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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에그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6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멋진 할머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람은 주인공이자 필립 말로를 흉내 내는 자칭 탐정인 슌페이가 아니라 비서와의 멋진 로맨스를 꿈꾸는 주인공을 멋진 사진 한 장으로 속인 할머니 아야다. 이런 할머니를 처음 접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 생활에서 부딪히면 좋아라! 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소설 속에서는 나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소설은 하드보일드하지 않다. 오히려 유머소설에 가깝다. 읽는 동안 일본 만화에서 많이 본 상황과 장면들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특히 할머니 아야의 경우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좌충우돌하면서 상황을 이끌어가는 독특한 성격이다. 가끔 다른 곳에서도 만나지만 역시 즐겁다. 44년생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서기인지 아니면 최근의 천황 연호인지 구분을 못하게 하는 작전은 일본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젊은 여자의 애교 넘치는 목소리와 나이스 바디를 가진 사진 한 장은 실물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뒤로 가면서 밝혀지는 사실들은 다른 느낌을 환기시켜주지만 멋진 등장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누구에게나 한 권의 책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물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완전히 빠져들지는 않았고 지금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분명히 있다. 탐정 슌페이에겐 그것이 레이먼드 챈들러다. 학교에서 왕따에 심부름꾼이었던 그를 전혀 다른 인물로 바꾼 한 권의 책이자 행동과 삶의 지침서다. 곳곳에 드러나는 행동과 대사는 무게 중심을 잡아주기보다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아 전혀 그 느낌을 살려내지 못하는 단점이 있지만.
말로를 꿈꾸며 탐정사무실을 열었지만 그의 일은 80%가 애완동물 찾기이고, 나머지는 불륜 현장을 조사하는 것이다. 전혀 하드보일드하지 않은 일들로 가득하다. 이런 그에게 모처럼 시체를 마주하는 일이 생기지만 책에서 만난 수천 건의 현장도 소용이 없다. 속에 있는 위액 전부를 토해내는 상황에 처하고 두 발은 떨리고 목소리는 메아리친다. 여기서부터 미스터리가 진행되는데 역시나 혹시가 맞아 떨어졌다. 이 상황에서도 만나는 코믹한 행동들과 인물들은 불균형한 제목처럼 불안하고 뒤뚱거린다.
이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힘이나 웃음을 자아내는 능력은 대단하다. 비록 범인이 쉽게 파악되고, 본 듯한 장면들과 상황이 느껴지지만 작가 나름의 매력이 살아있다. 아마 일본 만화나 애니의 영향을 벗어난 작품을 만나기가 요즘은 더욱 힘들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쌍방에 영향을 주는 요즘이기에 더욱 그렇다. 아닌가? 다음 권도 출간된다고 하는데 기대가 된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그것은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