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녁놀 지는 마을
유모토 카즈미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어느 날 이야기만 듣던 외할아버지 짱구 영감이 집에 나타난다. 처음 보지만 짱구 영감임을 안다. 이렇게 등장한 할아버지는 이 소설의 중심인물이다. 그리고 짱구 영감은 이혼한 후 불안정했던 엄마와 나의 생활에 알게 모르게 활기를 불어넣는다. 밋밋하고 변화 없는 일상에 조그마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비록 사건 사고가 벌어지지는 않지만.
많지 않은 분량이다. 간단하고 빠르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 중심이 아니다. 갑자기 현재의 내가 끼어들어 해설을 하고, 다시 과거로 들어가 이어진다. 이 과정이 무난하게 이루어진다. 이 전환이 화자의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잔잔하게 그 당시 느낌을 전해준다. 현재의 그리움과 과거의 추억은 화려하지도 애절하지도 않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가슴으로 스며든다. 역자가 행간을 읽어야한다는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짱구 영감의 과거를 보면 좋은 아버지가 아니다. 한때 벌이가 좋았을 때도 있었다. 월급쟁이 한 달 수입보다 하루 벌이가 더 좋았던 시절도 있었고, 타고난 능력으로 말을 다루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그 지나간 시절에서 그가 보여준 행동은 책임감 강하고 자식들에게 애정을 쏟는 평범한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물론 자식들이 아버지에 대한 멋진 추억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다. 그 추억만으로 힘겹게 살아온 그들이 그를 쉽게 용서하고 받아들이기는 무리다. 그러나 시간 속에 가족이란 울타리와 정이란 감정은 일상의 행동 속에서 살며시 묻어난다.
화장실 가는 척하며 일부러 발을 밟고, 청소할 때마다 청소기 끝을 부딪치는 미운 감정과 식욕 없는 짱구 영감에게 조금 더 먹이려고 바지락 된장국에 문어머리 회, 쑥갓나물 등 좋아하는 반찬을 늘어놓는 등 가족애가 들쑥날쑥하며 나타난다. 이 뒤죽박죽 감정이 절정에 달한 행동은 한밤중 손톱깍기다. 한밤중에 손톱을 깍으면 부모의 임종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어머니의 이 행동은 자신의 숨겨진 감정의 적나라한 표현이다. 이것은 후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가 전화로 병문안을 요구했을 때 가지 않고 손톱을 깍았던 그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어머니의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이런 일상에서 나왔다면 아버지의 딸에 대한 애정은 딸이 불륜으로 임신한 아이를 잃은 후 나타난다. 새벽부터 먼 길을 걸어 두개의 양동이 가득 피조개를 가지고 온다. 몸도 불편한 영감이 삶의 의욕을 잃은 딸을 위해 온종일을 걸어 바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때문인지 어머니는 다기 생기를 찾는다. 애증이 교차하는 두 부녀의 감정이 묘하게 드러난 대목이다.
소설을 모두 읽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짱구 영감이 어머니의 어린 시절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과연 그를 받아들였을까 하고. 술주정뱅이 아버지들이 하듯이 아이들과 어머니를 때렸다면 그렇게 쉽게 같이 살 수 있었을까 하고. 이제 성인이 된 나 자신도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한 몇 가지 추억이 문득 문득 되살아나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소설 속 화자도 짱구 영감과 함께한 일 년이란 시간이 그의 삶에 가장 강한 추억과 기억을 남겨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