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 안전가옥 오리지널 24
민지형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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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가옥 오리지널 24권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제목과 출판사를 보고 선택할 때 내가 관심을 둔 것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었다.

얼마나 큰 아픔이 있기에 망각과 축복을 같이 놓아두었을까?

망각하고 싶은 기억에 대한 호기심과 이것을 어떻게 풀어갈까 하는 기대가 뒤섞였다.

하지만 이야기는 나의 예상을 벗어났다. 좋은 방향으로.

끔찍한 폭력과 그 폭력의 기억에 짓눌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 반격으로.

그 중심에는 행복한 기억을 누릴 수 있다고 광고한 제품 라이프 랜드스케이프가 있다.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는 기억을 업로드하고 체험하게끔 하는 기기다.

아주 비싼 이 기계는 사용자의 기억을 다시 경험하게 해준다. 가격은 8990만원이다.

입주 가사도우미 재이는 전 호라이즌 이사의 집에서 근무중이다.

TV 광고 후 집주인 사장님은 그 제품을 사와서 자랑하고, 그 제품을 시연한다.

나중에 사장님이 여행을 갔을 때 재이는 몰래 사용해본다.

사장님과 사모님의 첫 만남과 둘의 아름다운 정사가 나온다.

그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은 이것 이외에도 많다. 이때 나라면 어떤 순간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장님과 사모님의 집안에서의 삶을 생각하면 의외의 순간이다.

어느 날 사모님이 이 기계를 오랫동안 사용한다. 식음을 전폐할 정도다.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는 가정의 모습에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긴다.

사모님이 중식도를 들고 사장님을 난도질한 것이다.

사모님도, 재이도 같이 집밖으로 나간다. 이때 재이는 이 기계를 들고 간다.

이 잔혹한 사건은 방송을 타고, 사모님도, 재이도 잡힌다.

하지만 이 이면에는 호라이즌의 작업이 있었다. 이 일의 담당자는 리사다.

리사는 호라이즌 대표이사의 딸이자 이 제품을 만든 사람이다.

사실 재이는 호라이즌에 먼저 연락해 자수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 이면에는 재이와 친구가 호라이즌의 돈을 노린 작업이 있었다.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는 아주 중요하다.

재이는 이 제품을 팔았다고 말한다. 현금도 보여준다.

리사의 부하 직원들은 직접 거래한 것은 보지 못했지만 전자상가에 들어가는 장면을 봤다.

리사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다르게 생각한다.

경영권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가진 리사는 사라진 재이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레 나온다.

그리고 리사가 의도했던 기계의 사용법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현실이 나온다.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다시 누리기 위한 제품이 나쁜 쪽으로도 이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제품의 성공을 더욱 부채질한다.


이야기는 빠르고 간결하게 진행된다.

재이와 리사를 화자로 놓아두고, 권력과 성폭력과 교묘한 정치 공작 등이 엮인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게 하려는 사람들이 누군지, 왜 그렇게 하는지 보여준다.

우리 현실에서 너무나도 자주 본 장면들이다. 가해자의 입장만 변호한다.

언론이란 탈을 쓰고 가해자의 논리는 피해자의 아픔을 묻어버린다.

가해자의 기억은 잊혀지고, 피해자로 둔갑한다. 잔혹한 현실이다.

소설은 권력이 가진 힘을 무너트리기 위한 노력과 작업을 간결하지만 통쾌하게 다룬다.

현실은 이보다 더 힘들겠지만 마지막 장면은 작은 희망을 품게 한다.

소소한 시작이 좋은 빌드 업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단편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좋은 가독성과 가지들을 빠르게 쳐내면서 이야기를 덧씌우는 능력이 좋다. 그리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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