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진 음지 - 조정래 장편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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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와 더불어 단편을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이다. <황토>가 시대의 비극 속에 각각 다른 아이를 가진 점례의 이야기라면 이번 작품은 1970년대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와 뜻하지 않은 불행으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야반도주한 복천 영감 이야기다. 전작이 시대 속에서 여성이 얼마나 무력한가와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한 어머니의 힘을 보여줬다면 이 작품은 병으로 아내를 잃은 후 너무나도 무력해진 한 가장의 이야기다. 그의 무능력을 사회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개인의 노력이나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농사꾼 출신인 복천 영감은 칼갈이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의 과거는 현재보다 훨씬 좋았다. 물론 해방 후 가담한 사회주의 활동 때문에 5년 징역을 살았지만 부지런하고 착한 아내 덕분에 자영농으로 살았다. 하지만 이 집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은 고생만 잔뜩 한 아내의 병이다. 병원의 오진으로 돈만 날리고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을 지경에 이르고 큰 고통 속에 죽는다. 지금 같으면 의료사고로 병원에 고소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 시절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릴 때 주변에서 들었던 이야기처럼 아내의 병은 집 재산을 조금씩 없애고 결코 빚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 때문에 복천 영감이 선택한 것은 이웃 소를 빌린 후 그 소 판 돈으로 야반도주하는 것이다. 이 장면만 보면 상당히 영악하고 이재에 밝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영악함은 거기까지다.

야반도주한 후 도착한 그에게 떡장수 아줌마는 한줄기 빛과 같다. 그녀와 남편의 도움으로 이런저런 일을 벌려보지만 치열한 삶의 경쟁은 쉽지 않다. 지게꾼이 되어서는 구역을 침범한다고 집단구타를 당하고, 막노동도 패거리 때문에 쫓겨난다. 소 판 돈으로 리어카를 구해 땅콩 등을 팔지만 이것마저도 사기꾼에게 당해 잃어버린다. 지독하게 운도 없다. 무엇보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것에 빠르게 발맞춰 나가는 것인데 그것이 없다. 약삭빠르고, 뻔뻔하고, 능청스럽고, 아주 이기적이야 하는데 그는 선량하다. 이 선량함은 복권 구입에서도 드러난다. 이 복권은 단순히 어린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조그마한 희망이 된다. 이런 삶의 여정은 순수하고 순박하고 진솔한 한 농사꾼이 어떻게 세상의 급박한 흐름 속에 묻혀버리는지 잘 보여준다.

전작도 마찬가지지만 이번 소설도 사회의 밑바닥 삶을 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떡장수 아줌마, 식모 아가씨, 복권 파는 아이, 넝마지기, 지게꾼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삶은 하루살이와 비슷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 주변사람에게 제대로 대우를 받지도 못한다. 삶이 너무 척박하여 남의 여유를 돌봐줄 조그만 힘도 없다. 그런 와중에도 정을 나누는 사람이 생긴다. 떡장수 아줌마는 복천 영감네가 서울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고, 식모 아가씨는 잊고 있던 동향 사람의 정을 일깨워준다. 조그만 선행에서 시작한 복권 사기는 여흥이기도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삶에서 조그마한 탈출구 역할을 한다. 

농사꾼은 어딜 가도 변하지 않는다. 세태에 물들어 빨리 변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그만큼 고생이다. 영악하고 약삭빠르지 못하면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돈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 작가는 이런 세태와 더불어 그 시절의 삶과 풍경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었다. 겨울이 되면 뉴스 단골이었던 연탄가스 중독이나 주인집 남자들의 식모 겁탈 같은 조금은 뻔한 일들이 발생한다. 한번 전락한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식모 아가씨의 사연으로 드러나고, 불행은 바로 옆에서 일어날 수 있음을 떡장수 아줌마 가족을 통해 보여준다. 낯익은 이야기들이지만 반갑지 않다. 지금은 없어진 듯하지만 변형되어 진행되고 있는 현실이기에 그렇다. 시대는 변했지만 상황은 큰 변화가 없다. 어쩌면 상대적 박탈감은 더 심해졌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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