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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예술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정윤희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21년 12월
평점 :
정말 오랜만에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읽었다. 이 작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필립 말로 시리즈가 생각난다. <빅 슬립>이 워낙 유명해 먼저 읽었는데 솔직히 말해 취향과 맞지 않았다. 당시 나의 취향은 이런 하드보일드 소설이 아니었다. 그러다 시리즈 다른 소설을 읽고 재미를 느꼈다. 도서관에서 한두 권 빌려 읽었는데 나중에 시리즈를 모두 모았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나의 나쁜 습관이 작용했다. 사 놓고 묵혀두기. 그리고 어떤 소설을 읽었고, 읽지 않은 소설은 무엇인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열심히 읽은 책에 대한 기록을 해놓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필립 말로 이야기가 나오면 읽어야지 하는 다짐을 하지만 늘 마음뿐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나는 이 단편집도 필립 말로가 등장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장편일 것이란 추측이다. 첫 단편을 읽고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각각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까지 모두 다른 인물일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책을 모두 읽은 후 낯익은 제목을 검색하고,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 중 최소 한 편은 다른 단편집에 실린 것을 찾았다. 번역된 제목은 다르지만 비슷한 부분이 있었고, 인터넷서점에 나온 샘플 문장으로 같은 작품이란 것을 확인했다. 만약 내가 그 단편집을 가지고 있었다면 서로 비교할 수 있었을 텐데.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비교해보고 싶다.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는 앞의 두 편을 재밌게 읽었고, 여운을 남기는 소설은 <호텔 방의 여자>였다. 다른 단편집에 실린 <사라진 진주 목걸이>이 제외한 소설들은 호텔이 중요한 공간이거나 호텔 직원이 등장한다. 대부분 탐정이 등장하고. 술과 담배와 총과 여자가 항상 나온다. 이런 설정이나 전개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당시 출판계의 현실이 많은 작용을 했다고 한다. 적은 원고료와 독자의 요구 조건 등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다시 다른 단편집에 눈길을 준 것은 대표 캐릭터인 필립 말로가 등장하지 않는 소설들이 나온 드물기 때문이다.
다섯 편의 소설들이 모두 예상하지 못한 반전을 보여준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 첫 단편인 <황금 옷을 입은 왕>의 스티브가 마음에 든다. 호텔 경비직 실직으로 어쩔 수 없이 탐정이 된 그의 활약을 읽으면서 다음 등장을 기대했지만 다른 이야기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재즈 뮤지션 레오파디 살해 위협을 파헤치고 진실을 쫓는 과정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영리한 살인자>는 한 영화제작자의 죽음을 파고들어 그 뒤에 숨겨진 사실을 찾아낸다. 어떻게 보면 뻔한 설정일 수 있지만 건조한 문장과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강한 인상을 준다. 갱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장면을 보면서 옛날 갱스터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사라진 진주 목걸이>는 탐정이거나 한때 용의자였다가 친구가 된 두 인물의 술 냄새 가득한 이야기로 펼쳐진다. 그들이 차를 몰기 전, 또는 운전하면서 마시는 장면 묘사를 보면서 잠시 추억에 빠졌다. 지금이라면 경악할 일이다. <호텔 방의 여자>는 가장 분량이 짧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마무리다.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장면이다. <시라노 클럽 총격 사건>은 왠지 모르지만 앞의 작품처럼 깊게 몰입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도입부 부분을 정독하고 기억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카마디의 활약을 보면서 앞에 나온 인물의 능력이 더욱 비정상적으로 다가왔다. 사건이 해결되는 장면도 역시 깊게 몰입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펄프 픽션에 매력을 느낀다. 대실 해밋도 마무리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