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지도
펠릭스 J. 팔마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최근에 읽은 소설 중 가장 긴 시간이 걸렸다. 재미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개인적인 일로 바빠서 제때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그렇게 많은 분량이 아니었을 텐데 이번에는 한 쪽의 분량도 적지 않아 예상한 시간보다 더 걸렸다. 며칠 동안은 하루에 겨우 몇 쪽씩만 읽었으니 긴 시간이 소요된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지만 읽는 재미는 상당했다. 문체와 시점이 약간 혼란을 가져오고,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의 사실과 다른 전개라 의혹이 생겼지만 말이다. 작가는 3부로 나눈 이야기 속에 각각의 주인공을 다르게 설정하고, 구성도 개별적이면서도 중첩되게 만들어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는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만들었다.

각각 다른 주인공을 등장시켰지만 모든 이야기 속에 핵심 인물이 있다. 바로 그 유명한 <타임머신>의 작가 H. G. 웰스다. 그는 앞의 두 이야기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하고 마지막 3부에서는 주인공이 된다. 이 소설에서 혼란을 가장 먼저 불러온 것은 1부다. 주인공 앤드류는 연인의 죽음으로 산송장처럼 8년을 살다가 자살을 결심한다. 자살을 위해 선택한 곳으로 마차를 타고 간다. 그곳은 가장 열정적이고 아름다웠으면서 가장 아픈 추억이 서린 곳이다. 바로 연인이자 창녀인 마리와 사랑을 나누었고 그녀가 잭 더 리퍼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곳이다. 그가 그녀의 죽음을 보고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을 보여준 곳이기도 하다. 그가 자살하려는 바로 그 순간 그를 저지하기 위해 사촌인 찰스가 등장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연인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는 그를 구할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 마리를 구하는 것이다. 찰스는 그가 경험한 미래 여행을 이야기하면서 그를 설득한다. 그 미래 여행은 머레이 시간여행사를 통해 미래인 2000년으로 가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찰스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가능할 것이란 기대를 앤드류에게 심어준다. 그런데 이 여행사는 단지 미래의 한 시점으로만 갈 수 있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타임머신>이라는 소설을 쓴 웰스에게 방법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 이때부터 SF소설의 선구자 중 한 명이자 기발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던 웰스가 등장한다.

소설은 다중구조와 다양한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여행이라는 매혹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가장 앞에 내세운 것은 사랑이야기다. 1부가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에게 살해당한 연인을 구하려는 것이고, 2부는 미래의 영웅을 사랑하여 그녀 클레어를 만나기 위해 과거로 왔다는 말에 속은 그녀와 그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면서 이 소설의 제목이자 복잡한 시간여행의 문제를 다룬 시간의 지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3부는 앞에 나온 이야기와 또 다른 전개와 설정인데 어떻게 보면 전체 구성에 대한 반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편한 설정이 평행우주란 개념이 있지만 말이다.

1부와 2부의 설정 중 머레이 시간여행사를 통해 보여주는 미래의 풍경과 영웅 데릭 섀클리턴 대장의 과거로의 귀환은 영화 <터미네이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계와 인간의 대결이란 설정과 섀클리턴 대장의 거짓말이 너무나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전체 이야기 속에 패러디나 오마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설정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또 한 편의 영화를 더 꼽는다면 <백투더퓨처>다. 물론 이 영화는 평행우주이론과 방향을 달리한다. 하지만 현재를 바꾸기 위한 과거로의 귀환은 나에게는 자연스런 연상 작용이다.

작가는 앞의 두 부분에서 시간여행이 거짓임을 말한다. 하지만 이 여행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경험한 것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분명한 진실이다. 그 사이사이에 심어놓은 조그만 장면이나 설정은 마지막 3부에 가서 또 다른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고전문학의 거장들을 등장시켜 이들이 이 시대에 살았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웰스의 이력을 전체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사실을 거짓과 뒤섞고 그것을 혼란 속에 던져 놓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기발하고 놀라운 사기극이라고 하기에는 시간여행이 주는 매력이 너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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