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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송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율리 체 지음, 장수미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낯선 작가에 쉽지 않은 문장이다. 쉽고 빠르게 읽히는 소설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SF문학상을 거부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조금은 의외의 반응이다. 거부 이유가 이 소설에 다루고 있는 내용이 이미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많은 SF소설이 현실을 바탕으로, 현실을 다루고 있음을 생각할 때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21세기 중엽의 미래가 배경이고 건강이 모든 것을 우선하는 미래 사회를 다룬다. 그리고 제목처럼 소송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때문에 조금 더 낯설고 읽기 힘든지 모르겠다. 읽은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소설 이전에 희곡으로 먼저 나온 작품이다. 음반소설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니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면 한 번 도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미아 홀. 그녀는 생물학자다. 강간살인범으로 몰려 자살한 동생이 한 명 있었다. 모리츠다. 동생의 자살 이후 그녀의 삶은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다. 이 궤도는 이 나라가 국민에게 강제한 ‘방법’이다. 방법에 의하면 누구나 자신의 건강을 돌봐야 한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운동하고 전염 가능성이 있는 신체 접촉이나 위험 물체를 만져서도 안 된다. 사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방법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이 없다. 있다면 “방법은 체제 안 시민들의 건강을 기초로 세워졌고 건강을 정상으로 본다.”(146쪽) 정도다. 국민들의 건강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 숨겨진 채 벌어지는 폭력과 진실 왜곡은 건강뿐만 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체가 가능한 것들이다.
희곡에서 시작한 것 때문인지 연극적 장치가 곳곳에 보인다. 미아와 다른 사람의 대화나 그녀에게만 보이는 이상적 애인 등의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법정 장면도 마찬가지다. 이 사실을 알고 다시 되돌아보니 연극의 한 장면 같은 장면들이 몇 개 더 떠오른다. 미아와 크라머, 미아와 로젠트레터, 미아가 사는 건물의 입주민들 등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런 설정이 읽고 난 후 재미를 준다면 읽을 당시는 조금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이야기 중심이 아니라 논쟁과 철학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모리츠가 자살하면서 뿌려놓은 의심의 씨앗이 미아에게 피고, 이것을 두려워하는 체제 옹호자 크라머와의 대결은 감성과 이성의 대결이기도 하다.
방법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에서 시민들은 운동 목표량을 채워야 한다. 살이 찌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병이 걸린다는 것은 전 사회의 민폐다. 개인이 병에 걸리면 사회가 이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것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논리가 기본 바탕에 깔려 있다. 개인들에게는 병이 날 권리가 없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병날권을 위해 싸우는 조직도 등장한다. 이 사회의 통제와 억압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는 대목은 뒤로 가면서 더 밝혀지는데 놀랄 정도다. 정보의 집중이 한 개인 혹은 사회 전체를 통제하고 사실을 왜곡하는데 얼마나 효율적이면서 동시에 위험한지도 역시. 얼마 전 벌어진 카드사 고객 정보 유출 소동은 이것의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렇다.
“중세는 한 시대가 아니에요. 중세는 인간 본성의 이름이에요.”(230쪽) 이 문장을 읽을 때 현재 우리 속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중세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왜곡하는 것만 보아도 분명하게 보인다. 통제가 강력한 나라일수록 진실이란 가면 뒤에 숨겨진 거짓이 더 많은데 이 소설도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미아가 벌인 소송 때문이 아니라 체제가 미아에게 건 소송 때문이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이미 보여줬듯이 소송의 기록은 서로가 맨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만든다. 물론 이것은 재판 공개나 재판 기록이 제대로 남겨질 때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