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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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을 처음 만난 것은 <그대의 차가운 손>이었다. 그 당시는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을 때다. 한때 너무 즐겨 읽었지만 여성작가들의 사변적으로 흘러가는 소설에 질렸던 때다. 몇몇 작가의 작품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왠지 손이 잘 나가지 않았다. 그 책을 선택한 것도 우연이다. 사실 큰 기대를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순간 몰입하였고 단숨에 읽었다. 또 다른 장편 <검은 사슴>에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단편집 <여수의 사랑>은 너무 무거워 읽기 힘들었다. 이런 시간들을 하나씩 거치면서 한강이 한승원의 딸이란 정보보다 작가 한강으로 강하게 자리 잡았다. 

길지 않은 장편이다. 채 200쪽이 되지 않는다. 이전의 장편처럼 술술 읽힌다. 작가 소개 사진도 이전과 달리 밝은 웃음으로 가득하다. 이런 자그만 변화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펼친 책 첫 문장이 의문을 불러온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고대 북구의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이다. 보르헤스가 자신의 묘비명으로 써달라고 한 문장이다. 한 연구자는 그 문장을 보르헤스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 말했다. 작가는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고 썼다. 어느 것이 정답일까? 알 수 없다. 이 소설에는 작가의 해석을 염두에 둬야한다.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말을 잃었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조금씩 눈을 잃고 있다. 교차 서술 방식으로 이 두 사람의 현재와 과거를 말한다. 미래에 함께 만날 것이란 예측은 너무 간단하다. 이 둘이 만나는 곳은 희랍어 시간이다. 그녀는 학생이고, 그는 선생이다. 이미 사어가 된 희랍어를 통해 이 두 사람은 만났다. 학생과 선생으로.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그 어떠한 감정도 없었고, 상대방이 지닌 아픔과 장애도 몰랐다. 어쩌면 오해가 더 많다. 평범하지 않은 두 남녀의 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홀리는 일과 비슷하다”(45쪽)고 깨닫고 말했다. 그때 궁금한 것 하나가 떠올랐다. 그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 결혼이 사랑에 의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과거는 상실로 가득하다. 열일곱에 처음 말을 잃고 이혼 후에는 아들의 양육권을 빼앗겼다. 물론 중간에 다시 말을 되찾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말의 상실은 그녀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귀신에 홀린 듯한 사랑을 경험한 남자의 실명은 유전이다. 그의 사랑도 실패했다. 빛도 점점 잃어간다. 이런 그가 그녀에게서 발견한 것이 있다. 어린 시절 경험을 이야기하는 도중에 나온 ‘두려운 데가 있고, 어딘가 지독한 데가 있는 침묵’이다. 여자가 섬세하게 남자의 얼굴에서 눈물을 발견한 것과 비슷하다.

언어와 빛. 이 둘을 잃어가는 두 남녀의 이야기는 가슴 속으로 잔잔히 파고든다. 그들이 느끼는 고독의 깊이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더 짙어진다. 남자가 안경을 깨트리고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하나의 사고는 이 둘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준다. 그리고 그 남자의 입을 통해 언어가 쏟아져 나온다. 눈이 보이지 않는 남자와 말을 할 수 없는 남자의 대화는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여자가 남자의 손에 글을 쓰기 전에는. 그 한계도 분명하다. 보지 못하니 장황하게 쓸 수 없다. 간단한 단어만 쓸 뿐이다. 이 부조화와 불안 속에 둘의 접촉이 일어난다. 그들이 교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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