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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와인 ㅣ 환상문학전집 13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애리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2월
평점 :
작가의 다른 소설인 그 유명한 <화씨 451>만 읽었다. <화성연대기>는 읽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니 열외로 하자. <화씨 451>을 읽으면서 보통의 sf소설을 기대했다. 우주여행이나 전쟁 등이 등장하면서 광활한 우주나 괴이하고 특이한 외계인이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기대를 깨고, 책이 사라진 미래를 그려내었다. 그 당시 다른 소설처럼 빨리 읽다보니 그 재미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 같다. 특이하고 문명비판적인 설정과 마무리로 강한 인상을 받았지만 말이다.
이 책은 작가의 반 자전적 소설로 1957년에 출간되었다. 1928년 여름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용한 이른 아침에 열두 살의 더글러스 스폴딩이 모두 일어나라고 외치면서 시작한다. 여름이 시작되었다. 인상적인 도입부다. 이 장면은 책 마지막에 가서 불을 꺼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단 하루에 벌어진 일이 아니지만 여름의 시작과 끝을 마법처럼 펼치고 닫는다. 이런 처음과 끝이 마법처럼 다가온다면 소설 속에 다루어진 많은 이야기는 각각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개인적으로 앞부분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문을 처음 여는 장면부터 더글러스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과 마음에 드는 여름 운동화를 위해 가게 주인을 설득하는 장면은 정말 멋지고 대단했다. 이후 행복기계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삶에 대한 통찰을 잘 드러내준다. 기계 속에서 처음엔 행복감을 느끼지만 결국 울고, 공포를 느끼는 엄마와 아들의 반응은 현실과 미래라는 시간을 잘 보여준다. 기계 속에서 찾던 행복이 창으로 보이는 일상의 풍경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늙은 벤틀리 부인 이야기다. 아이들이 벤틀리 부인에게 10대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하는 대목에선 순수함의 뒤에 숨겨진 악의가 숨 쉬고 있음을 느끼고, 벤틀리 부인이 결국 자신은 늘 할머니였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현실 인정과 추억과의 이별 사이에 놓인 아픔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다시 프리라이 대령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이들이 타임머신이라고 부르는 이 노 대령은 과거는 추억하고 기억하지만 현재는 세상과 닫힌 상태로 고여 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았던 멕시코 시티의 소음을 듣길 바란다. 잊고 있던 기억과 현재의 상태를 연결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이 두 노인의 에피소드는 시간이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마녀와 할머니의 부엌 이야기는 웃음을 짓게 하고, 타로 마녀를 구하기 위한 두 형제의 모험은 순수했던 순간의 한 장면을 본다. 고물장수 조너스 영감과 더글러스의 사연은 동화 속 마법처럼 펼쳐지고, 외로운 사나이와 살인사건을 연결시킨 이야기에선 공포에 짓눌린 한 여인의 빠른 발걸음과 심정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이것 외에도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하나 둘씩 짧게 다루어진다.
전체적으로 문장은 화려한 편이다. 상황을 현실에 기반을 둔 마법의 세계로 그려내기에 그 화려함은 빛을 발한다. 세상을 마법이 가득한 곳으로 보는 아이의 시선을 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아직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선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서정적 판타지라고 표현하지만 한 편의 성장소설이자 한 지역의 삶을 재미나게 묘사한 연작 단편집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