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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와 귀울음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한 작가의 추리 단편집을 이렇게 기분 좋게 읽은 것도 참 오랜만이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단편들이 훈훈한 감정을 전해준다면 이 소설은 은연중에 온다 리쿠 특유의 분위기가 깔려있다. 노스탤지어의 마술사란 말처럼 아련한 그리움과 작품 가득 보이는 유쾌함은 가끔 저 깊은 곳에서 서물서물 올라오는 어둠과 함께 긴장을 풀고 조이고 한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사건의 재구성과 문득 깨닫게 되는 진상은 시선 저 끝에서 꿈틀거리는 악의와 섬뜩함으로 순간 오싹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이 책의 광고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단 하나뿐인 본격 미스터리 컬렉션이란 점이다. 많이 읽지 않은 그녀의 작품들에서 잔잔히 깔려있는 미스터리를 자주 접했기에 약간은 의아한 부분도 있지만 본격이란 단어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이 소설은 전직 판사 세키네 다카오와 그의 아이들이 탐정으로 활약한다. 사실은 거의 대부분 다카오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 전직 판사는 풍부한 경험과 놀라운 직관을 보여주는데 예전에 읽은 미스터리 소설 속 명탐정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세 남매 중 두 명이 보여주는 추리대결도 독자인 나는 이미 간파했지만 놀라운 추리능력을 보여주면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만든다.
열두 편의 단편 추리소설이 실려 있다. 대부분 마음에 든다. 몇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실 확인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탐정역인 다카오의 추리가 논리적이고 이치에 맞게 설명되지만 그것이 명확한 사실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은 작가가 후기에서 말한 ‘설득’과 ‘납득’의 문제이기는 하다. 분명히 독자와의 대결은 불공정한데 독자가 그 추리를 충분히 납득하게 된다면 혹은 즐기게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스럽지 않나 생각한다. 여기서 가끔 나 자신이 말하는 독자와의 공정한 대결이란 부분과 조금 충돌하기는 한다.
개인적으로 <급수탑>, <바다에 있는 것은 인어가 아니다>, <대합실의 모험>이 가장 인상적이고 재미있다. <급수탑>는 추리가 끝나고 길은 나서는 순간 느껴지는 오싹하고 섬뜩한 악의가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그 추리를 되새겨보게 한다. <바다에 있는 것은 인어가 아니다>는 지나가는 아이들의 대화에서 시작된 의문과 추리가 또 다른 사건과 맞물려 이야기를 만드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다카오와 그의 아들 슈운이 함께 추리하는 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대합실의 모험>은 이 단편집에서 몇 되지 않는 명확한 답이 나오는 소설이다. <9마일은 너무 멀다>를 꿈꾸며 쓴 듯한데(불행하게 아직 읽지 못했다) 하나의 대화에서 시작된 의문이 해결되는 그 순간 즐거운 기분을 전해준다. 여기서 탐정역은 현직 검사인 아들 슈운이다.
최근 온다 리쿠의 책을 한 권씩 모으고 있다. 어떤 책은 취향과 맞아 떨어지고, 어떤 책은 잠시 유보 상태다. 하지만 역자의 후기를 보면서 이번 소설집에 나온 인물들이 주연이나 조연으로 나온 책들이 있다니 호기심이 부쩍 생긴다. 그 책들을 읽을 때 과연 나 자신이 그런 사실을 기억할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매력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단편집을 계속 내어준다면 독자인 나는 무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가지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