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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블러드머니 ㅣ 필립 K. 딕 걸작선 3
필립 K. 딕 지음, 고호관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평점 :
필립 K. 딕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역시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를 통해서다. 화려한 비주얼에 암울한 영상을 가진 영화가 저주받은 걸작으로 불리면서 관심을 끌었고, 원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토탈리콜>에 원작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당시는 원작소설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21세기에 오면서 그의 소설들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대작으로 만들어진 것이 <페이첵>, <마이너리티 리포트>, <넥스트>, <컨트롤러> 등이 있다. 대작을 제외해도 두 편 정도가 있는데 한때는 SF 영화제작자들이 이 작가의 작품만 영화로 만드나 할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소설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는데 읽는 재미가 상당했다. 하지만 너무 암울한 전개는 기존의 밝은 SF에 익숙한 나에게 조금은 거부감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코 끊을 수 없는 매력을 보여주면서 다음 작품이 나오길 기다리게 만들었다.
이번에 폴라북스에서 나올 필립 K. 딕 걸작선 목록을 보면 이미 출간된 작품도 보이지만 절판되었거나 처음 번역된 듯한 작품도 많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최근에 장르문학에서 한 작가의 전집을 기획하고 출간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 꼭 완간되길 바란다. 이 전집 중 먼저 세 권이 출간되었는데 그 중에서 먼저 시선을 끈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그것은 핵 전쟁 이후 세계를 그렸다는 소개글이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종말 후 세계를 그린 수많은 소설이나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고, 어떤 고난을 겪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어떨지 보여줬는데 암울한 미래를 잘 그려낸 작가라면 어떤 새로운 미래가 펼쳐질지 기대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조금 밋밋하고 또 어찌 보면 독특한 미래의 풍경을 보여줬다. 그것은 종말 후 세계를 처절한 생존의 장으로 보지 않고 조금은 너무 현실적으로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시작부터 평범하다. 닥터 블러드머니로 불리는 브루노 블루스겔드가 스톡스틸 박사의 병원을 방문한다. 이 장면을 흑인인 스튜어드 맥콘치가 본다. 그는 TV판매원인데 낯익은 인물이 병원에 들어가는 것을 보다 가게 주인에게 욕을 먹는다. 그리고 가게 주인은 새로운 TV수리공을 채용하는데 그가 바로 하피 해링턴이다. 그는 해표지증에 걸려 팔다리가 없다. 하지만 기계팔로 TV를 수리한다. 조금 특이하지만 평범한 마을 풍경을 보여주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다. 왜, 누가, 어떻게에 대한 설명 없이 핵폭탄이 터지고 세계가 파괴된 것이다. 이 구분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고 7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는 사실을 이야기 속에서 살짝 풀어놓는다. 변화된 삶을 보여주면서 앞에 나온 등장인물들과 새로운 인물들이 엮이고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한 명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화성으로 가려고 우주선을 탔다가 인공위성처럼 지구 주변을 도는 데인저필드다. 그가 중요한 이유는 우주선에서 지구를 향해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생존자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통신설비가 사라졌고, 식량은 부족하고, 의약품도 부족한 현실에서 이 방송은 자신들 외의 세계와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통로 역할을 한다. 라디오가 아주 귀해져서 라디오 수선공을 납치하려고 할 정도고, 그의 방송이 나오면 마을 사람들은 라디오 앞에 앉아서 그가 들려주는 소설과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데 그를 대신해서 유명세를 얻고 권력을 쥐려고 하는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하피다. 하피는 특수한 능력을 가졌는데 신체에 없는 팔대신 정신의 팔을 가지고 있다. 먼 거리의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가진 팔이다. 또 그는 뛰어난 수선공이기도 하다.
요즘 같으면 작가들이 하피의 능력을 극대화하고 마을 간의 대립을 강화시키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킬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마을 간의 대립은 조장하지 않고, 각 마을이 자치조직으로 운영되게 만들었다. 화폐가 아직도 존재하면서 교환거래를 돕고, 식량 쟁탈이나 기존 물품을 약탈하기 위한 단체나 조직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단지 새로운 능력을 가진 존재를 등장시켜 조금씩 긴장을 고조시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말로 유도할 뿐이다. 한 명에게 이야기를 집중하기 않고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미래의 삶도 현재와 다름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웅이 없는데 이 때문에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완벽한 종말이 아닌 세계에서 우리의 삶이 어떨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