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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처음 이 소설을 읽은 때 이제 배명훈 작가가 킬러 소설도 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인 sf적인 상상력을 생각할 때 조금 의외의 도입부였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뒤로 가면서 점점 사라졌다. 미래 어느 시점의 실존하는 체코를 무대로 가상의 연방이란 조직을 통해 그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났던 sf와 다르게 한 지역이란 좁은 공간에서 가장 넓은 세계와 우주로 공간을 단숨에 확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 인간의 탐욕과 본성과 사랑을 녹여내었다.
킬러로 11년간 연방을 위해 일한 나는 1년의 휴가를 받는다. 그가 선택한 휴가지는 체코다. 그런데 그가 머문 곳은 체코하면 떠오르는 프라하가 아니라 올로모우츠라는 낯선 지명이다. 그가 머물던 곳은 나폴레옹이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아우스터리츠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하지만 그의 휴가는 7개월 만에 끝난다. 연방에서 올로모우츠의 한 공연장으로 가서 눈에 들어온 것을 보고 알려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그는 한 여자를 본다. 그녀의 이름은 김은경. 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여자다.
나에게 김은경은 특별한 존재다. 이런 존재가 한 명 더 있다. 연방의 영재학교에서도 특별한 천재였던 조은수다. 김은경이 특별한 것은 연방 서열 3위인 장무권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무권은 숙청을 당했는데 이전에 그가 다루고 있던 조직이 전략무기개발네트워크다. 흔히 전넷으로 불리던 조직인데 조직의 수장은 숙청되었지만 그 조직이 지닌 잠재력과 무기 등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혹시 전넷의 새로운 수장이 나타나 조직을 재건하면 연방에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연방에서도 김은경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를 두고 이제 한 나라의 조직과 권력들이 충돌한다.
조은수는 정말 천재다. 이 천재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나는 조은수의 도움으로 김은경을 둘러싼 위험한 환경을 헤쳐 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믿었던 조은수가 가짜다. 이 가짜는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 중 하나다. 진짜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진짜에 대한 정보의 집적과 분석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취향이다. 그리고 진짜와 같은 가짜를 통해 진짜의 실체를 숨긴다. 가짜 조은수가 그를 위험에 몰아넣었다면 진짜 조은수는 그를 위험에서 구해주고 그에게 엄청난 힘과 무섭고 무거운 미래를 지워준다. 작가는 이 과정에 악마를 등장시킨다. 이 악마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존재로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준다.
중요한 등장인물이 세 명이지만 실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것은 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은 김은경이다. 김은경이란 존재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하고 끝나기 때문이다. 연극 무대에서 죽은 시체를 연기하는 그녀가 모든 음모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싸고 부제처럼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이 하나씩 드러난다. 마음은 또 다른 음모를 낳는다. 주인공인 나가 킬러라고 하지만 그 유명한 <자칼>처럼 암살자의 준비나 암살행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속고 속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과 진실을 찾아내려는 조직들의 음모와 노력이다.
속고 속이고,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고, 음모와 음모가 겹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악마의 실체와 전넷의 의도는 sf적 상상력으로 비약한다. 이 비약이 약간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비약이야말로 가짜와 거짓으로 가득한 이 소설 속 상황들을 단숨에 깨트리고 숨겨진 마음을 밖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진짜 휴가가 찾아온다. 행복해진다. 이 과정들이 만들어내는 속도와 비유들은 가슴 한 곳에 여운을 남긴다. 나의 마음도 휴가가 찾아온다. 나의 취향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