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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미 오브 갓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9-2 ㅣ 아서 왕 연대기 2
버나드 콘웰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아서 왕 연대기 3부작 중 2부다. 이제까지 읽은 버나드 콘웰의 소설은 절대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조금 아쉽다. 실망스럽지는 않지만 기대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다. 아마 이전에 읽은 작품들로 인해 나의 기대치가 높아진 것과 이 책 읽기 전 다른 버전의 아서 왕들을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 다른 책들 속 이미지가 떠올랐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충돌했다. 결말로 가기 위한 단계다 보니 이벤트도 조금 부족했고, 그 무엇보다 조금 늦은 출간으로 1부의 흥분이 많이 가셨다.
전작 <윈터 킹>이 탄탄한 구성으로 색다른 아서를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그 아서가 새롭게 변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느 부분은 예전 스타워즈 초기 3부작 중 2부가 받은 평가가 연상되었다.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끝없이 저항하다가 어쩔 수 없이 변하게 되는 과정이 약간은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전편에서도 기존의 아서 왕 이미지가 산산조각 났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서약을 중시하고, 원칙을 따르며 평화를 바라는 그의 신념은 분명 시대를 초월했다. 그런데 이 초월이 문제다. 그 시대는 그가 외친 원칙과 서약과 왕의 질서로만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기독교와의 충돌은 새로운 시대의 풍경을 보여준다.
전작과 동일하게 데르벨의 회상 방식이다. 처참했던 러그 계곡 전투 이후부터 시작한다. 이 전투 후 데르벨의 지위는 높아지고 더욱 중요한 인물이 된다. 아서 왕 연대기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데르벨의 모험 이야기다. 물론 그 중심에는 아서가 있다. 작가는 아서 왕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구성 대신 데르벨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든다. 아서의 중요성과 위대함은 기본으로 깔아놓고 그 주변 상황을 보여주면서 그 시대를 종합적으로 그려내었다. 데르벨과 만나는 아서의 모습은 지금까지 읽고 본 아서와 다르고 이 다른 모습으로 인해 새로운 아서 왕 이야기가 가능하다.
미신과 광기와 종교의 충돌이 발생하던 시기다. 특히 종교의 충돌은 이번 이야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희미한 어릴 때 기억에 의하면 아서 왕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이번 연대기에서 아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 다만 그의 세력 속에 있는 기독교를 인정할 뿐이다. 이런 차이가 조금은 낯설지만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초기 기독교의 광신적인 모습은 아서의 정의롭고 냉철하고 관대한 지도력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 관대함과 지독한 원칙주의는 그를 위험으로 몰아넣었고 너무나도 순수했던 사랑은 배신으로 그가 새로운 길을 가게 만든다. 이 때문에 그렇게 바라던 아서 왕이 탄생하게 되지만 말이다.
이번 소설에서도 아서 왕 전설 중 두 가지가 깨어진다. 그 하나는 그 유명한 원탁의 기사고, 다른 하나는 성배를 둘러싼 모험이다. 성배 전설은 드루이드의 솥과 연결되고, 이것을 찾기 위한 과정은 초반의 재미를 상당 부분 책임진다. 이 솥을 찾으러 가기 전 데르벨의 사랑이 이루어지는데 이 낭만적인 사랑은 분명 그 시대에 맞지 않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들의 사랑에 박수를 보내고, 시대를 뛰어넘은 사랑을 하는 두 남자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비록 이 두 남자의 사랑이 다른 모습과 결말로 이어지지만 말이다.
원탁의 기사. 성배보다 개인적으로 더 멋지고 낭만적인 이야기다. 전편에서 호수의 기사 란슬롯 이미지가 산산조각 났다면 이번에는 원탁의 기사다. 작가는 원탁의 기사들이 앉을 탁자를 만들려면 엄청난 나무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아서 왕 이후 각색된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원탁의 기사란 말이 나올 때 아서는 왕도 아니었다. 물론 불분명한 아서 왕 기록을 참고한 것이다. 연대기 오기도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하는데 맞는 말이다. 캐멀롯이란 지명도 12세기 이후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아서 왕 전설은 어디까지가 만들어진 것일까 궁금하다.
콘웰은 소설 속에서 아서의 입을 빌려서 정치와 역사 왜곡 가능성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어차피 왕이란 거짓말로 사는 존재가 아니더냐? 거짓말 없이 다스릴 수 있는 왕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왕의 명성을 쌓는 초석이 거짓말이니 당연한 노릇이지. 시인들에게 돈을 주고 비루한 승리를 위대한 업적으로 만들면서도 결국 이따금 그들이 불러주는 거짓말을 믿고 싶어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526쪽) 이 문장을 읽으면서 아서 왕 전설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짐작하게 되었다. 또 왕과 거짓말이란 부분에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표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나중에 다른 것을 위해 그 거짓말을 뻔뻔하게 내뱉는 그 누군가.
흥미 있고 재밌는 소설로 읽어도 좋지만 이 책 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은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시켜준다. 왕과 서약, 새로운 민족과의 투쟁, 고대 종교인 드루이드교와 기독교의 충돌, 수백 년이 흘러도 그 위대함이 변치 않는 로마의 건축물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변할 수밖에 없는 개인, 미신과 저주와 마법의 세계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여기에 더해 피 튀는 전투와 사실적인 묘사는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재미있고 만족스럽다. 이제 마지막 3부에서 왕으로 변한 아서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데르벨의 손은 어떻게 잃게 되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