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바이 베스파
박형동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보는 만화다. 긴 장편이 아니다. 다섯 편의 짧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투박한 그림체와 간결한 화면구성과 대화는 그 빈 공간과 시간만큼 생각하게 만든다. 단숨에 읽히고 다시 여기저기를 뒤져 본다. 처음에 나는 이 만화가 장편으로 착각했다. 장편을 기대한 나를 약간 당황하게 만들었지만 순식간에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섯 편의 이야기와 다섯 대의 스쿠터가 나온다. 첫 이야기는 ‘톰과 제리의 사랑’이다. 너무 익숙한 이름 아닌가? 아름다운 여자가 된 제리는 톰과 여행을 간다. 오래된 여관에서 제리는 말한다. 그와 함께 섹스를 하는 것은 순전히 경험 때문이지 좋아해서가 아니라고. 그 후 그녀는 자신에게 묻는다. 혹시 자신이 제리를 사랑했던 것은 아닌지? 그들이 함께 탄 스쿠터는 VINO다.

 

두 번째 이야기는 스노우 라이딩이다. 동거 1년만에 헤어지는 커플 이야기다. 그들은 서로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짐을 나누고 서로 이사를 가려고 한다. 헌데 문제가 있다. 집앞에서 주워온 고양이를 처분하는 것이다. 둘 모두 형편이 되질 않는다. 둘은 스쿠터 CITI100을 타고 고양이를 버리러 간다. 흐린 하늘과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기분 나쁜 헤어짐의 길목에서 하나의 좋은 기억을 공유하는 순간이다.

 

세 번째는 ‘밍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소녀’이야기다. 화자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을 요술공주 밍키라고 소개한다. 하룻밤 재워주었는데 이제는 함께 생활한다. 그녀가 요술공주라고 말하지만 화자는 그 말을 믿지 못한다. 오랫동안 요술을 사용하지 않아 이제 10살 소녀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요술을 잃어버린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녀는 스쿠터 TOMOS를 타고 세상을 돌아다닌다. 그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뒷모습.

 

네 번째 이야기는 ‘그랜드마마 피시’다. 부모들은 밤낮 없이 싸우고, 친구들은 자신을 “따”시킨다고 생각하는 고적대 소녀가 있다. 덕분에 그녀는 잠을 잘 자지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스쿠터 FUSION을 탄 소년이 잠이 잘 오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수족관이다. 더 깊은 곳으로 안내된 그녀는 자신이 좋아했던 할머니가 살던 곳과 비슷한 장소를 만난다. 편안한 잠을 원했던 그녀는 100년이라도 잘 수 있다고 말한다. 추억과 나쁜 현실에서 잠은 그녀의 유일한 피난처다.

 

마지막은 표제작인 ‘바이바이 베스파’다. 목숨 걸고 하던 락밴드를 그만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고 싶었던 여자친구가 있던 그다. 하지만 재능도 없고 밥 먹고 살기 적합하지 않아서 음악을 포기하고, 손목에 면도칼자국이 여럿 있던 그녀가 버거워 헤어졌다. 지금까지 그는 하나의 줄을 잡고 있었다. 그 줄은 놓으면 그는 보통의 사람이 된다. 작가는 여기서 말한다. “혹시 어른이 되려는 거니” 어른이 된다는 것이 바로 자신이 좋아하던 것과 헤어지는 것일까? 그것이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일까? 마지막으로 그는 전재산을 주고 산 베스파를 타고 달린다. 비록 내일 팔 예정이지만.

 

많지 않은 분량에 만화다보니 단숨에 모두 읽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여기저기를 뒤적인다. 처음 볼 때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본 만화나 미국 만화의 세련되거나 화려함은 없는데 화면과 단어의 조합이 묘하게 가슴에 파고든다. 거친 스케치에 현실과 환상을 가로질러서 만나는 이야기들이 정말 마음에 든다. 시간 내어 다시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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