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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불빛이 붉게 타오르면 - 사르담호 살인 사건
스튜어트 터튼 지음, 한정훈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2월
평점 :
두툼한 책이다. 600쪽이 넘는다. 최근 이런 두툼한 책이 조금 부담된다. 하지만 재밌는 책이라면 그냥 지나갈 수 없다. 이 책을 선택할 때 2021 CWA 대거상 최종 노미네이트와 ‘터튼의 밀실 미스터리는 <보물섬>을 거쳐 마이클 베이의 영화와 만났다.’란 평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보물섬>도, 마이클 베이의 영화도 좋아한다.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1634년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란 점이다. 왠지 모르게 요즘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 손이 잘 나가지 않는다. 재밌게 읽는 책들도 많은데 말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이 책도 재밌게 읽은 책에 속한다.
탐정이 처음 나온 것은 언제일까? 1634년은 분명 아닐 것이다. 세계 최고의 탐정 새미 핍스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인 바타비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송된다. 처음 소개글을 읽고 새미가 주인공으로 활약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 보니 새미의 경호원이었던 아렌트 헤이즈와 총독의 아내 사라 웨셀이 주인공이다. 아렌트는 새미가 무사히 암스테르담에 도착할 수 있게 그를 지키고, 사라는 폭압적인 남편이자 총독과 동행할 수밖에 없다. 이 둘이 만나게 되는 것은 배를 타기 전 혀가 잘린 문둥병자가 저주를 쏟아 내며 불에 타 죽은 사건이 생겼을 때다. 이 첫 만남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항해 중 이 둘은 서로의 정보를 교환한다.
혀 잘린 문동병자가 저주를 쏟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정체도 처음에는 모호했다. 사라는 승무원을 돈으로 유혹해 그의 이름을 알아낸다. 과학적 사고를 하면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저주와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킨다. 사르담호에는 총독이 원하는 물건들이 가득 실려 있다. 이 때문에 배가 8개월 동안 항해하면서 먹을 음식이 충분히 실리지 못한다. 인력의 재배치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새미는 총독의 명령에 의해 배의 가장 낮은 곳에 갇힌다. 그의 죄명은 아직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작고 더러운 선실에 갇히는 것을 새미는 두려워한다. 아렌트는 총독에게 말해 수감된 방을 바꿔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완고한 총독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동병자의 저주는 처음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악마 올드 톰의 표시가 하나씩 나타날 때만 해도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여덟 번째 불빛이 나타나고, 배의 동물이 잔혹하게 죽으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그리고 이 올드 톰이란 악마는 기이하다. 왜냐하면 악마의 표시는 아렌트의 팔에 난 흉터와 닮았고, 그 표시를 처음 사용한 것도 아렌트였기 때문이다. 아렌트에 난 상처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갔다가 혼자 살아온 후 정신을 잃었고, 그때 생긴 것이다. 혼자 살아온 그를 마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멀리하자 그가 어린 마음에 그에게 밉보인 사람의 집 문에 이 표시를 새긴 것이다. 이 작은 장난이 마을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왔다. 올드 톰이라고 불린 사람이 죽기도 했다.
이 소설의 진정한 장점은 17세기 선박과 항해의 현실을 잘 드러내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원들과 군인들이 어떤 인물들이었는지 알려주는 대목에 이르면 왜 그렇게 많은 선상 반란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계급으로 나누어진 구간,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해적과 무시무시한 태풍의 위협 등은 하나의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올드 톰이란 악마의 존재는 항해와 미스터리 속에 초현실적 두려움을 풀어놓는다. 올드 톰이 배에 탄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말을 내뱉을 때 그 존재감은 더욱 커진다. 순간적으로 나의 이성에 잠시 눈을 감는다. 초현실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하고.
두툼한 만큼 물리적인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지루하지 않고, 잘 읽힌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17세기의 마녀사냥꾼 이야기가 엮이고, 올드 톰과 인간의 욕망이 뒤엉키면서 지나간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포세이돈이란 불리는 물건의 존재가 나왔을 때 인류의 항해술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친 물건 하나가 생각났다. 그런데 작가는 이 물건을 십대 천재 소녀 리아가 만들었다고 가정한다. 리아는 아주 뛰어난 발명가이자 천재다. 여자 아이의 이런 능력을 시대는 마녀로 간주한다. 남성들의 기득권과 시대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항해 도중에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과 선원과의 대결 등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재미도, 생각할 거리도 많은 소설이다. 작가의 또 다른 장편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