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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밀사 - 일본 막부 잠입 사건
허수정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팩션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이야기의 짜임새와 풀어내는 힘이 예전과 달리 탄탄해지고 있다. 상당히 고무적이다. 개인적으로 역사와 추리소설을 좋아해 팩션을 자주 읽는데 어설픈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한국형 팩션으로 나온 몇 권은 과도한 민족주의나 허술한 구성으로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소설은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을 제대로 살려내고, 역사적 사건을 섬세하게 그려낸 것을 생각하면 분명히 진일보했다.
때는 조선시대다. 효종은 북벌을 계획하면서 배후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일본에 보내는 통신사 편에 밀사 남용익을 보낸다. 그의 임무는 막부의 실력자와 만나 그를 평가하고 밀서를 전해주는 일이다. 그런데 이 밀사가 술에 취해 사고를 친다. 아니 정확히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 부분에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왕의 중대한 임무를 띤 밀사가 술에 취하다니. 여기서부터 밀사는 사라지고, 밀사를 돕던 역관 박명준이 탐정 역을 맡는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납치된 도공의 아들로 10살까지 일본에서 산 인물이다. 비록 지위는 낮지만 그가 보여주는 활약은 통신사 속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이 박명준이란 인물은 이 소설에서 중심인물이다. 그는 소위 말하는 일본통이다. 10살까지 일본에서 살았고, 그 후 일본과 교역을 하면서 지식을 쌓아왔다. 그가 수행 역관으로 선택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냥 평범한 역관이었다면 이 놀라운 음모 속에서 허둥지둥하였겠지만 그는 은근히 정을 느끼고 있던 남용익과 조선을 위해 발 벗고 나선다. 하지만 이 살인사건은 단순히 누명만 벗기면 되는 사건이 아니라 그 속엔 일본과 조선을 뒤흔들 거대한 음모가 깔려있다. 이 음모 속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과거 그가 일본에 살 당시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다. 이제 왕의 밀사를 둘러싼 음모는 그 자체의 힘으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무서운 태풍으로 성장한다.
박명준이 소설의 중심인물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면 일본 막부를 둘러싼 힘의 대결과 음모는 긴장감과 의문을 만들어낸다. 막부의 쇼군이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상황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대신들의 물밑 싸움은 대의 명문을 만들어내어 상대를 꺼꾸러트리려고 한다. 계획한 음모는 예상하지 못한 돌출행동으로 막히고, 단서를 가진 사람은 살해당하거나 사라진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제2차 임진왜란도 불사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단서를 좇는 박명준의 앞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이 등장한다. 이런 좇고 좇기는 상황과 서로가 의심하는 상황은 사건의 배후와 목적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무대를 조선이 아니라 일본으로 잡으면서 풍부한 자료와 상상력을 잘 결합시켰다. 일본 역사와 신화를 끌고 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조선의 전운이 단순히 국내문제만이 아닌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생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의 결과를 알기에 전쟁이 없을 것을 알지만 막부 내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음모는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팩션으로서 어느 정도 힘을 유지하고 있지만 마지막에 모든 음모를 해설하는 박명준의 존재가 너무 과장된 것 같기 때문이다. 불안해하고 좇기는 와중에 고전추리의 명탐정처럼 모든 사건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그의 존재는 감탄의 대상이 아니라 해설자로 전락한 듯한 느낌을 준다. 사건의 진행 속에 충분히 단서를 하나씩 풀어낼 수 있었는데 마지막에 너무 집중했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에 보여주는 또 다른 반전은 조금 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지만 간결한 문장과 빠른 진행과 각 등장인물들의 적절한 역할 분배는 상당히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