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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세계
테리 프래쳇 지음, 송경아 옮김, 조니 두들 그림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테리 프래쳇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멋진 징조들>이란 책 때문이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 두 공저자의 이름이 너무 낯설었다. 공저자 중 한 명인 닐 게이먼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를 조금씩 알게 된 반면에 테리 프리쳇은 그냥 공저자였다. 그의 이름으로 검색을 하면 출간된 책 중 <디스크 월드>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표지와 내용이 청소년용(알고 보니 청소년용도 있기는 했다)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신간 목록에서 발견한 이 책은 이름은 많이 들어 잘 알지만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 없는 작가 선집에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읽었다.
뒤집힌 세계란 제목과 남과 북이 뒤집어진 지구의 모습은 이 소설이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을 먼저 품게 만들었다. 책을 펼쳐 읽으면서 세계 창조 신화 하나를 보게 되는데 낯익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먼저 나오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알게 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려야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기존 판타지와는 다른 평행우주를 다룬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평행우주를 다룬 소설과 영화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평행우주론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SF소설일 것이다. ‘아마도’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연걸 주연의 <더 원>을 볼 때 이미 평행우주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이연걸은 평행우주의 신이 되기 위해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가 또 다른 자신들을 죽인다. 그들 모두를 죽이게 되면 유일한 한 사람으로 남게 되고, 신의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설정이다. 굉장히 오락적인 영화인데 내가 유심하게 본 것은 바로 평행우주였다. 물론 이연걸의 멋진 쿵푸 장면은 변함없이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 외에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은 양자역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 ‘뭐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 <쿼런틴>이란 SF소설이다.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란 생각에 읽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난해했다. 양자컴퓨터부터 시작하여 나오는 과학 용어들은 주인공의 능력과 함께 난해함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이 소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은 다른 책과 영화 등을 보면서 익숙해지고 이론을 이해하게 되면서부터다. 언젠가 다시 읽는다면 전혀 다른 재미를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살짝 품는다.
19세기 무렵 영국의 귀족 문화 속에 살던 소녀 다프네와 대남원양의 조그마한 섬 부족의 일원인 소년 마우의 만남은 전혀 다른 두 문화의 충돌이다. 이 두 사람이 마우의 섬에서 만나게 된 것은 지구의 종말처럼 다가온 거대한 파도 때문이다. 다프네가 탄 배 스위티 주디 호가 섬에 갇히고 그녀만 살아남는다. 마우 또한 소년에서 성인으로 가기 위한 시험 도중에 바다로 나왔기에 살아남았다. 처음에 이 두 생존자를 보면서 혹시 지구 종말 후 두 생존자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다른 부족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두 아이들의 만남으로 인해 발생하는 충돌과 오해와 이해의 과정들은 기존에 무인도에 남겨진 아이들 이야기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두 아이가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란 탓에 직접 부딪히기보다 겉돈다. 특히 당시 영국 귀족 여성의 예절에 길들여져 있던 다프네의 경우는 심하다. 사실 그녀는 영국 왕위 서열 134번째 정도다. 그녀의 할머니가 이것을 강조하는데 소설의 설정 중 하나가 그녀 아버지 앞 서열자들이 모두 전염병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그녀가 아버지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가 총과 칼로 큰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홀로 낯선 문화와 만나게 되는 그녀에게 이런 예절은 하나의 속박일 뿐이다. 원주민들에게 이것은 너무나도 불필요한 겉치장인데 말이다. 특히 그곳이 뜨거운 햇살이 가득한 지역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녀가 의례적인 예절 속에 머물 때 마우는 행동에서 좀더 자유롭고, 머릿속에서는 자기 부족의 혼령들과 대화를 한다. 처음엔 환청이 아닐까 의심도 하고, 뭔가 판타지 소설처럼 신비한 힘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하지만 역시 그것 또한 착각이었다. 물론 창조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 로카하와의 대결 속에서 어느 정도 권능을 획득하지만 이때 그는 평행우주 속의 다른 세계를 이해한다. 이 인식과 이해는 다시 우리가 흔히 지금 이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간다면 모든 어려움과 고통이 사라질 것이란 희망 또는 기대가 잘못된 것이란 것을 알려준다. 이모로 불리는 창조주가 지구를 완벽하게 만들지 못했듯이 다른 세계에서도 이런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인식은 정말 탁월한 통찰력이자 인식론이 아닐 수 없다.
처음 마우와 다프네가 소통을 위해 하는 행동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단어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자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오해가 빈번하다. 하지만 두 다른 문화가 충돌하면서 각각의 장점을 받아들이며 새롭게 만들어가는 과정은 자연스럽고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다시 현재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다문화가정이나 이주노동자 문제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언어를 반복과 오해 속에서 배우게 되는 과정은 외국에 사는 선배의 한 마디를 떠올려주었다. “모든 언어의 바탕은 모국어다.”
이름만 알고 있던 낯선 작가의 작품을 알고자 읽는 한 편의 소설이 지금 예상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마우가 자신의 부족 사람들이 모두 죽은 것 때문에 신에 대해 회의를 품는 것과 사제 아타바와의 대화는 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각각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다프네가 타고 온 배에서 나온 철과 도구를 보고 놀라는 원주민들이 이것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는 장면은 문명의 초기 발달사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로카하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마우를 구하기 위해 죽음 속으로 뛰어든 다프네의 활약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뒤바꾼 것이자 서양 신화의 재현이다. 읽을 때보다 읽은 후, 그보다 글을 쓰는 지금 더 많은 것들이 ‘나를 알아줘’하고 외치면서 달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