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처음 몇 쪽을 읽었을 때 갑자기 떠오른 소설이 있다.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다. 어릴 때 이 단편 소설을 읽고 상당한 공포에 시달렸다. 검은 고양이와 시체가 있는 벽이라는 소재가 함께 어우러져 공포에 빠지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이라면 아마 그냥 그랬을 것이다. 더 섬뜩하고 잔인한 소설을 많이 읽었고, 상상력의 빈곤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 층간 소음 때문에 들리는 핸드폰 진동음이나 조그만 소음을 들을 때면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이유 없이 상상력이 발휘된 것이다. 옛날에 느낀 공포가 뇌리 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비록 이것이 금방 사그라지지만.

처음과 달리 벽속에 시체가 있지는 않다. 제목 <벽은 속삭인다>의 의미는 연쇄살인범에게 죽은 여자의 흔적이 남은 집에서 주인공이 겪게 되는 공포와 아픔 등이다. 마흔 살 이혼녀 파스칼린은 월세가 조금 비싸지만 원하던 아파트를 빌렸다. 행복한 삶을 꿈꾸고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그런데 첫날부터 이상하고 나쁜 기분이 든다. 그것은 그 멋진 집에서 벌어졌던 살인사건 때문이다. 연쇄살인범에게 한 여성이 그 방에서 살해당한 것이다. 그 살인범은 무려 일곱 명의 젊은 여성을 자기 방에서 강간하고 무참하게 살해했다. 비록 8년 전 살인사건이지만 악과 죽음의 기운이 스며든 방에서 그녀는 견뎌낼 수 없었다. 바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포의 소설처럼 벽에 숨겨진 시체도 없고 귀신이 등장하여 살인의 진실을 파헤치는 유령 이야기도 없다. 있는 것은 이 끔찍한 사실로부터 시작하여 그녀의 딸아이를 잃은 과거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그 사이사이에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한 여자들 이야기가 하나씩 나오고, 그 죽음을 통해 그녀의 내적 평화가 완전히 무너진다. 단순하게 생각할 때 그녀가 이사만 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 잊고 있던 과거를 듣게 되면서 그녀의 특별한 감응 능력이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다섯 살 때도 그녀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이다. 신비나 초월적인 소재로 빠질 위험이 있지만 작가는 개인의 심리 묘사에 집중한다. 

평범했던 삶을 갈아먹는 일상이 시작된다.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던 그녀의 일은 큰 실수로 이어지고, 새로운 남자와의 만남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살해당한 일곱 여자의 집을 찾아다니지만 살풀이는 되지 않고 삶은 점점 황폐해진다. 공포와 불안감이 고조되고, 환상이 어느새 자리잡는다. 일곱 희생자와 여섯 달 산 딸의 죽음이 동등한 무게를 지니게 된다. 살인자에 대한 분노도 깊어진다. 무려 15년 전 일이지만 갑작스럽게 삶 속에 파고든 딸의 부재는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흔들어버린다. 무겁고 무섭고 슬프고 불안하다. 

길지 않은 이야기 속에 담긴 삶의 파괴는 무겁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잊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는 일들이 잔류사념처럼 그녀에게는 다가온다. 그녀 이전에 몇 년이나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잘 이해되지 않고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환상이 생긴다. 친구가 보기에는 심한 정신불안정으로 의사를 찾아가야 할 것 같지만 당사자에게는 그 모든 관심이 간섭일 뿐이다. 작가는 이 과정을 어떻게 보면 잔잔하게 묘사한다. 그 어떤 과장도 없다. 간결하게 묘사된 심리와 상황에 대한 설명은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벽은 속삭인다고 말할 때 앞으로 벌어질 섬뜩한 미래가 그려진다. 잔혹하고 불안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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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7 2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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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8 09: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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