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다 - 카르멘 라포렛 탄생 100주년 기념판
카르멘 라포렛 지음, 김수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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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나온 <나다>의 개정판이다. 작가 탄생 100주년 기념판으로 새롭게 나왔는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추천 글과 함께 역자의 작품해설이 덧붙여져 있다. 이 책을 처음 선택할 때 바르가스 요사의 추천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인적으로 아는 작가의 추천에 상당히 약하다. 장르문학으로 넘어가면 너무 넘쳐 문제지만 그래도 이런 추천글을 보면 눈길이 간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 이후의 삶을 그려내었다고 해서 더 관심이 갔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유명한 고전들도 있지 않은가. 내전 당시 모습을 보여준 작품들에 비해 그 이후 삶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에 살고 있기에 한국전쟁 이후 삶을 다룬 소설에 익숙하기에 그들의 삶도 그렇게 낯설지는 않지만.


읽으면서 몇몇 대목에서는 6.25 이후 서울 풍경을 다룬 소설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낯선 나라의 도시라면 그 이미지를 그대로 대입할 수 없다.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는 비슷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전후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은 거리의 풍경과 그곳에 머물며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안드레아의 시선이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일까? 대학생이란 신분 때문일까? 그녀가 외할머니 집에서 겪게 되는 일들이 그렇게까지 최악으로, 힘든 삶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살 곳이 있고, 어떻게든 음식을 조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횡간을 읽는데 무딘 탓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의 여자가 늦은 밤 외할머니집에 온다. 기차의 연착으로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그녀의 도착을 반겨주는 사람은 할머니가 유일하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외삼촌들이 있지만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바로셀로나에 온 이유는 대학을 다니기 위해서다. 어쩌면 작은 로망이 있었는지도. 숙소가 해결된다는 것은 생활비의 엄청난 절약이다. 하지만 그녀가 살게 된 그 집은 혼란과 가정 폭력과 광기로 가득하다. 안드레아는 그 대상이 아닌 관찰자로 그 집에 머물면서 그 장면들을 하나씩 보고, 각자의 비밀들을 하나씩 알게 된다. 이 소설의 재미 중 하나는 이런 비밀들이 엮이고 꼬인 관계 속에서 드러날 때다.


처음 도착한 그녀를 가장 억압한 인물을 이모다. 그녀의 연금을 대신 수령하고, 끊임없이 잔소리한다. 그러다 내전 당시 있었던 이야기 하나가 그녀의 과거와 엮이면서 슬며시 비밀을 드러낸다. 슬픈 사랑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는 돈을 모아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애잔하다. 이모가 집을 떠나면서 그 방을 차지 했지만 그녀의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연금을 탄 후 억눌렸던 욕망이 튀어나온다. 무절제한 소비로 이어진다. 돈은 금방 떨어지고 배를 곪는다. 그녀가 이런 생활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대학 동창 에나에게 있다. 그녀의 집에서 받은 대접에 대한 대가로 에나의 엄마에게 장미를 선물하기 때문이다. 허세 중 하나는 이모처럼 한 달에 한 번 집 근처 구걸자에게 돈을 주는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알 수 없고 폭력적인 것은 집안에서 일어난다. 후안 삼촌과 외숙모, 로만 삼촌 사이에 일어나는 폭력과 욕설과 미묘한 감정들이 뒤섞여 나타난다. 어떻게 외숙모가 후안 삼촌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알려주는데 이 과정 속에는 또 하나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이 드러났을 때 이 기묘한 관계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낯선 장면 하나가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그것은 후안 삼촌이 외숙모에게 가하는 가정 폭력이다. 아니 이 폭력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후안 삼촌이 자신의 폭력을 후회하고 미안해하는 것을 외숙모가 받아들이면서 그 행위를 반복하게 되는 상황이다. 이런 폭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많이 보지 않았던가.


로만 삼촌은 뛰어난 연주자다. 그의 음악에 매혹되는 장면이 몇 번이나 나온다. 하지만 그 실력을 그는 갈고 닦지 않는다. 그의 음악과 매력에 매혹된 여자들이 있지만 그는 정착하지 못한다. 뒤늦게 감정을 내뱉고 감정을 폭발시킨다. 이렇게 두 형제가 자라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엄마가 그런 행위를 어릴 때부터 용인한 것도 있다. 마지막에 다른 이모들이 와서 한 이야기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 전에 고백한 것도 있다. 관찰자로 그들의 삶을 엿보았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란 감정을 키우려고 했던 그 순간 마주한 현실은 거대한 아픔이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과거 이야기가 하나 흘러나온다.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이야기다. 이것도 로만 삼촌과 관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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