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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은 진짜 기억일까? - 거짓기억과 성추행 의혹의 진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캐서린 케첨 지음, 정준형 옮김 / 도솔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언제부터인가 내가 가지고 있던 기억에 대한 상식이 깨어지고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바뀌고, 자신의 기억보다 타인들의 암시에 유도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한때 당연히 정확하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 나중에 한 장의 사진에서 비롯된 기억임을 알고 놀랐던 적도 있다. 너무나도 선명한 기억들도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조금씩 변한 모습을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각의 기억이 윤색된 것이다. 이것을 그냥 일반적인 현상으로만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나쁘게 이용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놀라게 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기억이다. 과연 기억은 올바른 것이고 정확한 것일까? 의문을 제기한다. 최근 몇 권의 심리학 서적에서 이 소재를 간략하게 다룬 것을 읽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두 책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 차이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이 나온 1994년도 당시 미국 분위기와 최근의 미국 사회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억압이란 단어에서 시작한 기억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심리학 서적을 읽다보면 자주 부딪히는 내용이 있다. 어릴 때 기억이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항상 방어기제가 작용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나쁜 기억을 빨리 잊고 싶어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을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잊게 된다. 뇌가 우리에게 베푸는 최고의 선물이다. 헌데 이 책 속에 나온 치료사들은 억압된 기억을 되살려내어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괴롭힌다. 물론 모든 심리치료사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 의하면 상당히 의도적인 행동이다. 근친상간이나 성추행이 어느 범위까지 인정되어야 하는지 문제부터 소송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들은 우리 정서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추행 당했다는 수십 년만의 기억 때문에 자신의 부모를 대상으로 거액의 소송을 거는 모습과 이를 부추기는 치료사 등은 정말 놀라운 사회 모습이다.
또 하나 놀라운 이야기는 잉그램 가족 사건이다. 딸로부터 시작한 고발이 과학적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엄청나게 큰 사건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한 편의 소설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한 사람 바보 만들기는 쉽다고 하면서 집단적으로 한 사람을 놀리는 놀이와 유사하게 느껴졌다. 폴 잉그램의 딸이 주장한 것들이 사실임을 확인하기보다 자백이란 편리한 방법과 조사하는 형사들의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이런 거대한 비극이 발생한 것을 보면 도시 괴담이 현실화되는 듯하다. 물론 이렇게 된 배경에는 그 사회에 존재하는 무수한 근친상간과 소아성애자와 성추행 때문일 것이다. 이것들은 너무 은밀하고 부끄러워 감히 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이 때문에 발생한 수많은 희생자와 피해자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에 그들은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탄숭배나 끔직한 희생제의가 나왔을 때 의심하고 좀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성보다 감성이나 분위기에 휩싸인 사람들의 일상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른 책에서도 접한 단어지만 이제는 심리학이나 심리치료가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는 표현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각각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그들이 하는 말에 권위를 부여함으로서 막강한 힘을 얻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룬 사람들 대부분이 바로 이런 치료사 등에 의해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거짓말도 여러 번 반복되다보면 진짜처럼 느껴진다는 말처럼 억압이란 단어를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 성추행 등을 재구성한 사람들은 진짜로 확신했을 것이다. 환상이 사실의 뼈대 위에 자리를 잡는 경우는 더욱 강력할 것이다.
아직 사람의 뇌에 대한 정확한 답은 없다. 많은 사실이 밝혀졌지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은 더욱 많다. 놀라운 기억력을 소유한 사례가 있지만 대부분 우리는 부정확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그 부정확한 사실에 약간의 암시와 단서를 제공하면 놀라운 세부 사항과 거짓 기억이 만들어진다. 이 책이 재미있으면서 놀라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원제인 ‘억압된 기억의 신화’에서 알 수 있듯이 기억이 억압되었다고 말하며 재구성하는 그 시대의 신화를 낱낱이 파헤친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루어진 몇 가지 사례들을 다른 소설이나 영화에서 본 듯한데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이처럼 기억은 부정확하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몇 가지 단서나 암시를 준다면 어떻게 될까? 재미있으면서도 무서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