를 인식하고 다카하시에게 털어놓을 때 과거의 기억 하나가 그녀를 일깨운다. 엘리베이터에 갇혔을 때 그녀를 도와준 에리의 행동이다. 그 이후 이 자매의 사이는 벌어졌다.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그녀는 언니에게 다가간다. ‘우리’는 작은 태동을 본다. 새로운 시작은 새벽과 함께 온다.

 

예전에 읽었던 <어둠의 저편> 개정판이란 사실을 인터넷 서점 정보를 보고 알았다. 나의 이 무참한 기억력이라니... 덕분에 하루키의 소설을 다른 번역자를 통해 한 번 더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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