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프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나의 눈물은 왕따로 죽은 슌스케 때문이 아니다. 그의 자살 이후 삶이 바뀐 사람들 때문이다. 갑자기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부모와 동생, 유서에 절친이란 말이 남겨진 사나다 유,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나카가와 사유리 등이다. 유서에는 그를 괴롭혔던 두 명의 같은 반 학생이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은 이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왜 그가 자살했는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사나다를 비롯한 사유리와 가족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20년 동안 이어진다.
왕따와 자살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런 뉴스가 나오면 ‘또’라는 반응이 먼저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정은 ‘불쌍하다’, ‘얼마나 심했으면’, ‘나쁜 놈들’ 등과 같은 것들이다. 너무 자주 많이 일어나면서 둔감해진 것이다. 이 문제를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불러놓고 이야기해봐야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들 문제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이 사건은 불쌍하고 안된 일일 뿐이다. 하지만 가족은 다르다. 그들은 평생 가슴에 이 사건을 품고 살아야 한다. 그럼 절친과 짝사랑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그들은 어떨까? 이 소설은 바로 절친으로 낙인찍힌 유의 기록이다.
초등학교에서 유짱으로 불렸고 함께 놀았지만 중학교 올라간 후 그렇게 친하지 않았던 사나다에게 유서에 쓰인 절친은 엄청난 스트레스다. 이 단어가 슌스케 가족에게는 각각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엄마에게는 고마운 친구지만 아버지와 남동생에게는 절친이면서 그렇게 되도록 뭘 했는가 하는 원망과 증오의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낙인찍기라는 단어를 앞에서 사용했다. 절친으로 알려진 그는 방관자였고 용기 없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그가 이런 괴로움과 고통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의문을 계속해서 던지면서 답을 찾아간다.
사나다가 슌스케와 친구였다면 사유리는 단순히 짝사랑의 대상이다. 그녀는 같은 반도 아니다. 하지만 자살한 날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죄의식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유서에 남겨진 이름은 그녀도 낙인찍기의 대상으로 만든다. 처음 그녀가 슌스케의 집으로 찾아다닌 것은 이런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상황이다. 나중에 그녀가 이 사실을 말했을 때 동생 겐스케가 형을 살릴 수도 있었다고 원망했을 때 그녀가 그때까지 품고 있던 고통과 고뇌와 아픔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한 소년의 자실이 그녀도 가해자로 만들고 동시에 엄청난 피해자로 만든 것이다.
자식의 죽음에 가장 충격을 받는 사람은 당연히 부모다. 평생 가슴에 묻는다는 말로 표현이 불가능한 경험을 한다. 그 엄마가 충격에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과거 속에서 좋았던 추억만 찾아다니는 것이나 자살한 아들을 처음 발견한 아버지가 결코 반 친구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들의 반성문마저 언론에 흘리는 일을 저지르는 것은 이런 충격의 여파 중 일부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짱과 사유리마저 조금씩 그 일을 잊고 있을 때 그들은 매일 불단을 보면서 아들의 부재를 가슴속에 새겨 넣는다.
우리는 흔히 너무나도 쉽게 용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다. 겐스케가 용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말할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고 불가능한지 알게 된다. 이렇게 어려운 것을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 사회에서 잘못을 바로 잡을 힘이 있을까 의문이다. 물론 용서하지 말자는 의미는 아니다. 너무 쉽게 진솔한 참회나 반성 없이 용서를 내뱉고 바라는 것에 감정이 욱해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의 감정과 행동은 솔직하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다 표출하지 않지만 절제된 상태에서 그 감정이 강하게 전달된다.
이 소설에서 미스터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친하지도 않는데 유서에 절친이란 단어를 왜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 의문은 사나다의 아들이 쓴 노트에서 나온다. 아내가 말해준다. 그가 모르는 친구이자 절친이라 불린 친구가 사실은 동경의 대상이라는 것을. 이 순간 사나다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통곡한다. 슌스케에게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 깨달은 것이다. 20년을 이어져온 미스터리가 풀린 것이다. 그리고 슌스케가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의 의미를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이자 가장 가슴을 아리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부모는 자식을 잘 안다고 하지만 사실은 가장 모르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자식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만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하는 행동으로 습관이나 좋아하는 것 등을 알 수 있지만 가장 은밀하고 중요한 것들은 놓치기 십상이다. 아마 슌스케가 왕따 당하고 있는 사실을 부모에게 말했다면 그의 자살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혹은 부모들이 이 사실을 알아주길 바랐는데 알아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가정은 사실 무의미하다. 가장 솔직한 표현은 유가 다시 방문한 중학교에서 선생이 된 친구가 그렇게 믿고 싶다고 한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믿고 싶은 것을 깨트리고 현실을 제대로 직시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는 것에 대해 사나다 유는 이야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