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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지음, 박광자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잠을 자고 일어나니 투명한 벽이 생겼다. 이 벽 너머 풍경이 보인다. 그곳엔 세수하다 죽은 듯한 노인이나 나무 위에 멈춰선 새 등이 있다. 그들의 모습에서 폼페이의 화석 등을 연상한 것은 죽을 당시 표정이나 동작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벽 너머의 세계는 죽음으로 가득하고, 그녀가 머무는 벽 속의 세계는 자연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벽을 따라 혹시 끊어진 곳이 있나 찾아보지만 견고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그녀는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읽으면서 로빈슨 크루소가 먼저 생각났다. 고립과 외로움과 생존을 위한 노력이 비슷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둘은 다르다. 로빈슨 크루소는 섬 밖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살아남아 구조되길 바라는 반면에 그녀는 벽 밖의 풍경 속에서 희망을 잃고 있다. 희망이 없는데 그녀는 삶을 계속한다. 도시인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구의 종말일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말이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근육은 당겨지고, 초보 농사꾼으로 살아간다. 대단하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 강인한 생명력과 생활력은 단순한 풍경과 상황 속에서 긴장감을 전혀 늦추지 않는다.
작가는 그녀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몇 가지 상황을 만들었다. 먼저 그녀가 사는 산장이 바로 핵전쟁 등이 발생하면 오랫동안 먹고 살 식량을 비축해둔 것이고, 다음으로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줄 동물로 개 룩스와 어미 고양이 한 마리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임신한 암소 한 마리를 주변에 놓아둬 풍부한 우유를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중 의복을 제외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것이다. 옷이야 추위나 다른 곤충이나 벌레를 막을 정도면 되고, 옷장엔 옷들이 꽤 많다. 보여줄 다른 사람이 없으니 기본 기능만 제대로 되면 문제없다. 이런 기본에 산이란 공간이 지닌 풍부한 열매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같이 있다. 비록 그녀가 도시인으로 살아왔다고 하지만 삶을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살려고 하는 의지와 노력이다.
책 속에 다루어지는 시간은 2년 반 정도다. 첫해에 겪었던 시행착오가 되풀이 되는 것도 있지만 점점 적응한다. 다만 풍족하지 못한 음식과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 때문에 고생할 뿐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농사일이란 것이 반복의 연속이다. 새로움도 있지만 땀과 정성으로 일궈지는 것이다. 거기다 그녀 주변에 동물들이 가득하다. 개, 고양이, 암소 등의 가금류뿐만 아니라 고기를 제공할 들짐승도 있다. 고양이와 암소는 임신한 상태고, 새끼를 낳는다. 이 가족이 점점 불어난다. 불어난 가족 덕분에 그녀의 할 일은 점점 많아진다. 쉬고 싶은 순간도 있고,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몸을 이끌고 생활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만이 지구에 홀로 남은 상황에서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함께 살고 있는 동물들이다. 과거 속에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녀에게 큰 아픔이나 의미를 주는 것 같지 않다. 단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갈 뿐이다. 작가는 풍경에 대한 묘사와 그 속에 담긴 그녀의 심리와 행동을 섬세하면서도 차분하게 그려낸다. 문장은 간결하다. 감정이입을 강하게 시키지 않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설명한다. 약간 건조할 수도 있지만 덕분에 그녀가 처한 상황을 더 잘 알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사로잡은 것은 역시 홀로 남았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고, 힘들지만 오늘 하루와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나라면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기는데 말이다. 다시 한 번 더 읽어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